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이 진보의 영역을 벗어났다"

[박영자의 북쪽이야기](7) - 북한 노동자조직 연구(上)

1. 통일은 더 이상 진보진영의 담론이 아니다. 그래서?

정권과 자본이 주도하는 남북경협을 넘어서 ‘더 이상 진보진영의 담론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자본의 과제가 된 통일’!

이제 공론화가 시작될 때이다. 현 시기 통일운동은 진보적인가? ‘노동하는 다수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는’ 노동진영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김대중정권의 적극적 대북포섭정책과 노무현정부의 왕성한 남북교류와 대북지원,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박근혜가 김정일을 만나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각종 통일관련 예산 증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한나라당까지 주도적 추진하는 통일사업!

더 이상 통일은 ‘노동하는 다수의 권리가 실현되고 정의가 주장되는, 그래서 역사를 변화 발전시키는 운동(movement)’의 의의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통일운동은 진보진영의 고유한 담론이 아니며 보수세력의 탄압 대상도 아니다. 즉, 통일운동은 ‘진보’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이 시기 ‘노동하는 다수의 이해와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발전’을 원하는 진보적 노동진영은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20세기 사회주의국가가 노동자 다수의 이해와 권리가 실현되는 ‘노동자국가’ 실현에 실패하였으나, 종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실질 민주주의(다수자민주주의)를 추구했던 혁명의 열정과 역동성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21세기 현재에도 노동권리와 다수자 민주주의 실현은 인류의 중요한 문제이다.

그 시작으로 오늘은 이를 시도한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초기 노동자조직은 어떤 성격을 가졌고, 이에 대한 어떠한 주장들이 있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 혁명정신이 도구화되었는가를 북한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방대함으로 이번 글에는 소련과 북한의 노동자 자주결사와 노동자 자주관리의 좌절과정의 초기국면인 사회주의국가건설 과정에서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0세기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가 ‘소외된 노동’의 주체가 아닌 자신의 노동을 전유하는 ‘생산의 주체’가 되게 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의도하지 않았던 ‘노동자의 생산도구화’1) 현상을 유도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과 논쟁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남북노동자 교류가 증대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노동자조직 연구는 노동진영에게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2. 20세기 사회주의 노동자조직의 위상
: 전위당과 노동자대중을 연계하는 매개체(transmission-belt)


북한의 노동자조직인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직맹)은 1945년 해방이후 자발적인 노동자 결사체로 14세 이하 아동에서부터 61세 이상 노인까지 광범위한 대상을 아우르면서 출발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경유하며 사회주의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노동당원은 근로단체에 가입할 수 없게 되고, 산업화를 주도할 30세 이하 청년들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도록 함으로서, 30세 이상 노동자?기술자?사무원을 대상으로 조직된 근로단체로 자리매김 되었다.2)

초기 역사적 조건과 체제상이성 등으로 인해 20세기 사회주의국가의 노동자조직은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조합과 상이한 발전과정을 경유했으며 위상과 역할에도 차이가 있었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조합은 보통 조합원의 사회?경제?정치적 지위 향상과 이해 및 요구를 실현하려는 임금노동자들의 자발적 조직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용자측과 협상, 국가에 대한 노동권리보호 요구,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한 연대활동, 노동정당 결성, 이해실현을 위한 쟁위행위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따라서 사용자 측인 자본가집단과 국가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가진다. 물론 남한의 박정희정권 시절과 같은 저발전 국가주도 경제체제에서는 정권에 종속된 어용노동조합이 제도화되기도 한다.

한편 20세기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조직은 혁명초기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통제라는 자주관리 노동자운동’이 총체적 저발전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미성숙, 사회주의국가 건설, 급속한 발전전략, 체제경쟁, 전위당에 의한 집중제 등 역사적 조건과 체제 발전전략에 종속되어 실패하면서 ‘전위당의 지도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연결고리(transmission-belt)’가 되었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생산력이 높은 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로서 사회주의체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라는 위상과 냉전 및 체제경쟁 하에서 선진자본주의를 추격하기 위한 급속한 중앙집중적 국가발전계획에 따라, ‘노동자의 이익=국가 이익’이 되었다. 즉 노동자조직이 전위당의 지도에 의한 국가정책을 실현하고, 생산력 증대를 위한 사회주의 경쟁운동을 조직하며, 사회주의적 인간개조 정책에 따라 노동자 생활을 관리 및 통제하는 국가기관화된 것이다.


