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하반기 볼리비아 시위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
10월 18일 볼리비아 대선이 치러졌다. 일주일 후인 10월 25일, 칠레에서는 헌법 개정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진행됐다. 볼리비아와 칠레는 결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양국이 맞이한 이 시기는 남미 전체의 정치적 지형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 남미지역에서 국가 간 협력과 지역공동체는 국내 정치와 밀접하게 연동된다. 볼리비아와 칠레가 넘고 있는 파고가 남미 지역 전체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모렐로스의 시대에서 MAS의 시대로
대통령 선거는 에보 모랄레스가 볼리비아를 떠난 지 1년 만인 10월 18일에 치러졌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선거가 세 차례 연기되면서, 예정된 선거 진행을 요구하는 총파업까지 벌어진 터였다. 개표 초기부터 ‘사회주의로의 운동’(MAS)의 루이스 아르세와 다비드 초케우안카의 우세가 확인됐고, 23일 최고선거재판소는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과 다비드 초케우안카 부통령의 당선을 공식 발표했다. 최종집계에 따르면, 투표율은 88%였고, MAS의 득표율은 55.1%였다. 2위인 ‘시민공동체당’(CC)의 카를로스 메사는 28.83%를 득표해, 1위와 2위의 득표율 차이는 26%p였다. 결선투표까지 가지 않기 위한 두 가지 조건, 50%이상 득표와 2위 후보와의 득표차 10%p를 충족해 당선이 확정됐다.
에보 모랄레스의 사퇴를 둘러싸고 ‘장기집권에 실패한 독재자’ 혹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합법적 정부의 전복’이라는 상반된 견해가 팽팽하게 맞섰으나, 어느 입장에서든 에보 모랄레스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따라서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 2020년 대통령 선거전은 ‘MAS 이후의 정치’를 향해 나가는 전환기로 해석됐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MAS 이후’가 아닌 ‘에보 모랄레스 이후의 MAS’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치평론가들은 에보 모랄레스와 MAS를 동일시했으나, 볼리비아 국민은 에보 모랄레스라는 인물과 MAS를 분리시켰다. 볼리비아 국민이 선거를 통해 내놓은 판결문에 따르면, 종지부를 찍은 것은 에보 모랄레스라는 인물의 장기 집권 의지이지, 그가 구현해 온 프로젝트 즉, MAS로 결집된 정치적 의지가 아니었다. ‘에보 모랄레스 사퇴의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협소한 질문은 이번 선거를 통해 ‘볼리비아 국민의 정치적 의지는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재번역 됐다.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의 선거 전략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있었다. 대선을 둘러싼 대부분의 정치담론은 에보 모랄레스에서 출발해 에보 모랄레스로 수렴되고 있었다. 득표율 2위를 기록한 CC의 후보, 카를로스 메사는 에보 모랄레스를 준거점으로 삼아 반모랄레스 진영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은 에보 모랄레스와의 차별화 전략을 선택했다. 선거운동 초반 코로나19 확산이라는 변수는 에보 모랄레스라는 과거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 새로 맞닥뜨리게 될 미래에 대한 질문을 부각시킬 수 있는 국면을 열었다. 그는 ‘에보 모랄레스 이후의 볼리비아 정치는?’이라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볼리비아의 당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에보 모랄레스 집권 시기 루이스 아르세는 대중적 지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라파스 출신의 도시민인 그는 원주민이라는 문화적 배경과 농업노동자라는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점 때문에 그가 득표율 50%를 넘기리라고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문제로 물러나있었던 2017~2019년 사이 18개월을 제외하고는 에보 모랄레스 집권 기간 내내 재무부 장관으로 경제 정책을 설계했다. 루이스 아르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배경을 에보 모랄레스로부터 승계 받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립의 길을 택했다. 그는 오히려 ‘첫 번째 원주민 대통령’이라는 에보 모랄레스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청년들의 정부를 주장하며 MAS를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켰다. 또한 장기집권 의지가 없음을 명확히 하고, 에보 모랄레스 사퇴에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루이스 아르세는 에보 모랄레스의 그늘에서 MAS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재무장관이라는 그의 이력은 코로나19로 휘청거리는 볼리비아 경제를 안정시키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 지난해 하반기 볼리비아 시위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
전통적으로 에보 모랄레스의 반대세력이었던 저지대 산타크루스 지역은 문화적으로 고산지대 원주민과 오랫동안 대립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산타크루스 지역 내 중하위 계층은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루이스 아르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산타크루스 지역의 35%가 MAS를 선택한 것은, 에보 모랄레스를 중심으로 구축된 고산지대 중심의 정치적 전선이 계급중심으로 재조정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고산지대 코카 재배 노동자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지지기반으로 갖고 있던 에보 모랄레스는 그만큼 지지기반에 속하지 않는 부문을 포용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MAS는 이번 선거를 통해 지지기반을 확장시켰다. 에보 모랄레스가 MAS를 이끌었을 당시에는 숨어있던 표들이 루이스 아르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부통령으로 당선된 다비드 초케우안카는 MAS의 주류를 이루는 표들을 지켜냈다.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의 노조 지도자로 에보 모랄레스 정권 시기 외무장관을 지냈던 그는 원주민 집단 내 신망이 높으면서도 최근 몇 년 동안 에보 모랄레스의 행보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MAS의 지지세력을 결집시켰다.
