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워커스 사전]


노동자를 비용으로 부를 때

대학 교양 수업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말했다. 경영학 전공자인 그는 오늘 강의에서 나온 한 단어가 지금까지 전공수업을 통틀어 들어본 것보다 더 많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그 단어는 ‘노동자’였다. “그럼 노동자를 뭐라고 부르나요?” 나는 ‘근로자’나 ‘피고용인’을 예상했지만,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냥 ‘비용(cost)’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쓰는 것 같아요.” 학문에서 개념을 추방한다는 것은 연구의 대상이 돼야 할 존재가 연구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다. 학부 학생이 수업 시간에 ‘노동자’란 단어를 듣기 힘들다는 건 곧 노동과 노동자를 연구하는 교수가 그만큼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경영학과라는 특수성만도 아니다. 거의 모든 분과학문에서도 ‘노동자’는 희미해졌다. ‘비용’은 들여다보면서 ‘노동자’는 보지 않는 교수들로 가득 찬 대학에서, 역설적으로 그들의 학생들은 임노동자의 문턱도 넘기 힘든 대기 실업군 상태로 간절히 노동시장에서 고용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자를 자기 자리를 뺏는 경쟁자로 보거나 ‘저렇게 살고 싶지 않은’ 부정적 대상으로 표상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노동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는 나날이 커진다.

노동자란 말을 듣기 힘들다는 것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 말의 대체용어였다. 이전에도 노동자를 대체하는 대용어는 많았다. 한국에서 80년대까지 노동자는 불온한 말이거나 미천한 말이었다. 군부 독재는 공산주의자들이 드높이는 ‘노동자’ 대신 ‘근로자’란 용어를 쓰도록 강제했다. 메이데이가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로 불리는 이유다. 노동자도 스스로를 노동자로 부르기보다 ‘직원’이나 ‘직장인’ 등으로 호명했다. 무슨 일 하느냐는 물음에 ‘노동한다’고 하면 하층노동에 종사하는 부랑노동자 같은 이미지를 주었지만, ‘근로자’나 ‘직장인’, ‘직업인’은 쇳밥과 기름 냄새를 깔끔하게 세탁해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용어들은 노동자들에게서 자기의식으로서의 ‘노동자 의식’, 즉 계급의식과 주체성을 지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21세기에 노동자의 대체어는 보다 교묘하고 세련된 이름들로 변모했다. 파트너, 프리랜서, 독립계약자, 플레이어 같은 새로운 이름들은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위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기만적인 것은 아마 노동자를 ‘기업가(1인 기업)’로 부르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비용’으로 표상하는 사고에는 특별한 위험성이 내재해있다.

역사상 노동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사회

노동을 비용으로 환산하는 것은 임금을 손실로 계산한다는 뜻이다. 손실을 줄이려면 노동자를 없애야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게 ‘박멸의 논리’가 작동한다. 어떤 비용이든 제로(0)가 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니까. ‘비용을 최소화하라’는 작업지시는 ‘해고하라’ ‘임금을 삭감하라’는 말이지만, 존재를 숫자로 환원하는 순간 그 지시를 이행하며 비용을 계산하는 작업자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양심의 장벽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경제화된 파시즘은 이토록 합리적으로 재현된다. ‘경영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투자자에게 돌아갈 이익을 최대화하고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작업은 아우슈비츠의 설계자들이 효율적 운영을 목표로 수용소와 가스실을 설계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그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구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행위를 유죄로 판결한다. 그러나 개인에겐 마땅히 유죄가 되는 일이, 수많은 노동자를 치명적 상태에 빠트리고 때로는 죽음까지 몰고 가더라도 법인(기업)이 자행하면 무죄가 된다.

이만큼 노동자에 적대적인 사상이 출현한 적은 인류 역사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노동자 모집이 자본과 국가의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발전 단계에서도 국가는 노동자를 ‘산업 역군’이라 치켜세우며 근면, 성실, 사명감, 직업의식 같은 노동자의 미덕을 창조하고 교육하며 공장에 조달했다. ‘자원 없는 나라에 사람이 자원’이라는 말속에도 인재(엘리트) 양성과 함께 노동자 양성의 목표가 나란히 들어있었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기업은 더 이상 노동자를 ‘산업 역군’으로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업은 기술을 연마하고 경험을 쌓아 높은 숙련도를 가지고 좋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적 노동자들을 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작업 과정을 단순 반복적 형태로 만들고, 라인을 교체하며 노동자들이 동료 관계와 숙련을 쌓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보조자로 만들며, 초단기 노동과 미세노동의 현장을 수없이 전전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노동자의 힘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위험에 빠트린다.

