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민중재판 릴레이 인터뷰 4] 정태춘 반자본 문예활동가

평택은 제국주의 군사전략과 제3세계의 민중의 첨예한 싸움터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자본 침략의 대리인으로 기소한다!

어머니, / 저는 / 어느 잔잔한 물가 / 야트막한 언덕 위에 / 조그만 집을 짓고 / 선량한 이웃들과 아주 순진하게 살고 싶은데요 - 자작시 <어머니> 가운데에서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읍 대책위원회 고문 정태춘

정태춘 선생을 만났다. 요사이 전범민중재판 기소장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을 하면서 어느 만남 하나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정태춘 선생을 만나는 날 또한 그랬다. 물론 나는 싸움터의 가수, 민중 가수로서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번에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노래꾼으로서가 아니라 싸움꾼, 평택 지킴이,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읍 대책위원회 고문인 정태춘을 만나려는 거였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딱지도 다 떼고 한국 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아온 한 윗세대의 선배를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선생을 만나러 가기 전 일단 내가 찾을 수 있는 선생 관련 인터넷 웹문서는 다 뒤졌다. 검색어에 ‘정태춘’을 넣어 보았고, 또 그 자리에 ‘평택’을 넣었고, ‘팽성읍’을, ‘노독일처’를, ‘공륜심의철폐’를 넣어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적지 않은 양의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적어도 내가 선생을 만났을 때 영 아무 것도 몰라 아주 기초가 되는 정보에 대해서조차 알아듣지 못해서 억지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우선 내가 웹을 뒤져 공부한 것은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모두 이전한다는 계획,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는 부분에 대한 거였다. 물론 이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겨울부터는 둘레에 있는 평화 활동가들이 애쓴 올 5월 29일 평택평화축제의 준비 과정을 조금이나마 지켜보면서 평택미군기지 문제에 대해 듣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내게는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평택이라는 (가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경기 남부의 어느 지역에, 어마어마한 미군 기지가 생긴다더라.’ 하는 정도의 인식.

찾아본 자료에는 참 많은 지명 이름이 나왔다. 평택시, 팽성면, 대추리, 원정리, 본정리, 두정리, 도두리, 함정리, 홍학사, 황새울, 서쪽 신흥 뒷동네, 송탄면, 서탄 기지……. 그런데 내게는 거의 모두 처음 듣는 이름들이니 오히려 이런 지명들이 나올수록 이해가 더 어렵기만 했다. 게다가 1차 수용 24만 평에, 160만 평, 76만 평, 대체부지 300만 평, 서탄면이 있는 290만 평, 1차 2차 수용 뒤로 350만 평 하는 수치들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워낙 숫자 개념에 약한 까닭까지 보태져서 무슨 소리들인지 컴컴하기만 했다. 그냥 뭔가 엄청난 땅을 빼앗는다는 거구나, 이 나쁜 놈들이… 하는 식의 막연한 비분강개 내지는 미리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채 체념부터 하곤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평택의, 그 가운데에서도 팽성읍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빼앗는 자들과 지키는 이들의 싸움에 대해 그나마 정황을 이해하게 된 것은 무슨 신문 기사를 보아서도 아니요, 논평이나 사설을 보아서도 아니요, 정태춘 선생의 시집 <<노독일처>>에 실린 시 <지 고향이 원래>를 보고 나서였다. 모두 15연 291행으로 된 긴 시. 선생은 이 시에서 충청도 사투리와 닮은 평택 사투리의 독백으로 이제 곧 미군에게 먹히게 될 위기에 있는 고향 마을의 모습을 노래한다.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않은 이들이지만 읽고 있다 보면 마치 내가 그곳의 주민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고, 또는 황새울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 시절의 정태춘을 멀리 내다 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저항에는 아랑곳 않고 그네들이 가진 계획대로 착착 진행을 하면서 결국은 다 집어삼키고야 말 것 같은 그네들의 계획, 그네들은 심지어 여유마저 있어 보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찾아본 평택 미군기지 총집결에 대한 자료들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주민들은 모든 걸 다 내걸며 싸우고 있고, 정태춘 선생 또한 그 싸움의 가운데에 함께 있었다.

시집 <<노독일처>>에서 느껴지던 긴장, 그 긴장의 실체

선생님은 올 봄에 시집을 냈다. 시집을 내지 않았어도 이미 시인이었던 선생님이 이번에는 따로 가락을 입히지 않은 노래를 날 것 그대로 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심상치 않음. 나는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꼭 두 번을 읽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두 번이 뭔가, 자꾸자꾸 아무 때나 들춰 보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이를 테면 <양양 장 무쇠 낫>, <비닐하우스>, <노독일처>, <지 고향이 원래>, <외로운 전사 소일 풍경>, <어머니>들이 그렇다.) 불안하다고 말해도 좋을까? 어떤 긴장이 느껴졌다. 그 긴장이 무언지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이번 인터뷰의 관건 또한 그것일 거라 직감했다. 그 불안함의 정체를 푸는 과정이 있어야만 선생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싸움에 대해서나 전범 민중재판과 관련해서도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머니,
저는
어느 잔잔한 물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선량한 이웃들과 아주 순진하게 살고 싶은데요
작은,
아주 작은 사회에서
아주 낮은 생산성으로
겨우 연명할 만큼만 농사를 지으며
게으르게 낚시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데요
이건 위험한 사상이 아니에요
어머니,
위험한 건 저들이에요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어머니,
저 야만의 행렬은 해산돼야 해요
일사분란한 명령 체계와 조직도 해산되고
모두 개인으로 돌아가야 해요
가족으로,
최소한의 자급 공동체 마을로 돌아가야 해요

- 정태춘 선생의 시 <어머니> 가운데에서



2004년 10월 22일, 오후 3시. 올림픽 공원 들머리에 있는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으로는 밥집이었고, 바깥에는 상을 내놓고 술을 마시거나 차도 마실 수 있게 되어 있는 너른 가게였다. 선생이 보였다. 이 인터뷰 약속이 있기 전에도 앞선 약속이 있었는지 다른 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긴장이 되었다. 왜 이렇게 자꾸만 긴장이 되는지,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되어야 그만큼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몇 번 인터뷰를 다니면서 어렴풋 알게 된 거다. 긴장하지 말아야지.

- 좀 전에 만난 분들은 어떤 일로 만나신 거예요?

“민가협, 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 팀.”

- 아, 해마다. 올해는 며칠로 공연 날짜를 잡았어요?

“12월 4일로….”

- 12월 4일이요?

“한양대체육관에서 하는 것으로… 기획단계에서부터 같이 하자고.”

8월 28일 주민 총궐기 대회에 대추리 주민들이 상모를 쓰고 나왔다. 이 날은 5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200명 넘는 주민이 날마다 50일째

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밥집에 찻집이기도 하지만 생맥주도 파는 집이어서 맥주를 한 잔씩 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먼저 고백을 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잘 좀 봐달라는 얘기부터 시작하는 거니 어떻게 보면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다. 그게 치사한 거든, 솔직한 거든 어쨌든 나는 선생 앞에서 편안한 후배가 된 마음이었으면 했다.

- 근데 사실 제가 먼저 고백을 드리면요, 선생님 제가 전문 인터뷰어가 아니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거 질문지를 준비하는데 꼬박 일주일 넘게 걸렸고요…

“에이, 그럴 필요 없는데.”

- …전문 인터뷰어가 못되다보니까, 딱 꼬집는 질문을 잘 짚어 내어야 하는데 제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자꾸만 질문만 장황하게 드리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질문지를 봤는데 너무 거기에 또, 매달리지 않고 얘기 나누다보면 뭐 좀 길게 이야기하는 데가 있을 거고, 짧게 이야기하는 데가 있으니까 쉽게 생각하고 하지요.”

- 예, 그러니까요, 선생님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가감 없이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글로 옮길 때는 편집을 한다거나 선생님 하신 말씀을 자르거나 요약하고 그런 건 안 할 거거든요. 자칫 글로 옮겨 담는 이가 중요한 부분만 추린다고 추려 놓았는데 막상 말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정말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잘라 놓는 경우도 많고… 또 다른 이유들을 생각해도 저는 최대한 말씀하신 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털어 놓고 하는 인터뷰에서는 실리기 전에 혹시 내 말이 정확히 전달되고 있는지, 내가 오버하는 게 없는지 (웃음)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원고가 된 뒤에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내 말만 내가 볼 때니까, 내가 한 말만 내 검열을 한번 거칠 테니까.”

