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의무고용제도를 자본의 ‘워싱’ 수단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면?

[비문명의 역습] 장애인 노동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

‘장애인 의무고용’을 핵심으로 하는 〈장애인 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고용촉진법〉)이 시행된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럼 그동안 장애인의 노동 조건은 얼마나 개선됐을까? 1980년 “소득이 전혀 없는 장애인이 68%”에 달했고, 1986년 “취업이 가능한 장애인 53만 명 중 45.1%인 23만 5천 명이 실업자”(1)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얼핏 이 법 시행 후 찾아온 변화는 꽤 큰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이 노동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과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장애인 의무고용 적용 사업체(공공 부문 포함)의 장애인 고용률이 3%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계는 90년대만 하더라도 수차례 의무고용제의 무력화를 시도했지만, 지금은 상당수 자본이 명목상으로나마 ‘장애 포용적 경영’을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장애인 노동 지표를 살펴보면 상황은 여전히 처참하다. 장애인의 63%(2020년)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그나마 이 정도 수치가 유지되는 것 역시 실은 특정 유형의 장애인들, 특히 경증 지체장애인의 고용률이 다른 유형 장애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증장애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여전히 20%대 초반에 머물러 있으며, 뇌병변 장애인의 고용률은 10% 전후, 발달장애인의 고용률 역시 20% 초반에 그친다.

대자본들의 의무고용 준수율도 딱히 높지 않다. 국내 100대 기업의 2/3가량이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준수하지 않는다. 〈2022년 장애인 고용의무 불이행 기관・기업 명단공표〉에 따르면,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 중 단 한 명의 장애인도 고용하지 않은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공공 부문에서 특히나 의무고용률을 준수하지 않는 대표기관은 교육청인데, 교육청이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준수하지 않아 납부해야 하는 장애인 고용부담금은 995억 원에 이른다. 이외에도 공공기관 142곳이 지난 5년간 장애인을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 전 공개되기도 했다.

장애인 고용률을 준수하는 자본들 역시 모두가 장애인을 ‘직접고용’해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 건 아니다. ‘자회사형 표준사업장’, 즉 자회사를 설립해 장애인을 고용하면 모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나, ‘연계고용’, 즉 장애인작업장에 도급을 주어 생산품을 납품받으면, 이 작업장의 노동자를 장애인 의무고용 사업주가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등을 활용해 의무고용률을 채우는 자본들도 꽤 많다. 물론 이 방안들이 없었다면 일자리를 가지는 것 자체가 힘든 장애인도 상당수 있기에, 최근에는 이 제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들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근 몇 년 사이에 불어닥친 ESG 열풍 속에서 이 제도들은 자본들의 ‘지속가능한 성장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보증하는 전략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애초에 자본의 부담을 경감해 주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직접고용 일자리에서 보다 훨씬 노동 조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담론들에서 좀처럼 상기되지 않는다. 이미 숱하게 지적된 ESG의 ‘그린워싱’ 같은 기만성이 혹시 장애인 고용 영역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장애인 삶의 실질적인 개선에는 정작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 정권이 지난 2월 19일, “대통령실은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초과해 장애인을 고용했다”라고 선전한 것은 꽤 징후적이다. 실질적으로는 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개선에 큰 힘을 쏟지 않는 상당수 자본도 의무고용률 준수를 자신들의 정체를 ‘워싱’하는 데 이와 동일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의무고용률을 준수하지 않는 자본들 역시 향후 ESG 때문이건, 기업 이미지 때문이건 결국 의무고용률을 준수하게 되더라도, 장애인 고용을 딱히 이 이상의 수단으로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장애인 고용부담금’과 ‘의무고용률 미준수 사업장 명단 공표’가 갖는 한계