3. 소련: ‘노동자통제운동’과 그 좌절

1917년 혁명과정에서 레닌은 ‘노동자통제운동(Worker's Control Movement)’을 강조했는데, 이때 통제란 억압이 아닌 직접 관리와 점검을 뜻했으며 노동자에 의한 완전한 생산조절과 분배를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 27일 ‘노동자 통제’ 법령이 공포된다. ‘생산과 생산물 분배의 모든 측면에서 노동자가 직접 결합’하는 것이다. ‘노동자 통제’ 제도는 당시 전위당인 볼셰비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공장노동자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제도로, 생산관리 분야를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통제하려는 운동을 말한다. ‘노동자 통제’가 대상으로 하는 분야는 ① 노동강도 문제를 중심으로 한 생산 및 작업과정의 자주적 통제운동, ② 직계? 위계와 관련된 인사권의 자주적 통제운동, ③ 가격? 투자 등 경영정책에 대한 자주적 통제운동이다.3)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형성되었던 ‘노동자통제운동’은 20세기 사회주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짜르 잔재와 선진자본주의의 정치군사적 위협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에네르기만큼 혼란했던 러시아 내부 정세 속에서, 혁명체제를 제도화하면서 러시아를 신세계(新世界)로서 인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독재 국가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소명은 반혁명세력에게 굴하지 않는 체제건설과 빈곤탈피라는 이중과제에 직면했다.

이 시기 소련을 중심으로 노동자조직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톰스키는 노동자조직을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율조직체로,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표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되는 대표적 주장은 트로츠키로 노동자조직은 노동자국가와 이해와 요구가 일치하기에, 생산성 향상과 노동자들이 국가정책에 충실하도록 하는 동원기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후 트로츠키와 레닌에 의해 제거된 소위 ‘노동자 반대파’ 그룹은 프롤레타리독재 체제가 노동자 조직화되어야 하며, 완전한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가 실현되는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초기 ‘노동자통제운동’을 강조했던 레닌은 체제건설과 빈곤탈피라는 이중과제에 직면하여, 노동자통제운동의 의의는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론 체제건설을 위한 노동자조직의 국가기관화를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 3-4월에 개최된 제9차 당대회와 1921년 3월 개최된 제10차 당대회에서 열띠게 토론되었던 노동자조직 성격과 역할 관련한 논쟁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한’ 레닌의 절충적 선택으로 마무리되었다.4)

당시 노동자통제운동의 좌절을 선도한 대표적 이론가는 트로츠키였다. 전(前) 사회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때문에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의식적 활동에 의한 프롤레타리아독재 체제’를 건설하려는 열망과 대내외적 위협 및 혼란은 노동자조직의 국가기관화 과정에 초기 원인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22년 10월 개최된 콤소몰 대회에서 ‘노동자집단의 조직화와 국가기관화’를 그의 연설에서 주장하였다. 저생산 및 저발전 사회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서’ 국가의 경제력과 자원의 집중, 중앙계획에 따른 노동력의 계획적이며 중앙집중적인 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건설을 위해 다수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노동자 조직으로 집단화되어야 하며,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 복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5)


4. 북한: 초기 자주결사 흐름

직맹은 1945년 11월 30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총국’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당시 약 20만 조합원으로 출발하였고 연령제한이나 상위기관 및 정치조직에 대한 종속성은 없었던 자발적 결사체였다. 그 후 소련군의 개입과 다양한 사회세력이 국가건설과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북조선로동총동맹으로 호칭되기 시작했으며, 1946년 5월 25일 북조선로동총동맹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강령확정과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6)

해방 후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자조직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일제시기 공업이 발달했던 북한지역 또한 다양한 노동자조직이 노동조합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1945년 9월 7일 황해도 노동자조직 결성, 10월 22일 각지 탄광노조 대표자회의 개최, 10월 23일 평안남도 광산노조 결성, 10월 28일 철도노조 결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주적인 결사 흐름 과정인 9월 26일 서울에서 10개 산별노조대표 51명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칭)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지역과 산별 움직임 속에서 1945년 11월 5-6일 서울에서 50만 조합원을 대표한 대의원 615명이 모여 노동자조직의 전국조직인 전평을 결성한다.7)