몇 마디 주고받는 얘기로 나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설픈 인터뷰어라는 고백은 말하자면 일종의 무장해제인 셈인데 먼저 그렇게 하고 나니 선생 또한 좀 더 헐렁해지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대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평화 군축이라는 것도 이와 같거늘 상대에게 총을 내리고 하고 싶다면 먼저 총을 버리고 팔을 벌려야 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나에게는 정태춘 선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기도 하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만 두고서 신문 배달을 하며 지낼 때였는데, 그 때 나는 공책에 습작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종로에서 선생을 만났고,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어버버하면서 인사를 드리다가 책가방을 열고 당시에 쓰고 있던 습작 노트 복사한 것을 꺼내어 선생에게 주었다. 컴퓨터 타자도 되지 않은 손으로 삐뚤빼뚤 쓴 그대로인 것을 작품이라고 건네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간 그러고 헤어진 뒤 두 달이 채 못 되어 나는 그 때 건넨 그 작품들로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 혹시 기억하세요? 그 때 그 신문 배달한다던 청년이요, 말도 잘 못하고…… 그러다가 가방에서 제가 쓴 동화라면서 볼펜으로 써서 복사한 걸 그대로 드리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만 마치고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갔다.

- 선생님 뵈면서 그러니까는 뭐랄까 노래꾼 정태춘 선생님을 뵙는 거기도 하지만은 팽성읍 대책위 고문으로 선생님께 듣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저는 잘 몰라요 지금도요, 자료를 찾아본다고 했지만, 그런 어떤… 기록된 것, 요 정도로만. 수치개념도 너무 낮아서 뭐 몇 만평, 몇 만평 그렇게 나오면 감도 없고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먼저 지금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 그리고 앞으로 더 이전하겠다고 하는 계획의 내용이 어떤지 그런 얘기부터 먼저 들었으면 하거든요.

“평택 이야기부터 시작을 한다면 평택에는 미군기지가 두 개가 있고요. 케이 오십오라고 하는 흔히 오산 베이스라고 하는 부대가 평택시 서탄 면에 소재해 있고 그거를 이제 ‘오산 비행장’, ‘오산 비행장’ 이러는데, 오산에도 마치 비행장이 있는 것처럼, 응… 뭐, 오산에는 미군 기지란 전혀 없습니다. 오산 구역 관할 내에는, 유사 이래로. 그리고 케이 오십오, 송탄에 정문을 두고 있는, 케이 오십오와 케이 육(케이 식스) 험프리 캠프가 있지요. 그거는 이제 횡성읍 안에 있는 비행장인데, 그런데 지금 케이 오십오 지역의 일부와 케이 육 비행장 인근의 일부가 현재 수용이 진행되고 있어요.”

- 수용이라는 말은 어떤 걸 뜻하는 거예요?

“수용이라면 이제 미군기지로서 수용을 하는 그런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요. 그거는 이미 한미간 협정에 의해서 그리고 국회 비준이 난 것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거기가 지금 이제 팽성읍으로 얘기한다면 대추리 앞에, 대추리 마을 앞에 황새울이라고 하는 논지역이지요. 거기가 지금 20여만 평이 1차로, 국회 비준이 난 것 중에 1차로 수용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주민들한테 통보가 나갔고, 배상을 제시를 하고 있고, 그래서 협상을 하자 하고 국방부에서 주민들에게 지금 요구를 하고 있고, 주민들은 반대투쟁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고. 작년부터 그 작업이 진행되면서, 그 싸움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구요.”

이쯤에서 내 녹음기가 꺼져 있었다. 한 십오 분 가까이. 평택 미국기지 집결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대목이었는데, 선생이 잠깐 전화를 받을 일이 있어서 멈춤을 눌렀다가 다시 이야기가 시작할 때 녹음 단추를 누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나도 나이지만 선생에게 더 미안했다. 그렇다고 정말 녹음기처럼 했던 얘기를 그대로 다시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뒤이은 질문을 드리면서 미처 녹음하지 못한 그 이야기들도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게끔 했다. 인터뷰 정리 글에서는 이 부분에서 잠깐 흐름이 끊기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내용을 놓치는 건 없다.)

- 팽성에는 얼마나 자주 가세요?

“아주 자주는 못다니고요, 지금 촛불집회가 시작된지 오십 일 됐는데 내가 두 번 내려갔죠. 그렇거나 그거하기 전에 회의하러 더러 한 달에 한 번이나 이런 정도 내려갔었구요.”

- 주민들 분위기는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것 같아요? 아주 자발적으로 이는 건가요?

“지금 촛불 집회로 이야기한다면 자발적으로 나와서 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 전체 수에, 인근 지역 전체 수에 비한다면 많이 적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백 여명 이상 정도가 매일 버스로 이동을 해 가지고, 시골에서…”

- 하, 굉장한 거다.

“…그 시골 마을에서 하는 것을 보면 잠깐 해보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냐에 따라서 또 좀 이제 변동이 있을 수 있겠죠.”

- 그런데 정말 지역의 싸움이 힘든 게, 지역에서는 그렇게 200명이나 넘는 분들이 50일 넘게 해 오셨고, 또 앞으로도 한참 해 나가실 텐데, 사실 이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을 저 같은 경우에도 잘 몰랐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가야지 팽성에서, 그리고 평택에서 벌이는 이 운동이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힘이 모이게 될 수 있을는지……. 그래서 이 싸움이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이 싸움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도 그렇고, 이 평택의 문제를 지역에 갇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되게끔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의제 자체를 어느 한 지역으로 모이는 미군기지 집결의 문제를 평화군축의 문제로 옮기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 밖에도 국민 누구나가 내 문제로 여겨서 함께 싸울 수 있게끔 하는 전략이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런데 그게 지금 이제… 평택으로 350만평이라고 하는 거대한 농지를, 수용을 해서 미국에 공여를 하고, 거기 주민들을 쫓아내고, 뭐 이렇게 하는 일들이 일반인들 관심을 가지는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요. 일반인들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고, 그 다음에 안보에 관련된 이중적인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우리 시민들이. 어… 그리고 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더라도 안보에 관한, 주한 미군의 역할에 관한, 그리고 한반도의 위협적인 어떤 정도에 관한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더라도 아직 사람들이 제대로 정리를 못하고 있거든요. 거기에다가 이제 중앙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런 것에 대한 입장들, 현재 정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도 굉장히 애매한 측면들이 있거든요.

한편으로 이제 그래도 좀 약간, 얼마간은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부와 국회 이네들이 추진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일, 뭐 이런 식으로 좀 받아들이는 측면들이 있고. 그런데 이제 우리 문화연대나 문예 행동 같은 경우에는 이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바라보고, 이것이 미국의 군사전략, 아주 노골적인,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군사전략과, 제국주의적인 군사전략과 제3세계의 민중의 첨예한 싸움의 현장이라고 바라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측면으로 바라 봤을 때 현재 당대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 제국주의라 하는, 그것이 군사적인 것과 그 다음에 이제 경제적인 부분까지 옮겨야 되겠지만, 그 제국주의적인 본질에 관한 고민이 좀 더, 그런 문제의식이 확산된다면 보다 그렇게 관심이 높아지거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청에서 입수한 k-6 미군기지확장 예정지 도면. 평택 땅의 350만 평을 미군 부대에 공여하려는 계획이 나타나 있다.


평택의 싸움을 우리의 싸움으로

- 실제로 저는 다른 어떤 이야기나 자료를 보는 것에서 보다도 선생님의 그 지 고향… 아, 그 제목이 뭐였더라?

“지 고향이 원래.”

- 네, <지 고향이 원래>. 거기 보면 미군이 점차 평택의 땅을 집어 삼키는 과정이, 어떻게 그네들이 일차 수용 이차 수용 이 과정을 통해서 이 지역을 다 먹을 건가 하는 그 과정들이 눈앞에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 같았거든요.

2차 수용 대상 지역두 대개 확정된 모양인디,
한술 더 떠유
1차 24만 평이다가 대추리 서쪽 신흥 뒷동네 옆이루 해서
거기서 지금 활주로 끝자락이 있넌 대추리를 뺑 둘러싸가지구
평택호꺼정 간단 말유, 고기가 76만 평이지유
그러면 대추리넌 슴이 되는규
내리 쪽이루만 겨우 열린, 그야말루
미군 부대루 둘러싼 슴이 되는규우
고사시키재는 것이지유
이리키 악랄핼 수 있는규?
이건
용산 기지 이전해는 대가루 내놔야 되넌
대체부지 3백 멫만 평해구는 암 상관 웂이
벌써 몇 년 전이 국회 비준 다 통과된 껀이지유
용산 기지 이전이 확정되먼
그 터는 또 별도루 내줘야 해는 규우

- 정태춘 선생의 시 <지 고향이 원래> 가운데에서


일차 수용으로 어느 어느 지역을 먼저 빼앗고, 그 다음에는 이차 수용으로 또 어느 지역을 집어 삼키고 나면, 이렇게 자기네들의 계획으로 차근차근 진행을 하다 보면 나머지 지역은 자연스럽게 고립이 되어 섬처럼 남게 만드는, 이 땅뺏기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졌어요. 그래서 그네들이야 주민들이 반대를 하건 말건 차근차근 걔네들은 걔네 일정대로 제대로 밟아가고 있구나, 그래서 여기에 이 반대투쟁을 하는 싸움이라는 게 제대로 효과가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건가, 이것도 끝내는 항의 정도를 하다가 손들고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정말 지배 계급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치밀하고 촘촘하게, 이렇게 들어오고 있는데, 우리의 저항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 순진하고 단순한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저들의 지배는 엄청나게 대규모적인데다 계획적이고, 동시적인데 우리의 저항이라는 것은 고작 수공업도 못되는 그런 정도의 항의, 그것도 아주 분산된 채로 하는 건 아닌가 싶거든요. 이건 비단 미군기지 전략 뿐 아니라 산업 재편의 전략이라거나 자본의 노동 통제 전략, 문화를 통한 지배 전략… 무엇 하나 아니 할 것 없이 전 분야의 지배 전략이 모두 그렇게 아주 구체성을 띠고 곳곳에서 치밀하게 옭죄어드는 것 같은데요, 이에 견줄 때 우리의 저항 운동은 너무나도 수공업적인데다 분산적이고 수동적인 건 아닌가 싶거든요.