그래도 이 ‘워싱’하는 자본들이 그나마 괜찮아 보일 수 있는 건 그만큼 장애인 고용 자체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사업체가 워낙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장애인 의무고용의 강제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따르면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은 3.6%,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민간기업은 3.1%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그리고 의무고용률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는 고용부담금을 납부하게 돼 있다(단, 고용부담금은 상시근로자 100인 이상 기업에만 부과한다). 문제는 현재 장애인 의무고용률 준수를 위한 거의 유일한 강제수단인 이 고용부담금이 언제나 자본에 최대한 부담주지 않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장애인 고용부담금은 ‘사업주가 의무고용률에 따라 고용해야 할 장애인 총수-매월 상시 고용하고 있는 장애인 수×고용노동부가 고시한 부담기초액’의 연간 합계액이라는 꽤 복잡한 산식에 의해 책정되고 있다. 한편 의무고용해야 하는 장애인 수 대비 해당 사업체가 고용한 장애인 노동자가 3/4 이상일 때는 고용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으며, 3/4 미만일 경우에는 그 정도에 따라 고용부담금을 가산해 책정한다. 장애인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은 경우에는 ‘해당 연도 최저임금 합계액’에 ‘해당 사업체가 고용해야 했으나 하지 않은 장애인 수’를 곱한 금액을 고용부담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결국 이 기준에 따르면 장애인 고용부담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건 해당 연도 ‘최저임금’과 고용노동부가 고시하는 ‘부담기초액’의 액수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이 부담기초액이 언제나 그것이 법률상 정해질 수 있는 최저선에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에는 부담기초액이 “1. 장애인을 고용하는 경우 필요한 시설·장비의 설치, 수리에 드는 비용 2. 장애인의 적정한 고용관리를 위한 조치에 필요한 비용 3. 그 밖에 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하여 특별히 드는 비용 등”에 따라 ‘고용정책 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다고 명시돼 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라붙는데, 그것은 바로 “부담기초액은 최저임금액의 100분의 60이상의 범위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정책심의회의는 위에 명시한 다른 요소들을 배제한 채 언제나 부담기초액을 ‘최저임금액의 60%’로만 결정한다. 쉽게 말해 고용부담금은 매년 그것이 정해질 수 있는 가장 싼 값으로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어떤 장애인 의무고용 대상 사업체가 만약 장애인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더라도, 그 사업체는 한국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 320만 원(2021년)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금액인 최저임금분만을 부담금으로 지출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업체 입장에서는 해당 사업체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이 높을수록 장애인 의무고용을 준수하지 않는 게 더욱 이득이다. 예컨대 지난 수년 간 장애인고용부담금을 가장 많이 납부한 삼성전자 같은 경우,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1억 4천만 원이지만, 그들이 낸 고용부담금 역시 아무리 많아봐야 최저임금을 넘지 않았다. 이 수준은 부담기초액을 토대로 의무고용률 준수 정도에 따라 나온 값이다.

장애인 고용의무 불이행 명단공표제도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매년 의무고용 미준수 기업 명단을 공개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사실상 큰 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 명단공표는 장애인 의무고용률의 1/2에 못 미치는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대기업들 상당수는 명단공표 기준을 딱 초과하는 정도로만 장애인을 고용해 명단공표를 쉽게 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애인 의무고용률의 실질화를 위해서는 고용부담금의 액수를 실제로 사용자가 부담을 가질 만한 정도로 인상해야 한다. 명단공표의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도 우선적 과제라 할 수 있다. 특히 각 사업체의 평균 임금 수준으로 고용부담금을 인상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고용부담금은 계속해서 강제성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용노동부나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이 향후 의무고용률을 더 인상할 것이라 발표했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장애인 의무고용이 계속해서 제대로 기능하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무고용 문제는 단순히 의무고용률 ‘%’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용부담금의 액수를 둘러싼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업재활 이념’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

