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궁전>

[리부트reboot]

끊임없이 훈련을 반복하고 머릿속에 기억의 보관 장소를 영원히 새겨 넣으려고 노력하면, 결국에는 가공의 장소도 마치 현실세계가 되어 결코 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중


A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현장학습 날이었고, 집합 장소는 자갈돌이 많은 바닷였다. 모임 장소에 집결하던 중 누군가 &어이&라고 소리쳤다. A를 부른 사람은 학교 선생이었다. 휴게소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꽤 더운 날씨에 A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 선생은 A의 학년과 반, 이름을 물어보며 샌들을 벗어 손에 쥐라고 했다. 그 순간 A의 뺨이 몇 차례 얼얼해졌다. A는 한참 뒤에야 아픔을 느꼈다.


A는 교무실에 심부름을 갔다. 담당 선생이 교무실에서 수업 교보재를 챙겨오라고 했다. A는 교보재를 들고 교무실에서 나왔다. 교실로 몇 걸음 갔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A를 불렀다. 그 선생이 위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선생은 얼굴이 하얀 편이고, 빛바랜 금색 안경을 끼고, 2:8 가르마를 하고 있었다. 그 선생은 본인의 슬리퍼, 짙은 색에 지압용 돌기가 있는 것으로 A의 뺨을 때렸다. A는 뺨을 몇 번 맞고 난 뒤 잘못을 알 수 있었다. 교무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 A의 볼에 슬리퍼 밑창 모양이 새겨졌다. 그 무늬는 3일이나 지나서 사라졌다.


더운 여름날, 귀가 큰 선생의 수업 시간이었다. 어떤 이유로 A를 포함한 몇 명이 교단으로 불려 나갔다. 그 선생은 ‘행복 찾기 준비’라고 말했다. A는 양쪽발을 어깨너비 정도로 벌려 교단 위에 두고 손은 교실 바닥에 두고 엎드렸다. 귀가 큰 선생은 차례로 학생들의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넣고 허벅지 가장 깊은 곳을 꼬집으면서 질문했다.

‘행복이 보입니까?’


정해진 대답은 ‘행복이 보입니다.’였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을 마치기 전에 몇 번이고 살을 비틀어 꼬집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대답한 B는 행복을 일찍 찾은 대가로 밀크커피를 사러 다녀왔다. 남겨진 학생들은 커피가 올 때까지 행복을 찾았다.


그즈음 부대 내에서 연달아 폭행 사건이 있었고 보일러실에서는 자살 시도가 있었다. 그날 저녁 부대 내 전체 이등병들은 강당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고위 간부가 강당에 들어왔다. 그리고 A4 용지와 펜을 나눠주었다. 무기명이다, 철저한 비밀 보장을 한다, 지목된 사람은 바로 다른 부대로 옮기게 한다와 같은 말을 했다. 덧붙여 한 글자도 쓰지 않으면 아무도 못 나간다고 했다. A는 한 선임병에 대해 썼다.

그때부터였다. 며칠 동안을 A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서 제외되었다. 낮에는 모든 사람이 A를 투명인간 보듯 대했고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대신 매일 밤 불려가야 했다. 언젠가 일과 중에 다른 선임이 몰래 와서 A에게 말했다. ‘걔 옆에 있는 다른 새끼도 같이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A는 부대 사정으로 동기들 몇 명과 함께 조금 더 큰 부대로 옮기게 되었다. 시설도, 위치도, 환경도 훨씬 좋았다. 그곳의 선임들은 욕을 하지 않았다. 군화도 본인들이 손질하고, 빨래도 본인들이 했다. 비누가 아닌 샴푸를 쓸 수 있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샤워도 매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온수도 자주 나왔다. 다만 A의 등에 올라타서 걸레질 경주를 시킬 뿐이었다.


다만 모기가 득실거리는 여름밤에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 되었다. 다만 선임의 인간 새가 되어 날갯짓을 하며 심부름을 하면 되었다. 레슬링의 조르기, 꺾기 기술의 연습 상대가 되면 되었다. 매일 밤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성행위 하는 시늉을 지켜보면 되었다. 그래도 그 전보다는 좋다고 생각했다.


A는 어느새 선임이 되었다. A가 부리는 인간 새 몇 마리가 생겼다. 모기가 득실거리는 여름밤에 후임들을 밖에 세워둘 수 있었다. 후임들의 개인물품을 뒤질 수 있었다. 언제든지 후임의 모자 챙을 내려칠 수 있었다. 성행위 하는 시늉을 하던 선임, 초임 간부에게 적당히 반말을 하고 대충 무시할 수 있었다. A는 스스로 좋은 선임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병사가 탈영을 시도했다. 간부들은 A에게 그 탈영병이 평소에 정신이 이상했었다고 말했다. A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A의 내무반을 포함한 건물 전체에 피자 배달이 왔다. 옆 내무반의 갓 들어온 이등병이 샀다고 했다. 간부가 와서 그 이등병의 부모님이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했다. A는 그때 타워팰리스를 처음 들었다. 그 이등병의 아빠는 판사, 엄마는 서울의 모 대학 교수라고 했다. 간부는 병사들에게 특별히 그 이등병을 잘 대해주라고 했다. A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종종 바깥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A의 전역 날이 되었다. A는 버스 터미널에서 처음 부대에 같이 있던 동기들을 봤다. 몇몇은 이미 취해있었다. 2년 전 어렴풋이 기억나는 얼굴들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로 마주쳤지만 못 본척했다. A는 버스에 타는 순간 모든 기억을 지웠다. A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의 궁전>은 스페이스99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무색사회; 중앙정보부60>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21.06.09. ~ 2021.08.11. 스페이스99(서울시 구로구 부일로9길 135,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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