“몇몇 기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질문을 했어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서 나는 그 계획이, 지금 평택으로의 전력 집결, 미군의 집결 이런 것이 난 이런 계획을 절대로 못 가리라 본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해서 일본 같은 경우에도 우리하고 물론 상황이 좀 다르겠지만, 미일 간에 협정됐던 그런 부분적인 제배치나 이런 계획들이 제대로 실현된 것이 없다. 주민들이 저항하고 나설 때에는 제대로 실현된 것이 없고, 지지부진하고 계획도 이행이 안 되고 있다. 그렇듯이 이 계획도 계획대로 진행이 분명히 안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근래의 싸움은 이전까지의 싸움하고는 많이 다르다. 이전은 소규모로 이뤄지던 어떤, 그런 점령과 밀어내기와 이런 것이었다면, 지금은 굉장히 대규모에다가 굉장히 공개적으로, 그리고 그것이 국내 문제로서만이 아니고 전 세계 미군의 전략적인 재배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시민들 의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고 하기 때문이 난 이 계획이 절대로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이 안 될 것이라고 봐요. 이건 그냥 희망사항이 아니고, 내 논리로서는 그래요.”

- 예전보다 더 대중적으로 지금 되고 있는 건가요?

“(단호하게) 예. 예전에는 주한미군의 이동이나 재배치들이 소규모였고, 그리고 그 논의 자체가 국지적이거나 그랬죠. 그러나 이것처럼 공개적이고 모든 시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 정도까지 진행된 것이 그렇게 많이 않았다는 거죠. 용산 기지 반환문제 이런 것들이 거론되고, 이렇게 폭넓게 주한미군의 문제들이 논의, 그런 것들이 올라온 것은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지금은 굉장히 공개적이고 규모도 크고, 저항도 강하고 시민들의 의식도 상당히 많이 변했고. 이런 상황에서는 과거처럼 밀어붙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이 싸움이 지금 현재로서는 굉장히 미약하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나는 만만치 않을 거라고 봐요. 충분히 그걸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봐요. 그 계획을.”

주한 미군이 평택으로 주둔지 재배치를 하겠다는 계획은 이미 1990년부터 나온 거였다. 이것은 그야 말로 미국의 계획인 것으로 지금 한국의 정권과 관련이 없고, 한반도 6자회담하고도 관련이 없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을 빼 내어 이라크로 보냈다고 하는 것하고도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주한 미군의 재배치 계획은 미국의 신군사전략에 따른 계획으로 한반도에만 국한되었던 주한 미군의 역할을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넓혀 동북아시아 지역의 지역 분쟁이나 안보 분쟁에 개입하겠다는 속셈이다. 또한 9.11 이후부터는 군사 전략이라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 대비하는 방어를 기본으로 삼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보기에 위험하다고 보이는 나라에 대해서는 선제공격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그것을 한반도에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을 내용으로 하는 작전 계획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다. 이럴 때 미국은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공군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략을 가지려 하고 있고, 이런 면에서도 휴전선 가까이에 있던 미군 부대를 평택 쪽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은 바로 대북 선제공격을 위한 사전 단계라고 보이는 것이다. 정태춘 선생은 이것을 두고 “평택으로 집결시키는 미군의 본질은 기동타격군을 두겠다는 것이죠.” 라고 한 마디로 말했다. 200명이 넘는 주민들이 50일 넘게 날마다 촛불 시위를 해 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자꾸만 이 문제가 지역의 문제로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다. 지역 주민들이 그 대단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단순히 우리 고장, 내 땅에는 안 된다는 논리를 넘어 평화 군축의 문제로 의제 자체를 넓힌다 하지만 내게는 ‘평택’이 먼만큼이나 ‘평화 군축’ 또한 멀다. 예전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2003년에는 평택에 ‘땅 한 평 사기 시민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미군 부대가 들어가겠다고 하는 지역의 땅을 시민들이 한 평 씩 사는 운동이었다. 지금은 그 운동이 멈췄을까, 기꺼이 나도 ‘한 평 지주’가 되고 싶다.

미군기지로부터 평택을 지키기 위한 운동의 하나로 '땅 한 평 사기 시민 운동'이라는 것이 2002년부터 일었다. 이곳을 '평화의 논'이라 하여 시민 지주를 모으는 과정 속에서 평택 미군 기지의 문제를 더 널리 알릴 수 있게 한 운동의 하나였다.


자본주의 권력집단과 신자유주의 세력의 격돌 - 그들만의 리그

- 선생님 이제 눈길을 바깥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미군기지 싸움을 평택에서 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점령군에 대한 싸움인건데, 우리가 또 지금 우리군대가 점령군으로 이라크에 가있잖아요. 이런 모순적인 우리의 현실, 어떤 이율배반. 우리는 어느 한 나라에 침략군을 보내놓고 우리나라 안에서는 점령군인 미군에 대해서 오지 말아라, 줄여라 하는 이런 싸움을 한다는 게 정말 부끄럽고 슬프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땅에서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학살을 생각하면 그 분노나 그 슬픔은 말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저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아직 우리에게는 미군을 규탄하고 진상을 밝혀 책임지라고 요구할 자격을 못 갖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베트남 양민들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지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건 달리 말하면 일본 군국주의가 자신들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반성 없이 마치 자신들은 피폭을 당한 전쟁피해자의 처지에서만 전쟁의 상흔을 이야기할 때 선뜻 동의하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지금 이율배반적인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난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율배반적인 게 아니고 우리에게 권력이 없다는 거거든요.”

- 거기서 말하는 ‘우리’는 무얼 말하는 거지요?

“한국, 한국이라고 하는 것. 이를테면 대한민국이라는 정부, 하나의 국가. 이거는 이제 우리가 베트남에 참전하게 된 당시에도 우리 국가로서 독자적인 판단으로 간 것이 분명히 아니듯이, 그리고 우리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고 충분히 거부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듯이 지금 이라크 파병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주한미군의 한반도 재배치랄까 어마어마한 땅의 새로운 어떤 공여랄까 이런 부분도 우리 정부, 국가라고 하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고 하는 것이 독자적으로 배타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거죠.

그건 이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체제가 완전히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 완성된 현재,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장악한 현재 상태에서 독자적인 경제 정책을 취할 수 있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어요. 그렇듯이 경제적으로 독립된 나라가 없다고 나는 보는 거죠, 그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그렇듯이 군사적으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그런 제국주의에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정부는 저 지역에, 완벽하게 보장되지도 않은 지자체, 지자체의 지역 정부에 불과하다는 거뿐이죠, 권력면으로 본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중앙 정부에 예속되어있는 지방경제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지역에서의 경제, 어떤 단독 경제 정책을 취할 수 있는 범주가 있듯이 그런 정도 내에서 우리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아주 변두리, 중앙으로 보자면 변두리의 지역 정부에 불과하고, 이 속에서의 결정들이 사실은 그 정부 단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단 말이죠.

저 큰 데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저 위에서 결정을 내리고 우리는 저항할 수 없었던 거, 우리 국가 단위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그런 것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과거하고 지금하고 달라졌다면 그게 더 틀이 완강해지고 완벽해졌다는 그런 거, 그리고 그 싸움이 어떻게 보면 우리 정부하고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평택의 싸움이, 결국은 미국하고의 싸움이라는 거죠. 그런 면으로 봤을 때 우리가 베트남에 파병을 했다든지, 사과를 한다든지, 이라크에 한 편으로 파병을 하면서 한 편으로 여기에 미국의 주둔지를 넓힌다든지, 이런저런 문제, 갈등이 우리 국가 차원의 갈등이 아니고 양심차원의 갈등일지는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산만하니까 집중이 잘 안되는데…….”