노동자 없는 노동, 고용 없는 노동자

플랫폼 기업이 창조한 ‘고용 없는 노동’은 노동자들을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의할 수 없는 무권리 상태로 몰아넣는다. 노동자들은 취업과 실업을 수없이 반복하며 노동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구직과 노동 대기 상태에 허비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노동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기 노동에 대한 의미와 보람, 사회적 인정, 미래 전망을 모두 박탈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 이외 사회적 삶과 정치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존재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체제를 재조직화하는 데 가장 앞장서고 있는 것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이다. 필 존스는 《노동자 없는 노동–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에서 하이테크 노동 착취와 수탈의 실상을 상세히 고발한다. 그에 따르면, 2018년 테슬라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위해 생산한) 미가공 데이터 중 75% 이상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몰린 베네수엘라인들에 의해 라벨링 됐다.”(1) 라벨링은 인공지능의 학습을 위해 이미지, 영상, 텍스트 등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으로, 이러한 데이터 가공 작업에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이 동원돼 착취당하고 있다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경제를 붕괴시킨 나라에서 미국 기업이 삶의 모든 수단을 잃고 절체절명의 상태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맘껏 건져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로봇인가 인간인가를 인증하는 절차를 밟을 때마다 보는 고양이나 신호등 사진은 누군가 수없이 반복한 라벨링 노동의 결과물이다. 초국적 자본과 전 세계의 데이터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거대 플랫폼은 기업의 책임이 수반되는 계약을 회피하면서 필요한 노동자를 그때그때 뽑아 쓰는 거대한 인력의 저수지이자 고용회피처로 활용되고 있다. 밥벌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이들을 플랫폼에 가득 모아놓고는 저수지에 먹이를 뿌리듯 하찮은 푼돈의 ‘과업’을 던져주고 건당 백 원짜리 일에 서로 달려들어 경쟁하게 하는 것이 ‘클라우드 소싱’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혁신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런 혁신의 설계자들은 누구인가. 하이에크,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들과 그의 사도들이며, 매년 다보스에 모여 세상은 금융이 창조하고 기술과 기계가 건설하는 것이라고 ‘합의’하는 자본가 지배 동맹이다. 올림포스에 모인 신들이 인간들의 세계를 내려다보며 장난치는 것처럼 다보스 산에 모인 자본가와 투자자들은 매년 샴페인을 마시며 노동자의 머리 위로 자신들이 고안한 ‘4차 산업혁명’ 같은 폭탄을 떨어뜨린다.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마비되고, 미래는 사라지며, 공포와 불안 속에 혼비백산해 얼이 빠진다. 사람들이 쇼크에 빠져있는 동안 다보스의 신들은 준비해둔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실행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본에 무한한 자유를 주고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정책과 제도가 어느새 착착 도입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 독트린’이란 이름으로 생생하게 고발했던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집어삼키는 전략, 사회를 쇼크에 빠트려놓고 맘껏 약탈하는 범죄와 결합한 자본주의의 모습 그대로다.

와해된 노동자 계급

이러한 약탈적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중심에 금융자본이 있다. 생산과 판매를 통한 수익보다 금융 투자 수익이 이윤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되면 기업 경영 목표에서 투자자 이해관계가 최우선 기준이 된다. 고용과 임금 인상으로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력을 늘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이 사게 하면 시장을 확대하고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자본가들을 설득했던 케인즈식 설득논리는 금융이 주도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금융자본주의는 기업이 임금과 일자리를 삭감하고도 구매력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발명했다. 바로 ‘빚’이다. 대출은 임금을 삭감하면서도 물건도 팔고, 부채를 통해 이자도 벌고, 채무에 종속시켜 저항도 봉쇄하는 자본의 혁신 기술이다. 사회안전망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기댈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기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부채 산업과 여기서 빨아들이는 이자는 빈자의 노동을 공짜로 약탈해간다. 오늘날 소액금융(micro financing)과 미세노동(micro work)은 부채 경제의 정교한 수탈 체계 속에 연결돼 있다.