한편, 고용부담금 인상은 장애인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전제일 뿐이다. 장애인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장애인 노동 정책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사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1980년대부터 국제적인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장애인 정책의 주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직업재활 이념을 법제화한 것이다. 이 법이 훗날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등에 관한 법률〉로 명칭이 바뀐 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 역시 이 기조를 정확히 반영한다. 직업재활은 “장애인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지원”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체계 내에서 ‘임금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을 분류·훈련해 ‘임금노동에 적합한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비정상 상태의 몸’을 ‘정상적 노동력’으로 훈련시켜 자본에 공급한다는 원칙이 이 기조에서는 전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존재 조건상, 그 어떤 훈련을 거쳐도 도무지 자본이 원하는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자본들은 직업재활 정책이 시행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장애인 의무고용을 준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직무가 없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물론 이 말은 다분히 핑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현재 실업 상태에 있는 장애인 상당수가 지금 당장도 다양한 직무에서 임금노동을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으며, 장애인들 각자의 유형과 장애 정도 역시 상이하기 때문에, ‘장애인’을 하나로 묶어 이들 전체에게 적합한 일이 없다는 주장은 딱히 정당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사업체의 노동 환경을 장애인 접근성이 용이한 방식으로 변화시킨다면,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더 많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장애인 일반이 겪고 있는 열악한 교육, 문화, 접근 환경 탓에, 확실히 비장애인 일반보다 노동력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장애인 관련 전 부문의 변화가 단숨에 도래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자본의 변명은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정당성을 갖게 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떻게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켜도, 신체적 조건상 여전히 임금노동에 적합한 몸으로 거듭날 수 없는 중증장애인들의 수도 상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무고용제를 앞으로도 계속 직업재활 이념에 맞춰서만 운용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본의 ‘사회적 책임’을 증명하는, 즉 ‘워싱’의 도구 이상으로 기능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의무고용제는 지금껏 그래왔듯, ‘기업 이미지를 위한 마지못한 장애인 고용’ 이상으로 기능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장애인 노동권 향상을 위한 최우선 과제는 ‘장애인의 몸을 임금노동에 적합한 노동력으로 거듭나게 하는’ 직업재활 이념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기존 임금노동이 요구해온 생산성 기준이나 규율이 적용되지 않는 일자리에 대한 상상을 실험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계가 직접 고안했고, 각 지자체를 상대로 투쟁을 통해 쟁취해 낸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근 몇 년 사이 장애인 노동 정책의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이 가장 낮다고 여겨지는 중증장애인을 최우선으로 고용해, 장애인 권리 향상을 위한 노동, 즉 〈UN장애인권리협약〉을 대중들에게 홍보하고 이 사회에 실질화하는 노동을 수행한다.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차별은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의 경험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결코 제대로 시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의 노동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 이 노동자들은 이 시정의 요구를 문화예술 활동, 지역사회의 장애인 접근권 모니터링, 장애인식 개선 강의 등을 통해 수행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이 과정에서는 장애 전문가들의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을 훈련하지 않는다. 즉,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난 직업재활의 과정 없이 이 노동을 수행하며, 이로써 자신의 존재를 현 상태 그대로 ‘노동의 주체’로 인정받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들을 스스로 생산하고 있다. 혹시 ‘장애인에게 적합한 직무가 없다’는 핑계는 이러한 노동 패러다임의 전면적 전환 속에서만이 무력화될 수 있진 않을까?

의무고용제는 80년대 1세대 장애인 운동가들이 장애인 생존권 보장이라는 절실한 요구와 함께,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 속에서 쟁취해 낸 최대 성과 중 하나다. 그러나 당시 이 운동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사실 임금노동에 편입이 가능할 것이라 가정된 경증장애인일 뿐 이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장애인 노동에 대한 상상을 확장하기 힘들기도 했다. 장애인운동이 쟁취한 이 성과가 단순히 자본들의 ‘워싱’ 도구로 전락해 버렸고, 나아가 장애인 의무고용제의 기반에 깔린 직업재활 이념이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이 시점에, 이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자본으로부터 ‘노동-불가능하다’고, 즉 ‘Dis-able’하다고 거부당한 몸들이 억지로 장애를 극복해 기존 노동 세계에 편입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다양한 몸들에게 적합한 노동 세계를 ‘우리’가 직접 창조해 가면서 말이다.

<각주>
(1) 김도현, 『차별에 저항하라』, 박종철출판사, 2007, 1980년 한국보건개발연구원(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신체장애자 실태 조사 보고서』, 4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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