둘레가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오후 해가 짧아질수록 우리가 앉아 있던 가게의 마당, 우리가 앉은 바깥 자리는 많이 쌀쌀해졌기도 했고, 무엇보다 옆에 있는 가게에서 트는 음악 때문에 선생의 말소리가 내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제부터 막 이야기의 결이 훨씬 섬세해지고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생에게 느껴지던 어떤 불안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는 차례였다. 어떻게 해야 할는지, 내가 둘러봐서는 아파트 단지 밖에 달리 들어가 있을 만한 곳이 선뜻 보이지 않았다. 괜히 자리를 옮기려다 이야기의 흐름만 끊는 건 아닌가 싶어서 바로 다음 물어볼 말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일부러라도 괜찮다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기에 별 무리가 없다는 티를 내려 했다. 이제부터 막 선생이 내면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지금 느끼는 혼란이면 혼란, 진정이면 진정, 실체면 실체……. 아니, 무엇보다도 선생과 깊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질문을 이었다.

- 그렇게만 본다고 할 때 저는 사실 많이 절망스러운데요, 그래도 이 나라에서 정책을 올리거나 결정을 내리는 행위 주체는 분명히 우리 정부가 되는 건데…

“나는 아니라고 봐요, 우리 정부가 그 행위 주체가 되지 못한다고 봐요.”

- …예를 들면요, 올 해 들어서 이라크에서는 계속 해서 다른 나라들의 철군이 이어지고 있고요, 스페인의 철군이 있었고, 또 도미니카도 철군을 한다고 하고, 이탈리아도 그렇고……. 실제로 김선일 씨 하고 아주 똑같은 경우가 필리핀의 한 노동자가 그렇게 무장 단체에 납치되어서 참수 협박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필리핀의 아로요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도 하나둘 꼽을 정도로 친미적인 대통령인데다가 필리핀이라는 나라 자체는 한미동맹을 말하는 한국 못지않게 미국에 좌지우지되는 그런 나라인데요, 우리와 거의 다르지 않은 처지의 나라, 우리가 처한 상황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필리핀의 대통령, 필리핀의 정부는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선택한 일이 있었잖아요. 여기에서도 우리 정부에는 전혀 그 정도의 운신의 폭조차 없었을까요?

“군사적인 면으로는 필리핀보다 운신의 폭이 엄청나게 작은 게 현실이잖아요.”

- 그렇게 되면 우리 싸우는 구체적인 것 하나 하나도 그 모든 원인이 뿌리를 쫓아 올라가게 되다 보면 결국에는 미국, 또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랬을 때 모든 싸움의 전선이 미국에 그어지게 되고, 더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에 그어지게 될 때 구체적인 싸움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신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전파하는 자들이 미국에만 있지 않고 우리나라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것도 권력의 핵심부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힘 있는 자들 대부분이 말이에요. 우리가 싸워야 할 ‘미국’은 단지 북아메리카 땅의 그 ‘미국’ 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하고, 신자유주의 질서를 받들고, 신자유주의에 기대어 기득권을 챙기고자 하는 세력들이 모두 ‘미국’이라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 정권의 핵심 또한 거기에 들어가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이 우선 되려면 우리 안에 있는 미국, 우리 안의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것이 결국 전 세계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그 미국과 싸울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거든요.

“지금 이뤄지고 있는 어떤 내부의 갈등들… 이를 테면 나는 신문을 전혀 안 보는데 그 얘길 들었어요. 수도 이전에 관한 위헌 결정, 그거를 나는 이제 촌평을 하기를 지역의 ‘파워 게임이다‘라고 촌평을 했는데, 그리고 한 편으로 그것으로 상징화되는 우리 내부의 싸움들, 그 싸움들이 과거의 구세력들, 구권력자들, 구권력집단들, 구메인스트림, 이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아니거든요. 과거 토호들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네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그 권위가 때로는 경제 논리보다도 앞서는 그런 것으로서의 자본주의였는데 지금은 그게 달라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세력들은 그런 어떤 거부감하고도 싸우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본다 하면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시장을 지배를 하게 된 상황이고, 그래서 이런 갈등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둘레 소란스러움이 더욱 심해졌다.) 가만있어 봐요, 아이 참. 내가 장소를 잘못 골랐나 보다. 나도 여기에 산만해져가지고…….”

바깥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어느 순간에는 자기 목소리가 자기한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황이 받쳐주지를 않는다. 선생의 얼굴을 보면 이야기하고 있는 한 마디 한 마디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구 권력 집단들, 말하자면 구 자본주의 세력들과 지금 권력을 거머쥔 신자유주의 세력들 간의 갈등, 그리고 그건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이미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것……. 잘 살펴야 한다, 한국 상황 안에 있는 어떤 갈등에다가 한국의 상황과는 그 속도나 양상이 아주 다른 세계적인 질서, 이 이중적이고 중첩적인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데 둘레가 시끄러워 내가 말하는 소리까지 안 들릴 판이니 난관이 너무 크다. 나는 괜히 나라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기껏 한다는 말이 편하게 말씀하시라는 거였다.

신자유주의의 관철, 국가 권력의 무력화

- 그냥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잠깐만요, 근데…… 산만해가지고.”

- 저한테는 지금 선생님 말씀이 다 막 공부가 되고 그렇거든요.

“아니야, 나한테 반론을 제기할 것도 많은 것 같은데. (웃음) 자, 그러면 이동을 합시다. 이거 한 잔만 마시고.”

마시던 잔을 다 비우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시끄러운 둘레 분위기는 아무래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쌀쌀했다. 그렇다고 앞에 놓인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키지는 않았다. 나는 더 듣고 싶은 선생의 이야기가 많았다. 선생은 아주 성실하고 진지하게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느꼈는데, 대화나 토론을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의 덕목은 다름 아닌 그것, 성실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 해도, 식견이 훌륭하다 해도, 또는 성격이 좋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 성실함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덕목들이야 아무 소용이 없다.)

- 분명히 우리 사회의 지금의 지배 권력은 신자유주의 세력이고, 선생님 말씀하신 그 구자본주의 세력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나라당,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극우, 이 세력들 사이의 싸움에서 사실 우리는 이 둘 하고도 다 싸워야 하는 건데, 그 동안에는 우리가 극우 보수하고의 싸움을 너무 오래 해 온데다 그네들에게 너무 오래 억눌려 왔기 때문에, 이 극우 보수인 구자본주의 세력과 신자유주의 세력이 서로 갈등을 보이고 있으면 자꾸만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신자유주의 세력의 편에 서서 구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전선만을 뚜렷이 긋는 것도 같거든요.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게 자신도 모르게 신자유주의 세력을 옹호하고 있다거나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그… 이제, 내가 한동안 고민했던 게 그런 달라진 상황, 지난 10년 간 달라지는 상황들이 우리 사회에 운동으로서든, 또는 여론으로, 지식인들의 인식으로, 이렇게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든 아직 그런 게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난 10년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걸 우리는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국가권력이 어떻게 과거에 군부에 있을 때 절대성에서 그 국가 그 권력이 무력화되었는지 시민에 의해서 무력화된 면도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면서 얼마나 무력화되었는지에 대한 것, 그리고 실질적인,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우리 시민들에게,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국가인가, 남한 체제의 국가인가, 아니면 뉴욕의 자본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지금 제대로들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죠. 만약 새로운 전선이 만들어진다면 무엇과 마주치는 전선이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도. 그런 면에서 지금 나는 그것들을 정리할 때가 됐다고 보는 것이고, 그래서 아까 민가협하고 얘기하면서도 이번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슈 하나만을 가지고 하는 것은 동의를 하는데 내년은 25주년인가 20주년인가 그렇다니까 내년엔 달라야한다, 일단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정리를 좀 해야 한다, 최근에 한 10여년 사이에, 그리고 그 변화된 것 속에서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를 다시 끌어 내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들을 마련하고, 그리고 물론 문예적인 표현 방식에서도 다른 상황을 반영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공연 또는 이벤트여야 한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지금 내 관심사는 그런 거예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가? 지금 단계의 그 변화는 변해 가는 중인 것 보다는 완성되는 중인 것 같고, 그렇게 변화된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과 나와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거든요, 나한테, 몇 년간. 지금은 대충 정리가 됐지만…….“


- 그 정리가 아까 말씀하셨던 그 부분하고 닿는 그런 거라 할 수 있나요? (아까 그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초반에 녹음이 안 된 채 말씀하시던 대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예…… 이탈이라면 이탈이고, 이탈 선언을 한 것이고, 그런 최소한의 뭐 연대 같은 것들도 풀어버리고, 단지 내 세계관의 실현으로서의 행동. 그리고 내가 그동안 이 사회로부터 받았던 어떤 박수나 어떤 칭송이나 경제적인 어떤 반대급부나 이런 것에 대한 부채, 그 부채를 좀, 조금이라도 좀 갚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것으로서의 인색한 그, 그 봉사, 이런 정도로 대략 정리를 하고 있는 거죠. 어떤 그룹이나 어떤 진영과도 특별한 연대감을 갖지는 않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 세계관에 대한 실현, 내가 가진 가치와 기준으로 내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시집을 내지 않았어도 이미 시인이었던 정태춘 선생님은 시를 쓰게 되면서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찾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이는 '저 불연속으로 단절된 시점들을 미안하게 꿰어맞추며(44쪽)' 시를 써야겠다고 한다. '술에취해서 또는, 깨어서 시를 써야겠다'고 말이다.


