전쟁경제와 상품생산체제의 전환

[페미코노미] 페미니즘과 탈식민-탈자본주의 운동


자기 발밑을 본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 어떤 힘으로 자신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계급적-성적-종적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은 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현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정체성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구조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 왔고, 그 변화의 과정에는 자기 발밑을 보게 하는 타인과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자리한다. 이 노력으로 세상은 새롭게 생성되어 간다.

최근 필자가 계급적-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된 한 다큐멘터리를 만났다. 극장 상영이 시작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자기 성찰과 함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방식과 내용을 생각하게 한다. 이 고민을 더 밀고 나아가면 성적 정체성과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과 현 체제의 대안까지 고민하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1970년대 초반 일본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와 대성산업 등의 폭파를 시도한 〈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 대지의 엄니부대, 전갈부대)의 활동과 그 이후를 따라간다. 여기서 ‘반일’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에 대한 부대원들의 거부를 의미한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을 자행한 일본의 국민으로서 자기 발밑을 본 것이다. 세 부대의 대원들은 ‘전범기업’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행위를 함으로써 사형수가 되거나 무기징역형을 받기도 하고, 감옥에서 죽거나 감옥으로부터 42년 만에 풀려나기도 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전범기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기성찰이다. ‘전범기업’이란 문제의식은 일본이란 국가와 기업을 연결하고 전쟁을 연결한다. ‘무장전선’ 부대원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연동하면서 그것을 문제 삼고 그에 대한 폭력적인 행동을 취했다. 〈무장전선〉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전쟁을 기반으로 한 자본축적과, 동아시아에서 계속 경제적 수탈·침략을 하는 일본의 기업과 국가를 문제 삼았다. 여기서 필자는 제국-자본-군사주의의 연결체로 일본을 보고 그에 맞서 일어난 행동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물론 이 다큐가 제기하는 큰 폭력과 작은 폭력의 문제, 폭탄테러의 가해성과 노동과 기업, 국가와 개인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따로 토론의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감독이 〈무장전선〉과 현재의 일용직 노동자를 연결하고 있다는 점 또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테러의 대상을 기업으로 삼고 ‘반일’을 외친 그들의 문제의식을 지금 한국에 적용하고, 그리고 페미니즘 경제를 이야기하는 이 칼럼에서 반추하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 세계의 운동들을 살피려 해외 활동단체와 활동가들을 만나러 나섰다. 그중 아르헨티나의 해발 4000m에 사는 아브라팜파의 마을사람들로부터 받은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당신들 한국은 잘 사는 나라다. 그런데 무슨 운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때까지 필자의 머릿속 한국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남반구였다. 나의 머릿속 한국과 타국의 한국은 달랐고, 내가 비판하는 한국과도 달랐다. 일본의 과거 지배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한국 국민으로서의 위치와, 멕시코 국경지대의 자유무역지대인 마킬라도라에서 노조를 만들지 못하도록 현지 여성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중소기업들의 국가인 한국의 국민으로서의 수치심은 따로 존재했다. 국내 이주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한국의 이미지와 윤금이 씨의 죽음과 SOFA와 이라크 파병 반대가 사실은 연결된 것이라는 인식이 쉽지 않았다.

한국기업이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제국’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과 한국의 국민으로 이 수혜를 누리는 위치에 있다는 점은 실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위안부’ 운동이 제기한 문제와 한국의 남성중심 민족주의와 한국의 자본군사주의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기업과 국가의 자본축적과 과거 독재 권력이 휘둘렀던 군사주의의 힘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경제특수를 누렸다는 점, 많은 민간인을 살상했다는 점, 현재 사드 배치나 제주 강정의 구럼비 마을이 해군기지로 변하고 있는 점들과 한국의 경제력과 자본축적도 연결돼 있다. 일본 국가의 직접적 사죄와 국가 차원의 보상을 요구해 온 운동과, 오랫동안 여성의 순결을 암암리에 요구해온 한국의 가부장적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이 동시에 진행돼야 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역시 자신의 발밑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와 군사주의가 연동되는 복합체로 규정하는 것과 동시에 현재의 한국을 자본주의-군사주의-신식민주의의 복합체로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삼성 반도체의 백혈병과 관련한 투쟁을 벌여 왔던 유가족과 ‘반올림’, 그리고 당시의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은 삼성을 ‘제국’으로 위치 지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아이젠하워의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와 9.11 이후 미국의 ‘안보산업체’를 떠올리게 된다.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그 전쟁을 민간기업이 치르는 ‘대테러전쟁주식회사’를 떠올리게 된다.

페미니즘운동은 자본-군사-신제국/식민주의와 관련하여 어떤 방향을 가질 것인가? ‘위안부’ 문제를 군사주의와 연결해온 여성운동은 한국의 군사주의와 연동된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드 배치와 세계의 전쟁경제와 군사주의에 대해 페미니즘 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의 생산력을 토대로 하는 자본과 그 축적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야 하는 일과 여성의 노동이 비가시화되고 비가치화되는 것을 바꾸는 일과 자본-군사-(신)제국주의적 경제와 상품생산체제를 연결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재 우리는 상품생산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반자본주의를 탈성장이나 탈탄소의 문제로 접근한다. 국가 간 경쟁체제와 군사력에 기반한 생산체계와 여성의 생산-노동을 비가치화함으로써 가능한 현재의 상품생산체제에 대한 운동이 ‘군산복합체’ ‘동물산업복합체’ 그리고 ‘안보산업복합체’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적 움직임을 만든다면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성권력과 국가-자본 권력의 복합체로서 현재의 자본주의-가부장체제적 경제의 전환은 이 문제와 연결돼 있으며, 현재의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운동과도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서 2018년에 시작한 〈세계여/성노동자대회〉는 여성노동의 가시화와 가치화를 생각하고 있다. 아울러 자본과 군사주의의 연동, 신식민주의와의 연동을 문제로 삼을 수 있는 노동자대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페미니즘을 경유하며 적녹보라적으로 현재의 상품생산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세계여/성노동자대회〉에 동참하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 한편으로는 여성의 생산과 노동을 부각하고 여성의 노동을 가치화하는 과정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군산복합체와 동물산업복합체와 ‘안보산업복합체’를 생각한다. 전쟁경제의 전환을 위해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국가-자본 복합체가 성적인 권력으로 작동하는 지점에 대해 더 민감할 필요가 있다. (신)제국주의적 국가의 기업은 전쟁경제의 특수를 통해 공룡이 될 수 있다. 1970년대 일본 〈동아시아무장전선〉 부대원들의 문제의식과 21세기 테러들을 생각하며, 현시점에서 테러가 아닌 방식으로 전쟁경제와 상품생산체제를 전환할 운동을 지구지역적으로 함께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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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자기 발밑을 본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 어떤 힘으로 자신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계급적-성적-종적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은 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현재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정체성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구조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 왔고, 그 변화의 과정에는 자기 발밑을 보게 하는 타인과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자리한다. 이 노력으로 세상은 새롭게 생성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