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케테 콜비츠: 독일 여류화가(1867-1945년)

*<봉기/동판/1899>

지난 글에서는 예술이 노동의 산물임과 함께 예술의 계급성을 다루면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노동자계급의식과 노동자계급예술이 최초로 발생한 독일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계급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작가의 사상은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는지, 시대와 정치적 상황들이 어떻게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케테 콜비츠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사상,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의 공헌과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노동자문화운동에 큰 자산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왼쪽. <1930년대 초의 케테 콜비츠> / *오른쪽. <팔을 고인 자화상/1920>

이 글이 그것을 위한 단초라도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내용과 형식 두 측면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완벽하게 현실화한 케테 콜비츠의 위대한 예술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에게 글을 짧고 쉽게 쓰라고 권유받았다. 그러나, 워낙 위대한 예술가를 알려내는 작업이기에 단지 개인의 소감을 간단히 밝히고 말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케테 콜비츠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들을 알릴 필요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다. 글이 조금 길더라도 이해를 바라며, 진지한 검토를 부탁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서문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미술사적 배경을 다루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사회주의자 케테 콜비츠>, 콜비츠의 청년시절에서 노년 시절에 이르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피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해설을 시작하여 판화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조가작품,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1 <궁핍/석판/1897>

케테 콜비츠란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히 진보적인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예술가다. 자본가계급에게는 해로운 사람으로 당연히 제도 교육에서는,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그만큼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되면 그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계급의식을 일깨워주고 예술적 체험을 주는 감동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그를 만났다. 과거 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미술운동도 역시 민중운동의 한 세력으로 명실공히 자리하고 있었다. 민예총(민족민주예술인총연합), 민미협(미술), 민음협(음악) 등등 문화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벽화, 걸개, 판화 등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온 거리와 학교, 공장, 농촌에 그려지고 집회의 필수품이었던 때였다. 지금은 무용담이 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지금의 문화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때를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문화운동이라고는 노래와 비디오 운동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때, 케테콜비츠를 대하는 나는 상당히 진지하였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격동하는 시대에 진지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나를 너무 부끄럽게도 했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10여년 전의 그에 대한 미천한 이해를 조금은 더 깊이 있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다 올곧게, 보다 충분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2 <죽음/석판/1897>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을 접하면서 역시 예술은 계급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삶과 사상을 표현하며,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를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예술이란 인간 개인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의식을 발전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산고의 작업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겸허하고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케테 콜비츠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케테 콜비츠는 젊은시절과 중년까지 사회주의자로 <게르미날>(1893), <직조공들의 봉기>(1893-1898) 연작, <농민전쟁>(1903-1908) 연작,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1907-1909)에 사회비판적인 판화를 기고 하는 등의 왕성한 판화작품 활동을 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자신의 나약한 사상적 한계에 고뇌하며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주의자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50대, 60대이던 1920, 30년대에도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 <러시아를 도우라!>(1921), <선동가>(1926), <프롤레타리아> 연작(1925)처럼 간단히 평화주의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귀중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케테 콜비츠는 그림으로써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설사 케테 콜비츠 자신이 사상적 동요를 부끄러워하며 노동자계급 예술가라는 영예를 거부한다 해도 역사는 기꺼이 그에게 그런 영예를 부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3 <음모/석판/1898>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독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운동이 비스마르크와 어린 황제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고 있던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는 복음주의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를 강조하는 자유 신앙운동을 하였고, 아버지 칼 슈미트 또한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생활을 그만두고 미장이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는 예술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콜비츠는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스주의자인 오빠 콘라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영향을 받는다.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는 정치,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1923년의 독일혁명, 1933년의 히틀러 집권과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과 세계에서 중요한 나라였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집권하여 야만으로 가느냐 변혁으로 가느냐는 그 시대의 관건이었다.

미술사조에서는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에 이어 혁명과정에서 생겨난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이 등장하였고, 세잔느를 이어 브라크와 피카소가 큐비즘을 구축하였다. 또한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 20세기 전반기에 다양한 미술사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당시 고흐, 고갱, 뭉크, 클레, 마네, 모네, 샤갈, 꾸르베, 마티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에 영향받은 유럽과 세계 노동자투쟁의 분출은 미술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요구했고,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런 속에서 케테 콜비츠는 1885-86년에 베를린의 여자예술학교에서 슈타우퍼 베른의 가르침을 받고, 맑스 클링거의 판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받는다. 1888-89년에는 뮌헨의 여자 예술학교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에게 회화를 배우게 된다.