내 시와 음악은 예술이 아니라 진술

맥주를 다 마셨다.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있던 올림픽 공원 역 둘레에서는 다른 갈 만한 데를 찾지 못했고, 택시로 아주 잠깐 잠실 쪽으로 나가서 선생이 자주 감직한 어느 찻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옮겨서 나는 얘기를 들으면서 계속 정리가 덜 되는 것 같은 부분에 대해 다시 여쭈었다. 이렇게 글로 받아 적으면서는 선생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정리 되어 들어오는데, 솔직히 말하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선생이 하는 이야기 상당 부분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다. 자리를 옮기니 따라서 분위기도 환기가 되었고, 옮긴 자리에서는 먼저 선생님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 앞서도 선생님 시 이야기를 더러 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 이야기를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올 4월에 시집을 내셨잖아요. 정말 시집에 짧은 평을 써준 홍세화 선생님이나 도종환 선생님 표현처럼 이미 그 동안에도 선생님의 노래는 시 아닌 것이 없었다 할 정도로 노랫말들이 모두 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 얼마 전 외국에서는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자격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 뉴스를 보다가 문득 선생님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책으로 묶어 낸다는 것이 선생님한테는 나름으로 어떤 정리, 한 시대에 대한 정리와 같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물론 매번 음반을 낼 때마다도 그런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시집을 내는 것도 어떤 정리, 현실에 대한 정리, 중간에 매듭을 짓는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런 거라면 어떤 걸까 듣고 싶은데요.

“그런 의미보다는 새로운 통로랄까,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마련했다는 것에서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사실 노래로서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기에는 조금 딜레마에 빠져있었어요. 이를테면 내가 들인 그것들을… 일단 사람들이 내가 가지는 관심,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이나 고민에 관심 있어 하지 않고 추억으로서의 노래만 요구를 하고, 그런데 내가 추억으로서만 머문다면 하나의 상품에 불과할 뿐이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걸 요구를 하니까 내 상품들을 판매를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을 했었죠. 계속해서 음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돈도 많이 들어가고 품도 많이 들어가는데, 그리고 거기서 소화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제한적이고. 2년에 한 번, 3년에 한 번 앨범을 낸다면 열 곡, 열 가지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고, 그래서 굉장히 답답해 하다가 출구를 시 쪽으로 연 거죠. 그런데 열고 보니까 너무나 행복했어요. 이렇게 쉬울 수가, 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시적인 성취나 이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본다면 문제가 많지만, 나는 절대로 문학이 아니고 시가 아니다, 내 진술이다 하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내 음악도 예술이 아니었듯이, 진술이었듯이, 내 새로운 출구를 아주, 참 좋은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을 했죠. 옛날에는 한쪽에 악보 놓고 한쪽에 백지를 놓고, 가사 한줄 쓰고 이쪽 한줄 쓰고 이렇게 음악이란 형식에 맞춰서 써야 되는, 그런 게 있었고, 노래가 가져야하는 품위랄까, 노래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제한적인 것들을 좀 털어버리면서 텍스트만 가지고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 물론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더 소수가 됐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은 음반을 낼 때보다 더 소수가 됐지만, 그래도 더 은밀하게 더 솔직하게 더 편안하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내가 무엇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어요, 나한테는. 아, 이렇게 편안할 수가, 이렇게 좋을 수가 했죠. 그래서 나한테는 아주 획기적인 발견이에요. 그 전에 20-30년 동안 노래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했었어요. 악보를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시 이런 거는, <북한강에서>라는 노래를 발표하기 전에 레코드 회사에 보여줬을 때 레코드 회사에서 “신춘문예에 한번 내보자.” 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노래로 냅니다.” 노래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하고, 그렇게 30년을 해왔는데, 비로소 이제 처음 시란 통로를 만나면서 ‘아, 이런 게 있었는데!’ 하고 이제서 깨닫는 거야. 시 쓰는 일이 너무 재밌고, 지난 4월 달에 시집이 나왔는데 그 이후에 또 한 권 분량이 만들어져가지고 실천문학에 다시 이제 일단 초고를 보냈는데 실천문학에서 답장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 출판사에서 좀 내볼까 하고 정리 작업을 좀 하고 있죠. 그래서 나한테 시의 발견은 획기적인, 나를 정리한다는 차원이 아니고.”


- 지금 이야기할 때가 제일 행복해 보여요, 오늘 함께 있으면서 이야기하신 것 중에서.

“그리고 이제 이런 공적인 활동을, 공적인 활동에 대한 부담이나 또는 짜증스러움이나 공적인 활동의 상투성 그런 짜증스러움이 시에선 없어요. 노래는 무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대중들에게 무작위로 들려주기 위한 그런 것이라면 그래서 최소한의 어떤 품위와 최소한의 절차와 얼마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런 것을 요구를 하는데 시는 내가 보기에는 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옆구리 쿡 찌르고 은밀한 문건을 건네주는 것 같은 사적인 작업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근래에 시 쓰는 일은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굉장히 행복한 그런 작업이죠. 문학적인 시적인 그런 비평, 기준, 이런 것들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는데 가능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스로우려고 생각을 하죠. 그런 비평 기준으로부터도 어떻게 좀 자유스럽게 갈 수 없겠는가.”

"나는 혁명을 바라는 거죠. 이제까지 이루어져왔던, 실패했던 세계사, 슬픈 세계사 또는 인류사 전체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 그런 것으로 이행해나가는 혁명. 그것이 물리적인 혁명이든 정신적인 혁명이든, 그 단기적인 혁명이든 얼마간의 기간을 두고 진행되는 혁명이든……"


상투성을 버리고 세계를 새로 해석해야

- 좀 아까 말씀하신 것 가운데에서요, 노래로 무대에 섰을 때, 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떤 짜증스러움이나 어떤 상투성에 대한 부담감을 말씀하셨는데, 당장 내일도 국민 문화제에 올라 노래를 하실 거고요…

“그것도 좀 상투적인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요.”

- 그래요? 그러면 그런 것들 가운데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상투성이나 짜증스러움을 느끼시는지.

“이를테면 내일 그걸 한다는데, 어제 저녁에도 어떤 당에서, 그걸 준비하는 측에서 선생님 노래를 어떻게 배치해야 될지, 대략 틀은 나와 있더라고요, 배치해야 될지 곡목을 좀 알려줄 수 없느냐. 그래서 나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현장에 가서 내가 생각을, 판단을 하겠다. 그러면서 나를 배치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제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계획과 구상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것을 이렇게 기계적으로 배치하는 식으로 된다고 했을 때 나는 이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오늘도 어떤 운동단체에서 전화가 왔어요. 자기네들의 자체 신문을 만드는데 내일 행사에 출연하는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래서 그것도 좀 상투적인 거 같다, 하지 말자 고 했거든요.”

- 인터뷰하지 않으셨어요? 요 며칠 전에 하나 본 거 같은데요.

“더러 나를 만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면 내가 얘기할 수 있죠. 그런데 전화로 내일 행사의 의미가 어떤 것일까, 또는 뭐 내일 행사를 통해서 우리가 무얼 다짐해야할 것인가…, 나 사실 그런 생각 안 하고 살거든요. 내가 아까 민가협 식구들하고 얘기를 하면서도 지금 그런 문제는 나에게 부차적이다. 국보법문제, 이런 문제 다 부차적이다, 내 지금 상황에서는. 그거는 그 지역의 어떤 권력들 간의 작은 지역 권력들 간의 파워게임처럼 보인다. 물론 이제 국보법 문제 전체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 남한사회의 싸움들 그런 싸움들이 내 눈에 그렇게 비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동참해야 할 부분이 있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내 미안함과 내 부채와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있죠. 그런 것들을 좀 이해를 해주신다면, 그런 부분들이 있다는 것까지 좀 감안을 해주신다면 사실 나의 관심은 그런 면에서 그런 것들을 부차적으로 본다는 것이거든요. 이… 그래서, 그것에 관해서 내일 모레 공연에 가야 되는데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가야 될까? 어떤 노래를 불러야 될까?’ 나는 그런 생각 안한다는 거죠, 안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전화해가지고 ‘아, 뭐… 우리가 국보법을 뭐 어떻게 해야 할지…’ 이거 너무 상투적이라는 거예요. 나는 지금 준비가 안됐는데. 내가 근래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도 아닌데 적절한 답변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는 재미가 없는 일이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도 했고, 예전에 생각들을 가지고 말을…… 지금 비교를 하거나 이런다면 황당한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나는 그냥 정상적인 어떤 생각의 진전이랄까 이런 것으로 보여질 수 있도록, 남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하다보니까 여기 생각까지 왔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여기까지가 왔다 하고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미처 그런 이야기가 잘 안됐을 때는 ‘어, 어?’ 하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 선생님 말씀 듣다보면 어떤 절망이랄까, 어떤 벽 같은 것을 굉장히 많이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그 가운데에서도 선생님이 지금 어떻게 숨통을 찾는 희망의 싹을 어디선가 발견한다면 그 희망의 싹을 선생님은 어디서 찾고 계실까?