마지막으로, 에보 모랄레스와의 연합으로 오히려 약화됐던 노동자 농민 단체들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재정비됐다. 코로나19로 재차 연기되는 대선을 요구하기 위해 8월에 진행한 총파업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춘 시민사회 부문을 부활시켰다. 시민사회는 에보 모랄레스가 아닌 MAS를 지지함으로써 정당과의 관계를 재정립했으며,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이뤄졌다.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 MAS는 하원 130석 가운데 73석, 상원 36석 가운데 21석을 차지하며 다수당의 위치까지 유지하게 됐다. 이러한 MAS의 압승을 근거로 1년 전 에보 모랄레스의 사퇴를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2020년 선거에서 MAS의 승리가 볼리비아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를 포착하지 못한 탓이다. 10월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에보 모랄레스의 적법성이 아니라 1인 인물 중심의 정치 지형이 정당 정치로 재편되는 과정이다. MAS에 대한 기대와 지지의 핵심을 루이스 아르세와 다비드 초케우안카가 어떻게 해석해낼지 기대해볼 만하다.
비로소 피노체트를 넘어서는 칠레
10월 25일 칠레는 헌법 개정 여부와 헌법작성기구 구성에 관한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지난해 10월 18일 칠레 산티아고를 휩쓸었던 대규모 시위는, 한 달 후인 11월 15일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한다는 정당들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민투표는 두 가지 안건을 다뤘다. 첫째, 개헌에 대한 찬반, 둘째, 제헌의회를 신규 선출 의원으로만 구성할 것인지 기존 의회와 신규 의원을 동률로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었다. 투표결과 78.27%가 헌법 개정에 찬성했고, 79.1%가 신규 선출 의원으로만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안에 손을 들었다. 이로써 칠레는 40년 만에 1980년 헌법의 틀을 바꾸고, 피노체트가 물러가며 1990년 시작된 제5공화국을 30년 만에 종결시키며 독재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10월의 대규모 시위는 피노체트 독재에서 출발한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모델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 그런 점에서 기존체제와 단절하려는 강한 의지는 제헌의회를 온전히 새롭게 구성한다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투표율은 50%를 기록했다. 의무였던 투표를 자율에 맡기기 시작한 2012년 이래 가장 높은 참여율이었다. 이제 2021년 4월 11일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진행될 것이다. 선출된 의원들은 9개월~1년 동안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고, 작성된 헌법을 인준하는 국민투표가 다시 진행될 것이다. 10월 25일은 총 3번을 치러야 하는 투표의 첫 번째 투표였던 셈이다. 그리고 헌법 개정과 동시에 2021년 11월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다. 예정된 계획대로라면 1년 후인 2021년 10월은 헌법개정안을 둘러싼 논쟁과 막바지 대통령 선거전이 동시에 치열하게 진행될 것이다.
▲ 최근 칠레 시위 장면 |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가 동시에 진행될 2021년은 피노체트의 유산을 청산한 적 없었던 칠레가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는 출발점이자, 신자유주의 기조를 충실히 따라왔던 칠레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헌법 개정을 이루어낸 대중적 요구는 보건 및 교육 부문의 평등이라는 구체적인 실감과 맞닿아 있다. 가치로서의 평등이 아닌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평등을 손에 넣기 위해 ‘깨어난 칠레인들’은 헌법 개정이라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들이 새로운 헌법에 투영되길 희망하는 새로운 국가의 청사진은 사회 기초분야의 사유화를 저지하고, 국가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에 가깝다.
그러나 헌법 개정 결정까지의 지난 1년 동안 대중의 힘을 정치적 자산으로 독점한 정당이나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중고등학생의 저항에서 시작된 대중시위는 끝까지 대중적 요구로 남아 헌법 개정을 손에 넣었다. 국민투표를 결의한 것은 기성 정당들이었지만, 어느 정당도 지난 1년 동안 그 주도권을 손에 쥐지 못했고, 대중적 요구를 바짝 뒤따를 뿐 앞서 나가지 못했다. 제헌의회가 신규 의원으로만 구성되게 된 지금 기성정당의 정치적 지분 역시 큰 폭으로 재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제헌의회는 남녀동수 원칙과 원주민 등 사회적 소수집단의 대표를 포함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구성된다. 이제 칠레는 새로운 정치집단, 새로운 정당,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가 출현하는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남미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킬까
2000년대 시작된 이른바 남미의 분홍빛 물결은 2010년대 중반부터 보수적 물결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일국 차원의 정치를 넘어 국가 간 지역 차원에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왔던 남미에서 2020년 10월 볼리비아의 대선과 칠레의 국민투표는 새로운 흐름을 기대하게 만든다. 남미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선두주자였던 칠레는 근본적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분홍빛 물결을 이끌었던 볼리비아는 우파의 물결에 잠식되는가 싶었으나, 물결이란 밀려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오히려 더 거대한 물결이 되어 밀려오고 있다.
경제 공동체라고 일컬을 정도의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국가가 취하는 경제 발전 모델은 인접국의 경제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현재의 경제 상황 혹은 기대되거나 예상되는 경제 상황 역시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남미의 정치적 지형을 묘사할 때 ‘도미노’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직접적이고 강도 높은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닐지언정, 구체제와의 단절과 새로운 체제수립을 향한 이행기라는 2020년 10월의 파고가 남미 전체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내심 기대되는 것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