1891년에는 칼 콜비츠와 결혼한 다음 북부 베를린으로 옮겨와서 의사인 칼 콜비츠가 일하는 의료보험조합의 무료진료소에서 하층민의 고통과 불행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던 낭만적이고 연민에 어린 시선에서 "노동자들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할 때라야 유지될 수 있다.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척도가 지배한다"고 여기게 된다.
남편 칼은 케테 콜비츠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과 케테는 사상과 현실의 동반자로서 서로간에 사랑과 존경, 신뢰로 살아간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4 <직조공들의 행진/ 동판/1897>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콜비츠는 당파를 취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한때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드를 꿈꾸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는 원하지만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1920년 10월의 일기에서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예술가로 간주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페테르스부르크 거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서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가 확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진지하였으며, 당당하였다.

케테 콜비츠의 사상적 흐름을 변증법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항상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며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편하게 살기를 갈구하였지만 현실의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감당하기 힘든 현실들이 케테 콜비츠를 체념하게 했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쳤다. 콜비츠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조건과 인생역경 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혁명 예술가로 굳세게 진군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적인 이론을 체득하여 노동자계급의 힘과 노동해방을 이해하지 못한 케테 콜비츠의 한계라고 본다. 투쟁을 하면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은 인간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에 따른 고통을 이겨내고 계속 투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투쟁을 해도 패배만 하고 승리가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에도 과학적인 이론으로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고 노동해방을 추구하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케테 콜비츠에겐 희생과 패배에 따른 고통을 능히 이겨낼 만한 이론과 전망, 당파가 없었다. 또한 당시 케테 콜비츠의 한계는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번번이 패배했던 독일 노동계급 운동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주는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시대는 달라도 여전히 케테콜비츠의 고뇌를 함께하는 노동자, 예술가들이 많이 있음을 전하면서 위로를 대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5 <폭동/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

케테 콜비츠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독일 실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의 봉기다. 1840년대에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직조 기계들은 집에서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생활조건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직조 기계는 손으로 작업하던 직조공들보다 훨씬 싼 값에 제품을 내놓았고, 이윤을 많이 챙기려던 중개인들은 손으로 만든 제품을 보다 싼 값에 사들여 직조공들의 수입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1844년에 최초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였다. 이 내용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희곡으로 만들었다. 1893년 2월 28일 이 [직조공들]이라는 희곡을 보고 난 후 그 감동으로 제작한 것이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이다. 그리고 이 봉기를 다룬 노래로 '실레지엔의 직조공'이 있으며, 이 노래는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예술'이란 평가도 받는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이하 생략)


1844년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은 단지 무대 위의 희극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혁명적 투쟁을 예고하는 살아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져 황제 빌헬름 2세는 극장의 궁정특별석을 해약하고, 드디어는 1890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란 하나같이 제국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인사들이다"고 담화문까지 내렸다. 케테 콜비츠가 [직조공 봉기] 연작을 끝낼 무렵인 1897년에는 파업주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896년 하우프트만에게 쉴러상이 추천되었을 때 빌헬름 2세는 승인도 거부하였다.

콜비츠의 이 판화가 1898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심사위원회는 콜비츠에게 금상을 추천했으나 빌헬름 2세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 때 빌헬름 2세는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을 모두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콜비츠의 판화는 1899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되었을 때 금상을 수상했으며, 1900년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이 [직조공들의 봉기]로 케테 콜비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6 <결말/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는 <궁핍>, <죽음>, <음모>,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의 6부작으로 석판과 동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먼저 시작한 [게르미날] 연작을 버려두고 [직조공들의 봉기]에 몰두했다.

이 연작은 1893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성됐다. 하우프트만의 희곡과 달리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에서는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실존과 삶, 투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고, 당시의 자본가의 악랄함과 직조공들의 분노를 처절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당시의 저급한 봉건적 사고와 편견에 맞서 여성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다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콜비츠의 사회주의적 여성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케테 콜비츠가 상당히 아끼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21년의 한 일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나의 [직조공들]"이란 표현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가장 민중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게르미날>의 한 장면/동판/1893>

다음은 이 글을 이어 케테콜비츠의 작품해설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의 그림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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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간담회 : 2006년 5월 10일 오전 10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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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 통 편 : 지하철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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