“아……(긴 한숨). 희망이 있다면 절망을 안 하지. 절망을 안 하는데 지금 나한테는 그 희망은 없고, 나 개인으로 본다면 내가 과연 다시 나의 존재가치를 이렇게 적극 투여 할 수 있는 그런 열정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죠. 그것들이 식어들면서,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부정적인 답변이 나오면서 참 쓸쓸해지는 그런 면도 있어요. 있는데 그런 열정으로 다시 나를 투여할 수 있는 때가 안 오더라도 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겠다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고, 남은 삶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이 참, 오늘 영 말이 헷갈리네. (다 같이 웃음)”

- 제가 너무 추상적인 물음을 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에요, 아니 아니. 지금 질문이 뭐였지? 다시 한 번 얘기하면…”

- 온통 꽉 막힌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선생님이 한 줌 희망을 찾는다면, 숨통을 틔우게 해 주는 게 있다면 그런 건 어떤 걸까 하고 물었거든요.

“내 시에, 새로운 시집에 들어가는 시에는, 나는 혁명을 바라는 거죠. 이제까지 이루어져왔던, 실패했던 세계사, 슬픈 세계사 또는 인류사 전체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 그런 것으로 이행해나가는 혁명. 그것이 물리적인 혁명이든 정신적인 혁명이든, 그 단기적인 혁명이든 얼마간의 기간을 두고 진행되는 혁명이든. 어… 이제까지의 것들을 변화시키는 어떤 움직임. 희망이라면 그런 희망이 있는데 그런 희망들을 사회의, 지금 이런 상황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속에서 상당 정도의 어떤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쯤. 그랬을 때 나는 내 당대에는 좀 불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또 한편 사적인 절망이 깊고, 과연 내 당대에 그런 흐름들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전체에 대한 반성과 그 반성을 토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대안과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싸움과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얼마간의 희망의 집단들 이런 것들 가능할 것인가 했을 때, 그것이 오기는 오되 내 당대에는 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이 서는 거죠. 그래서 얼마 전에 이영희 선생님 댁에 놀러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절망을 어떻게 푸는 겁니까? 하고 말씀드리니까 이제 그런 절망, 첫 번째는 이거(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뜻하는)가 있고, 그 다음엔 적절한 변절이 있고, 변절하는 방법이 있고, 절망으로부터 벗어나야하니까, 세 번째는 적당한 타락이 있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 그 세 개가 끝이에요?

“그렇죠. 그러면 나는 대답이, 대안이, 아무 것도 그 중에 선택할 것이 없는데. 그러면서 얼마 동안, 아… 또 하나 있기는 있다, 욕심을 버리는 거다. 어떤 미래에 관한 욕심도 버리고, 내가 더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기는 바라는 욕심도 버리는 것이고, 그것으로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왜 이런 말씀은 안 하셨을까? 욕심을 한 번 버려보자. 근데 뭐 그런 걸 한 번 해보자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무력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 절망을 해결하는 길은 넷 다 아니고, 결국 내가 그거를 찾은 거 같지도 않고. … 근래 누구한테 이메일로 편지를 쓰면서 세상을 너무 공들여 살지 마십시오 하고 내가 편지를 썼는데, 욕심을 버리라는 거 하고 비슷하기도 하지만… 이… 좀 뭔가 흐름에서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뭐 대답은 없는 것 같애.”

- 희망을 찾는 모색의 과정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은데요.

“아니, 나는 지금 별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2003년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를 위한 삼보일배에 참여해 함께 하고 있는 모습. '인간이 인간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고 해왔던 슬픈 세계사를 전면적으로 반성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에 대해서 그것을 타계하고자하는 어떤 목적의식을 가진 실천적인 예술가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 이탈자의 마음으로 살 거예요

- 그 말씀이요, 아직 제가 선생님 말씀을 못 따라가서 그런 것 같은데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어요. 선생님이 들려주신 다른 대답들 속에서 조금 조금씩 말씀을 하시기는 한 건데요. 아까 예를 들어 말한 내일의 문화 행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상투적이다, 내일 행사의 의미가 무어냐 하고 물으면 그건 나의 관심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제 자꾸만 그런 걸 상투적으로 묻더라… 하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의 관심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 세계가 그렇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속에서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고 맺어가야 하는가’ 한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면 선생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그것의 내용을 정리하면 어떤 건지, 그 부분을 더욱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선생님이 바라보았을 때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선생님과 세상과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하고자 하는지, 선생님의 역할을 어디에 두시는지…….

“일단은 사람이 살아온 역사에서 판단을 해야겠지요. 이것이 우리한테 주어진 그 안의 역사의 결과물, 축적 또는 뭐 이런 결과로서 나한테 주어졌는데, 이것이 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하는 고민들을 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제일 뼈아픈 게 인간이 다른 종과 다르게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면서 무언가 인간이 대상화되고, 이렇게 어떤 대립이 생기고, 지배 관계가 생기고, 시스템으로 묶이게 되고 그런 반성부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나는 이제 국가라는 틀이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런 작은 작은 통합들, 그러니까 그 잉여가치를 모으기 위한, 그리고 그것들을 독점하기 위한 통합의 과정이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역사가. 작은 통합, 작은 통합, 더 큰 통합, 더 큰 통합 해 가지고 마지막으로 지구상의 모든 종족과 모든 집단들이 단일 체제 속으로 통합이 됐죠. 그 통합 과정이 끝났어요. 지난 십 년 이라는 게 결국은 그것에 저항하는 일부 진영들의 몰락과 패배와 그 패배 이후 다시 짜여 지는 지배체제, 단일 국가가 돼 버렸죠. 그 속에서 이제 개별국가들은 그만큼 지배력이 떨어졌다는 것이고.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을 했을 때 인류사 전체가 잘못됐다고 반성을 하고 실패였다고 판단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까지의 과정들은 철저하게 반성의 대상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랬을 때 나한테 주어져 있는 이 현실은 내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현실인 거죠. 정당하지 않은 것이죠, 근본적으로. 그리고 그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 헤게모니는 자본주의가 쥐고 있고, 그리고 그 논리를 강압적으로 모든 집단에게 강요를 하고 있고, 좀 더 깊숙이까지 그네들의 힘이 침투하고 있고, 우리 남한 사회만 하더라도 금융자본의 상당 부분을 그네들이 점유하고 있고, 그 속에서 그네들에게 유리한 정책, 경제정책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고, 이런 지배체제의 어떤 완성. 이것에 나는 동의를 할 수 없고, 나는 거기에 동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제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때로는 그것을 옹호하는 어떤 논리나 그것들을 보호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체제 자체에 대해서 나는 인정할 수 없다 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구요. 비근한 예를 들어서 절망을 느끼는 건 이런 부분이죠. 우리 남한 경제가 고도의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요. 경상수지도 흑자도 높고, 그걸 그런데 국내경기는 도대체 살아나지 않고 불황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 말이죠? 그게 아이엠에프이후 자본 시장이 개방되면서 여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저네들의 힘, 그네들의 힘을 거역해서 대한민국의 정부가 또는 노무현 정부가 국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쓸 수 없다고 나는 보는 거예요. 주식시장에 힘은 우리 국내 자본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외 자본에 있거든요. 투기자본에 있고. 그네들의 어떤 본능적인 그런 움직임에 거역해서 우리 남한정부가 국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절대로. 이런 식의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그런 상황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고. 그 다음에는 노무현이라고 하는 한 개인으로 보자면 나름대로… 뭐, 그렇게 아주 야단맞을만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나름대로 양심도 정치인으로서 흔치않게 견지하고 있었던 사람이고, 또 어떤 민족의 정치인으로서 나름대로 자존심도 가지고 있었던, 어떤 한 개인이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미국과의 관계에서, 사적인 발언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책적인 면에까지, 이렇게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는가, 또는 그를 지지하는, 운동진영이라고 하는 과거에 그 자존심 만만치 않은 그 집단들이 어떻게 이렇게 굴욕적으로 그네들 수하로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는가, 라고 했을 때 그네들의 힘만 가지고 싸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죠.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네들의 어떤 작업에, 이런 자본주의 단일 시장 건설을 위한 그런 작업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 것에 대한 절망감. 그래서 결국은 이제 그네들의 그 논리를 옹호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 저쪽으로부터 힘을 인정받은 지역의 관리자로서의 역할로, 이렇게 전락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제,
이탈자의 마음으로 살 거예요
한편 겁이 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그렇게 하기로 이미 결정한 건데요

그리고,
이제 다시는
계속 저들의 행렬에 발을 맞추기 위해서 종종걸음을 치거나
저들과의 동질성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거나, 모호하게 말하거나, 둘러대거나
가짜에 박수를 치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
.
.