세계화와 금융화 이후, 노동자들은 자본-노동 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들을 계속 빼앗겼다. 과거 노동자는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이중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착취의 대상이자 판매의 대상인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생산과 소비 확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지위를 역으로 이용해 자본에 대한 협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런 협상력을 토대로 전후 30년간 서구 사회에서 ‘성장을 통한 분배’라는 합의 위에서 작동했던 노사합의 정치는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한 순간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받으면서 와해됐다. 이후에 전개된 신자유주의 노동체제는 내부적으로는 ‘쉬운 해고’를 통해, 외부적으로는 합법화된 ‘노동자 수입’과 역외 투자 및 생산지 다변화로 손쉬운 ‘국외 고용’을 통해, 노동자를 훨씬 수월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했다. 이와 같이 변화된 조건들은 자본엔 날개를 달아줬지만 노동자들의 손발은 잘라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어떤 정치세력도 노동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트럼프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은 노동자를 치켜세우며 하층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노동자란 ‘미국의 백인 남성 노동자’이며, 성차별과 인종주의, 애국주의, 배외주의 선동에 기대고 있다. 리버럴 정치 세력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록 노골적인 적대나 혐오의 시선은 아니라 해도, 선량한 사람들이 노동자를 희생자, 피해자로 바라보며 동정하는 시선은 노동자를 쉽게 타자화, 대상화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며 은밀하게 패배시킨다. ‘노동 존중’이란 말이 바로 그런 시선을 담은 말이다. 그것은 노동자를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존중해줄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인정이 아니라 배려를 요청하며, 해방자가 아니라 취약자로 취급한다. 정치에서 노동자 문제는 빈민 문제처럼 구제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해결 불가능한 골치 아픈 사회적 문제로 취급된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끝낼 역사의 주체라고 말하기는 점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노동자 계급’의 형상을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대공장 임노동자에서만 찾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분해되고 분절돼 사라지는 노동자들만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감춰진 노동의 장소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들과 저항 주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춰진 노동자들

임노동자로 협소하게 좁혀 사용하는 노동자 개념은 임노동 체계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 노동자와, 돌봄 노동이나 분해 노동처럼 오래전부터 생산체제 밖에서 임금 없는 노동을 수행해온 수많은 비공식 노동자로부터 노동자란 이름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임이 부정된 많은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싸운다.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어떤 이들은 ‘착취당할 법적 지위’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우버 노동자나 화물 노동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지난 세기 노동운동이 만들어낸 노동자 권리를 되찾고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권리 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나아가 이것은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싸움이자 계급의 와해와 소멸에 대항하고 노동자 계급을 재구성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이름을 다시 붙이는 작업은 그런 점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시작점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2)에서 착취와 수탈의 개념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자본의 축적에서 수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논의를 확장해보면, 그동안 숨겨졌거나 배제됐던 노동자, 즉 여성, 농민, 원주민, 그 외 비공식 노동자들과 권리 없는 노동자들을 ‘수탈당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 임금으로 노동의 몫을 가로채는 것이 ‘착취’라면, 대가라는 형식도 없이 무상으로 전유하는 것이 ‘수탈’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면, 집안의 노동자와 자연의 노동자는 수탈당한다. 자본은 전자의 노동에 대해서는 임노동 관계로 흡수해 관리·통제하지만, 후자의 노동은 임노동 체제 외부로 밀어내고 방치하며 비가시화한다. 착취 체제는 수탈 체제 없이 지탱될 수 없다. 남성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여성과 자연의 무상노동 위에서 성립한다. 여성과 자연, 식민지에 대한 수탈로 나타났던 초기의 수탈 양식은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도 아니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더 크게 수탈에 의존한다. ‘고용 없는 성장’을 대표하는 금융과 IT산업이 부채와 비공식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후기 자본주의로 갈수록 수탈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 ‘감춰진 장소’의 노동자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단결할 수 있고 어떻게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20세기 서구의 노동운동과 노동 착취에 대한 연구는 주로 임노동 체제 내에서의 착취를 폭로하는데 초점을 두었고, 이는 임금 인상과 노동권 증진, 노동자 복지와 제도적 권리 보장을 이끌어내는 분배 투쟁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림자 노동이나 부불노동으로 불리는 임노동 외부의 노동에 대한 수탈의 양식을 규명하는 데는 미흡했다. 그러나 지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봉기하는 여성, 농민, 원주민, 실업자, 홈리스, 그리고 시장의 조달 명령에 더 이상 순순히 따르지 않는 자연의 노동자들까지, ‘함께 수탈당하는 노동자로서’ 자본의 파괴적 축적을 거부하고 멈춰 세우며 저항하는 모습은 미래의 노동자 계급이 어디서 태어나는지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계속 자신의 이름을 새로 만들어낼 때마다 우리는 노동자의 이름을 다시 쓰고, 노동자의 얼굴을 다시 그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제는 ‘주체’가 없다 한다. 맞서 싸워야 하는데 운동의 주체, 투쟁의 주체가 없다고 한다. 모두가 노동에 짓눌려 있는데 ‘노동자’는 없다 한다. 노동자 ‘계급’도 없다고 한다.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주체를 어디서 만들어 낼 것인가? 파울로 프레이리는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가 있는 곳이 피억압자를 위한 해방의 교육학이 가야할 곳이라고 말했다.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주체’도 사라지지 않는다. 착취가 있고, 수탈이 있고, 억압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저항 주체가 있다. 그들은 이미 해방의 언어를 만들고 있다. 함께 말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각주>
(1)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노동자 없는 노동-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롤러코스터, 2022. 34-35p.
(2)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2023.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ㅇㅇ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비용(coast)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cost가 아닐까요 ㅠㅠ

  • 워커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온라인 기사는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