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헌신으로 유지되는 가사‧돌봄 이제 그만!

[가사‧돌봄 사회화③]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을 제안하며

좋은 가사‧돌봄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 보니 이 사회가 아이를 길러내고 병든 이를 돌보는 데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을 돌보고 길러내는 연대와 협력의 과정이 얼마나 개인의 책임, 특히 여성의 책임으로 내맡겨져 왔는지, 국가와 사회의 역할 방기 속에 가사‧돌봄이 얼마나 자본의 이윤중심으로 재편돼 왔는지, 이 속에서 가사‧돌봄 제공자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말이다.


용두사미가 된 문재인 정부의 가사‧돌봄 공공성

가족 내 ‘그림자 노동’으로 존재했던 가사‧돌봄 노동을 사회의 영역으로 끌고나온 것은 정부의 ‘시장화’ 정책이었다. 산업적 측면에서 추진된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은 사회서비스 시장을 민간시장 중심으로 확대시켰다. 이는 사회서비스 공급의 98.1%를 민간이 수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2017년 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정부의 사회서비스 투자 예산은 연간 총 41조 원 규모다. 2006년 이후 2020년까지 투입된 저출산 예산은 238조 원, 2021년 정부의 저출산 예산편성은 46조 원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에 대한 제한적 규제와 평가시스템을 통한 관리 역할만 고집했고, 직접적인 서비스제공을 위한 공적공급체계 구축에는 소극적이었다. 문재인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사회서비스원 구상 역시 민간자본의 이익만을 수호하려는 국민의 힘과 맥없이 이를 수용한 민주당의 야합 속에 돌봄의 공공성 구축이라는 목표는 실종되고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규모는 약 110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평균 명목임금은 전 산업노동자의 70%에 불과하다.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간병사, 초등돌봄전담사, 방과후교사, 장애인활동지원사 등 대부분의 돌봄노동자들은 기간제, 시간제, 또는 시설이나 플랫폼기반 파견노동 등의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일하고 있다. 민간·가정어린이집 보육노동자의 90%는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요양기관의 노동자들은 보험수가체계에 맞춰, 활동지원사들은 바우처수가에 맞춰 급여가 결정된다.

돌봄노동자 중 많은 이들이 이용자와의 계약관계가 유지될 때만 일할 수 있어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 시설에 소속돼 있을 경우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 받는다. 직업소개소나 플랫폼을 통해 파견노동을 하고 있는 가사서비스노동자들은 68년 동안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가사노동자법 통과 이후에도 대다수의 미인증기관 가사사비스노동자들은 노동법이 배제된 노동현장에서 위태로운 노동을 이어가야 한다.

사회화, 낯설지만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일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격언이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가사‧돌봄 사회화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파헤쳐놓은 공동체의 돌봄의 가치가 얼마나 훼손됐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받은 질문은 “가사‧돌봄은 개인의 영역인데 사회화한다는 게 낯설어요. 어떤 구상이신가요?”였다. 그만큼 가사‧돌봄의 사회화 요구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낯선 영역에 있다.

하지만 가사‧돌봄 사회화는 지금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를 조건 없이 제공하는 사회를 모두가 바란다. 돌봐야할 어린 아이나 아픈 가족이 있을 때에도 가사와 육아, 간병에 치이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돌봄 제공자인 가사‧돌봄 노동자에게 ‘희생 노동’이 아닌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질 높은 노동환경을 조성하는 게 노동자들의 간절한 요구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제공받는 사람이 나뉘어져 있지 않은 상호 돌봄이 가능한 사회, 가족구성원 중 누군가(엄마, 할머니, 딸)의 가사‧돌봄 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것,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가사‧돌봄의 사회화가 낯선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게 낯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며 유지했던 가사‧돌봄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 구조와 담론 때문이다. 이걸 넘어서면 가사‧돌봄의 사회화는 가장 필요하고 간절한 요구가 된다.

우리는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을 통해, 현 시기 가사‧돌봄 혁명의 필요성을 알려 나가려고 한다. 노동의 위계화와 성별 분업 체계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는 지금, 시장화 방식은 삶의 위기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사‧돌봄 노동이 연대와 협력에 기반을 둔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우리 모두가 제공자이자 수혜자가 돼야 한다고 선언한다.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하기 위해 공적 공급체계로의 전환과 가부장적 성별 분업 철폐, 가사‧돌봄 노동자의 적정한 임금과 안전하고 안정된 일자리, 노동기본권 보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가사‧돌봄 사회화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며, 가사‧돌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철폐, 평등과 연대의 대안사회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이 가사‧돌봄 사회화 운동을 촉발시키는데 작은 불씨를 당길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단순히 국가와 공공이 운영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방망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공적 가사‧돌봄 체계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11월 30일 출범하는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행동’은 공공-지역사회(public-community partnership. PCP) 공급체계를 제안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민간위탁의 재공영화, 지역별 사회서비스원과 더불어 ‘통합 가사‧돌봄 서비스센터’ 설립, 의료-돌봄의 통합, 돌봄자치위원회를 통한 수평적 연대를 주장하고 도모해나갈 것이다. 가사‧돌봄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과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 인정 방안을 제시해 더 이상 가사‧돌봄 노동이 무가치한 노동으로 평가받지 않게 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재구성,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등 성평등‧한 가사돌봄 분담을 통한 성별분업 해체를 위한 방안을 요구해나갈 것이다.

더 이상 자본에 의해 돌봄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도록, 가사‧돌봄 사회화 운동을 통해 이윤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의 돌봄 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떼길 염원한다. 자본주의의 이윤추구와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것, 이윤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돌봄 경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회, 누구나 소외되고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데 함께 힘을 모으자.

“돌봄 노동이 값싼 노동이 아닌 서로를 지키는 노동으로 존중받고 인정되길!”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에 참여한 한 선언자의 바램이 현실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길에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대가 모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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