어머니,
전 자유 찾은 이탈자가 아니고
끌려가는 이탈자예요
하지만,
제게
해방된 자의식이 있다면
문제없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저도 역사를 볼 줄 알아요
저 무서운 행렬이 바로 역사란 것
그 행렬은 일개 개인들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
그게 역사라는 거지요
그런데, 근래 그 행렬의 무리가
불안할 정도로 최대화되고 있고
그 속도도
유난히 빨라지고 있다는 것

- 정태춘 선생의 시 <어머니> 가운데에서



……나는 그렇게 세상이 진행되어왔다고 봐요, 지난 10년 동안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일부의 도전이 실패하고 무너지면서 그것이 다시 짜여 지고 결국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는 지역 지역의 헤게모니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과정이었다. 그것이 나는 절망스럽다. 그것과 싸울 수 있는 국제적인 연대, 시민 진영의 연대, 결국은 그것이 그것과 싸울 수 있는 것인데 그 연대틀을, 아직도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반세기 이상을 기대려야 될 것 같고, 현재로서는 내 당대에 나를 투여하면서 무엇인가 함께 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런 절망감이 들었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 뿐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이탈밖에 없다. 물론 그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싸워나가는 어떤 사람들,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는 굉장히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면서까지 싸울 수 있는 그런 여력은 없었던 것이고, 세상과의 관계 설정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 정리를, 그래서 일단 세상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정리가 되고, 세상과의 관계 설정은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 다음에 여전히 나에게 남은 숙제가 있다면… 무엇인가 했을 때, 사실은 다 털어버렸었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미군 부대 문제는, 이제 내 지역적인 연고도 있고, 그 다음에는 제국주의 본질하고 싸우는 그 연대틀, 아주 폭넓고 탄탄하진 않더라도. …내가 지금 적대시하고 있는 제국주의 본질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거를 그렇게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러면 덤벼들자 하고 생각을 했던 거고, 그러면서도 내가 이제 이런 군축문예행동 같은 것을 짜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디어는 많이 있는데 과연 다시 사람들을 이렇게 끌어 모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냥 혼자 하면 될 것이지. 그런데 이제 주위에 얘기를 하면서, 또 이렇게 같이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서, 혼자 하지 말고 여럿이 도모하는 걸 해보자 하고 얘기된 것이고. 그러면서 방식도, 싸우는 방식도 조금 다르게 가져가 보자 하는 이런 답들이 나오니까, 어 그럼 재미있겠네, 이게 뭐 자기 헌신을,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실현하면서 재미있게 할 수 있겠네 하고 생각이 들게 된 거고. 그래서 지금은 이제 문예 행동 쪽에 얼마간의 기대를 가지고 하고 있고, 그런데 전에 하고 좀 달라졌다면은 그 사람들이 뭐 인터넷에 들어와서 열람하는 사람들이 50명, 60명 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행동에 나섰을 때 몇 명이나 될 것이냐, 그런 것에 실망을 하지 않을 준비를 하는 거죠. 두 명이라도 좋고, 세 명이라도 좋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가고 있어요.”


진짜 피고소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해야겠지요. 부시, 블레어, 노무현은 침략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물론 그네들의 대리인을 법정에 세우는 것도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부분을 밝혀 드러내줘야 합니다.



부시, 블레어, 노무현은 자본 침략의 대리인

- 실제로 평택 같은 경우는 5월 29일 축제, 그것을 계기로 해서 지역적으로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까지 많이 알리게 되는 기회가 된 것 같거든요. 단지 그 날 하루의 축제가 아니라 그 축제까지 가는 것이 반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역 곳곳의 풀뿌리 모임이나 시민들과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요. 저 또한 그 때 참여하면서 비로소 문제를 가깝게 여기게 되기도 했거든요. 게다가 그러한 정도의 문화 행사라면 앞서 계속 지적해 왔던 집회 문화나 공연 문화의 상투성 같은 건 상당히 넘어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렇죠. 우리가 이제까지 배워왔던 것을 여러 가지로 같이 모아 놓은 거죠. 그렇게 상투적이진 않았죠.”

- 그리고 선생님 말씀 가운데 이제는 새로운 전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지난 10년 과정 동안의 변화라는 것을 뭐랄까 전 세계 자본의 전일적인 지배,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지배가 관철되는 과정이라 하셨고요. 이러한 지배에 저항하기 위한 전선의 재구성, 움직임이 실제로 없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올 봄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 포럼도 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거고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나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슬로건이 귀에 익숙하기도 하고요…….

“사회주의 세력들의, 남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또 그런 국제 연대 같은 것들도 일고 있고.”

-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공들여 하고 있는 운동 가운데 하나가 ‘전범 민중재판 운동’이라는 것인데요. 이 운동에 두고 있는 중요한 의의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한국 내에서만 벌이고 마는 운동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과 함께 연대해 ‘국제 전범 민중재판’으로 이어가겠다는 거거든요. 이 전범민중재판 운동이 실은 한국에서는 가장 늦게 시작하다 시피 했는데요, 벌써 벨기에나 일본, 이탈리아, 터키, 필리핀 같은 나라들에서는 진행을 했거나 진행하고 있어요. 이래서 내년 3월 20일, 이라크 침공 3주년이 되는 그 날은 터키 이스탄불에 모여 국제 전범재판을 열고자 하거든요. 우리로서는 침략군대를 세계에서 세 번째나 많이 보내 놓고 이제 시작을 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요, 그래서 지금 더욱 힘내서 열심히 다니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 이 인터뷰들을 하고 다니면서도 만나 뵙는 분들마다 기소장도 받고, 실제 전범재판이 열릴 때 중요하게 증언이 될 만한 말씀도 청해 듣고 다니고 있거든요. 이 운동도 사실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당대에 얼마만큼이나 힘을 모아 전선을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아직 많이 어렵기는 한데요, 그 새로운 전선이라는 것이 뭐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져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모래 알만한 크기로라도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면 그러한 저항, 저항의 전선에 밑거름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이 운동을 하면서도 그런 의미를 두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도 기소인으로 참여해서 기소장을 써 주시면 좋겠어요. 부시와 블레어, 노무현을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올린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그네들의 전쟁 범죄 행위를 드러나게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요, 이건 다른 게 아니라 선생님이 앞서 말씀하셨던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그리고 거기에는 굉장히 중요하게 군수 자본이라는 게 놓여 있을 텐데, 금융 자본과 더불어서, 이것들이 3세계 민중들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고, 또 구체적으로는 이라크 땅에서 날마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나 하던 그 말씀 자체가 하나의 전범 기소의 증언이 되기도 하거든요. 이랬을 때 선생님께서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전쟁범죄자로 기소를 한다 할 때 그 기소의 까닭을 다시 정리해서 말씀을 하신다면, 그 온갖 전쟁 범죄의 행위들 가운데 가장 힘주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 듣고 싶거든요.

“이라크 전쟁, 뭐 전쟁이라고 말할 것도 없지만, 침략이지만…… 침략에 문제는, 이라크 전쟁의 본질은 경제적인 것으로서의 그 지역 자원이, 석유 자원 밀집된 그 지역에서의 헤게모니에 관한, 헤게모니 유지 확보에 관한 싸움인데, 결국은 그 침략이 경제적인 이유로 이루어졌고 그리고 그네들이 실질적인 전범의 주범이라 보기 보다는 자본의 대리인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수행하고 있는 집단들이죠. 그런 면에서 대리인들을, 자본독재 대리인들을 처벌 또는 재판을 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두고 있고, 그러면서 그 재판 과정에서 나는 그 대리인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실질적인 그런 침략을 실질적으로 도모한 세력들이 밝혀져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싸움, 그런 재판이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 한편으로 그 정도의 세 인물 상징적인 세 인물을 그런 법정에 세우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한데, 대중들로부터, 거기까지 과연 얘기가 진행이 되어질지… 애초부터 내 생각은, 내 입장은 그래, 애초부터 그걸 들고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 선생님은 아쉬움이 더 많으신가 봐요. 그들은 자본 전쟁의 대리인데 불과하다.

“자본 침략의 대리인데 불과하다.”

- 아, 자본 침략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부분까지 밝혀주고 드러내게 해야 하는데…

“그네들을 법정에 세우는, 그네들이 피고인이 돼야 하는데, 그네들의 대리인들이…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기는 하겠지만은 다소 그런 부분들이 좀 내 맘에 쏙 들지 않는 게 있다는 거죠. (웃음)”

-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정말로요, 이 전범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걸 드러내는 과정은, 그러니까 법정에 전범자로 올라가 있는 건 부시, 블레어, 노무현이지만 그들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서 이 전쟁의 본질에 대해 밝히는 것을 이 재판 과정이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거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진짜 피고소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겠지요. 그러면 이거는 제가 집에 가지고 가서 써가지고 올 게요. 그러면 내일이라도, 누가 있을 테니까, 내일 행사장에 누구라도 있을 테니까 그 자리에서…….”

기소장을 내밀면서 쓰라고 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는 왠지 앞에 있는 이가 좀 길다 싶게 머뭇거리면 내가 불편한 제안을 한 건가 싶어 눈치를 보게 된다. 하나도 그럴 일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왜 그런지 눈치를 살피게 된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구나 싶은 마음에 미안하기까지 하다. 전혀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정태춘 선생에게 기소장 리플렛을 건네면서 써달라고 하니 선생은 오랫동안 리플렛을 살폈다. 그래서 나는 기소인 참여는 하지 않는다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뜻밖에 집에 가지고 가 써 온다는 대답을 들으니 더욱 기뻤다.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는데, 그래도 이 날 인터뷰가 가장 긴, 네 시간 가까운 인터뷰였다, 선생이 문예 행동 <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바로 녹음기에 있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2004년 5월 29일 평택 공설 운동장 앞에서 모여 치룬 평화 축제. 상투성을 버리고, 자유롭게 서로 제안해, 서슴없이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의 문화 행동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문예행동 <숨>은 다가올 12월 중순 평택 미군 기지 옆인 대추리에서 평화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시대 잠든 감성에 새로운 <숨>을 불어 넣기 위하여

“문예인들 모임 두 가지 얘기를 했었는데 하나는 평택에 문예인들 모임에 관한 얘기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제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예 행동 <숨>이라는 것, 그리고 <숨> 내부에 군축평화실현을 위한 문예 행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숨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네트워크 형식이라서 아무나 들어와서 사이트를 통해 서로 관계하고 서로 제안하고, 그래서 제안된 것들이 모여지면 그 사이트 안에서 서로 조직을 하고 모여져서, 어떤 공동 행동을 도모를 하는 이런 방식으로 하자는 건데, 이를테면 한번 거기 들어왔다고 해서 어떤 행동이 있었을 때 참여하지 않은 사람까지 이름을 쫙 거론하면서 우리 멤버가 이거다 라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안 하고, 거기 하겠다고 말은 백 명이 했지만 참여한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면 단지 두 사람 이름으로만 내보낸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예술가는 예술로서 말한다가 아니고 인간으로서 말한다, 예술로서도 말하고 인간으로서도 말하고. 예술적인 발언 정치적인 발언 이런 거 서슴없이, 그 다음에 또 한 편으로 좀 겁 없이 행동하자 하는 것. 과거에 우리가 해왔던 부분들 중에서 좀 아쉬웠던 것들이, 물론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자기 몸을 온통 다치고 복구할 수 없을 상태에까지 이른 희생자들이 많았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 겁이 많아서 자기표현을 못하고 자기 세계관을 펼치지 못했던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좀 겁 없이 활동하자.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상황,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지역 정부에 불과한 국가권력, 이것은 우습게 알자, 하는 정도의 마인드를 가지고 이런저런 행동들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우리 방식으로 해낼 수 있는 특별한 어떤 시위, 그 다음에 이제 12월 중순 평택 미군기지 옆에서의 대추리 평화 문화제, 뭐 이런 것들을 지금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행동이 이후로 어떻게 갈 것이냐에 대해서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논의를 했는데, 나는 이 행동이 근본적으로 ‘반자본 문예행동’ 이라고 하는 것으로의 아이덴티디를 잠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지금 표방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고 얘기를 했는데 상당한 동조가 있었고, 그리고 이후로는 그런 것이 좀 가능해지리라고 생각을 해요. 이것은 철저히 내 입장이기는 한데,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거나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인식일지는 모르는데 본질은 그거라고 보는 거거든요. 이 지금 상황과 이후로 전개될 사람과 체제와의 싸움 이후로 우리가 감당해야 될 시민과 체제와의 싸움이 바로 체제 저 편에 있는 자본과의 싸움이다. 이제 그런 싸움들이 예술가적인 상상력을 가진 그룹을 선두로 해서 이렇게 펼쳐졌으면…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고, 그게 다른 영역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면, 그게 우리 문제를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는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다른 분야 사회 여러 분야 쪽으로 좀 번져 갔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도 있고. 그랬을 때 그런 운동을 끌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세대들이 쭉쭉 좀 올라와 줬으면 하고 기대를 하고 있고.”


- 선생님 이런 말씀 하실 때는 전혀 이탈자가 아니신데요. (웃음)

“그런가요? (웃음) 그렇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탈하고 이탈을 구분해가지고, 그것도 구분 못 해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나는 이탈이라고 하지만 사실 체제가 어떤 사람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거든요. 어차피 끌려가는 건데 끌려가면서 내가 이탈했다고 해서 뭐 무관심하거나 전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나한테 정말 우리 헌법이나 기존의 어떤 가치관들을 강요하지 않는 어떤 공간을, 뭐 나의 생태를 좀 떼 준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게 안 되고 나를 끌고 가니까 그 속에서 이제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든 현실로 옮겨야하는 본능적인 게 또 있고.”

- 그 문예 모임의 정확한 이름이……?

“문예행동 <숨>, 문예행동 <숨>이라는 것은 인터넷상에서, 거기에 기원적인 뭐가 있어, 선언문 비슷한 게. 그게 골자는 그거에요. 이제까지 인간이 인간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고 해왔던 슬픈 세계사를 전면적으로 반성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에 대해서 그것을 타계하고자하는 어떤 목적의식을 가진 예술가들의, 그리고 이제 행동주의적이고 실천적인 예술가들의 네트웍이다 하는 것으로서 문예행동 숨이라는 것이 있고, 그 중에서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제안을 하고 이것이 힘을 모으고자, 하는 그 이슈로 모이는 사람들끼리 그들의 방식으로 조직을 하고, <숨> 자체가 조직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조직을 하고, 아니 조직도 필요 없으면 안 해도 되고, 자기들 필요에 따라서 그룹을 만들고 공동행동을 기획하는 그런 방식을 취하고, 그래서 첫 번째로 제안된 것이 군축평화 문예행동이고, 사실은 군축평화 문예행동이 이것을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인거죠. 거기서 좀 얼마나 힘이 모아질지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 그 파급력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다들 조금씩은 기대를 하고 동참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거를 새로운 문화운동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죠.”

-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정말 기대가 많이 되는데요. 지금 세대에서 운동이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보면 많은 시민 대중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뭐다 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움직이게까지는 하지 못하는 그러한 무감각에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여전히 운동 자체가 어떤 성명서나 구호 아니면 설득을 위한 논리에 갇혀 있는 것 같을 때가 많고요. 눈과 귀를 막은 사회에서라면 폭로 자체가 운동이 되겠지만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세대에서는 결코 그런 문제는 아닐 테고요. 뻔히 눈을 뜨고 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 있다는 게 무엇보다 무서운 것 같은데요. 무감각한 감성을 일깨우는 운동, 그것이 바로 <숨>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설득력을 갖춘 논리나 말빨이 아니라 그야 말로 지금 놓여 있는 현실의 상황에 자신을 동일시시킬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감정이 이입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아, 그래서 문예행동의 이름이 <숨>인가 봐요, 무감각하게 잠든 시민들의 감성에 숨을 불어 넣는 그런 역할, 그리고 어떤 새로운 운동의 숨을 불어 넣는다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이에요.

오늘 이렇게 긴 시간 말씀 들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가 끝났다. 그리고 긴 받아 적기도 이제야 마쳤다. 지금은 선생을 만나 인터뷰를 나눈지 일주일도 넘게 흐른 날이다. 처음에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고, 도무지 쫓아가지 못하겠는 얘기들도 참 많았는데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까 무슨 말인지 윤곽이 보이는 것 같다.


선생은 이탈, 이탈자라는 말을 참 많이 썼는데 그 ‘이탈’이라는 말의 뜻도 이제는 어렴풋 알겠다. 이탈을 용납하지 않는 이 사회 안에서 그 이탈이라는 것을 구현하는 길은 오로지 ‘해방된 자의식’을 갖추는 것일 것이다. 선생은 앞으로 모든 연대와도 끊을 것이라 해서 나는 처음에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몹시 당황하기도 했다.


선생이 모든 연대를 끊을 것이라는 말은 결국 자기희생이나 헌신이 강요되는 ‘갇힌 연대’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자유롭게 결합과 해체를 되풀이할 수 있는 ‘연대 아닌 연대’를 선택한 것이었다.


선생은 젊다. 젊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 앞에 솔직하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으면 가장 근본에 있는 것부터 생각을 하지만 그 근본주의라는 것은 결코 따분하지 않다. 그 까닭은 선생의 근본주의란 행동주의와 늘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생이 쓴 시 가운데 <외로운 전사 소일 풍경>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가운데 중간 대목을 따다 옮기면 아래와 갔다. 선생의 이야기다. 외로운 전사, 반자본 문예 행동 전사.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내가 정말 한판 싸우려는 걸까?

자전거 체인이 더러 빠져나가
쪽팔리기도 하면서
나는
정말 이 세상과 한판 싸우려는 걸까?

왜 나만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거지?
세상과의 불화, 그로 인한 불안정

- 정태춘 선생의 시 <외로운 전사 소일 풍경>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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