이러한 흐름에서 북한지역 조직화는 급속도로 이루어져 11월 하순에 각 산별 단일노조의 북조선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1월 30일 <전평북조선총국> 결성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14개 산별조직과 853개 분회를 갖춘 조합원 19만 6백여 명의 노동자조직이었다. 당시 이 대회에서 위원장 현창경과 31명의 위원을 선출하기도 했다.8)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도로 인텔리, 사무원들을 ‘직업동맹’으로 조직하려는 흐름이 존재했다. 구체적으로 11월 25일 평양문화인 직업동맹 결성, 12월 19일 북조선인민교원직업동맹 결성준비위원회 조직, 1946년 2월 2일 평양시 인민교원직업동맹이 결성되었다.9)

이러한 흐름이 하나로 조직되어 결성된 것이 1946년 5월 25일 결성된 북한지역의 『북조선직업총동맹』이다. 이때 노동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자본주의체제와 다른 노동자?농민의 체제라는 지향에 따른 것이며, 직업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노동, 특히 생산노동을 천시하는 사회문화적 풍토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5. 국가건설에 종속과 권력개입: 초기 ‘노동자권력 옹호론’의 좌절

해방 후 다양한 세력이 국가건설에 참여하면서 북한사회는 그 역동성만큼 정치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표현한다.

    지금 도처에서 각이한 세력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나타나 <혁명가>,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저마다 자기의 주의주장을 내세우고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하여 떠들고 있습니다. 어떤자들은 조선에 봉건제도를 되살려야 하다고 부르짖고 있으며 또 어떤자들은 부르죠아제도를 세워야 한다고 떠들고있습니다. 그뿐아니라 어떤자들은 우리 나라가 당장 사회주의의 길에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0)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세력은 지방에 정치공작원을 파견하며 당강화와 국가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11) 해방 후 여러 정치세력이 국가건설을 추진하였기에 세력간 갈등 원인은 건설될 국가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민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당을 부르주아 세력이라고 비판하였다.12)

그리고 새롭게 건설할 국가의 성격은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며, 수행과업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김일성은 국가건설 방법에 대해 1945년 10월 13일 각 도당 책임일군들 앞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민족자본가도 포함하여 모든 애국적 민주역량이 참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하며, 공산당원이 인민공화국 창건을 주도하여 대중을 지도하면서 대중적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13)

같은 날 김일성은 평양시내 각계 대표들이 베푼 환영연에서 국가건설을 위한 주요과업으로 민족간부 양성, 지식인 역할 강화, 정규군대 창건, 산업시설과 농촌 복구,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강화를 제기한다. 그리고 이 사업의 중심에는 “근로 대중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로동계급의 전투적 부대이며 선봉대”인 공산당이 있음을 역설하였다.14)

이어 김일성은 1945년 10월 18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주최한 환영연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선 “모든 사람들을 애국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켜야”한다고 주장하고,15) 11월 10일 평양철도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국가건설을 위한 노동자의 규율 강화를 강조한다.16) 그리고 11월 1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공산당원이 주도하는 민족통일전선 강화와 건국사업을 지시한다.17)

국가건설을 위한 대중 조직화 방법은 각계각층의 대중조직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당시 각 지역에는 여러 대중조직이 있었으나, 아직 중앙조직을 갖추진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공산당은 대중적이고 통일적인 노동조합, 농민조직, 여성조직, 청년조직 건설에 나선다.18) 그리고 이 활동을 주도할 지식인 역할을 강조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대중계몽과 조직화 사업, 그리고 민족주의 사상 교육이었다.19)

한편 국가건설을 위해선 구성원의 생활안정이 중요했다. 김일성은 1945년 11월 27일 신의주시 군중대회에서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개선하여야 국가건설이 가능함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공장?기업소 복구운영, 실업자구제, 식량문제 해결을 통한 노동자?사무원?교직원?학생들에게 정상적 식량배급, 물가안정 등을 과제로 제시한다. 또한 인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근본대책은 민주주의적 개혁들을 실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주개혁의 내용은 토지개혁, 주요 산업국유화, 단일하고 공정한 세납제와 노동자?사무원들에 대한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이었다.20) 그리고 새로운 지배방식을 보호하고, 대중 감시와 규율화를 위한 통제질서 구축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그 의의를 밝힌다.

    오늘 우리 앞에 나선 중요한 과업의 하나는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조성된 복잡한 정세와 일부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지금 사회질서가 문란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해방과 더불어 자유를 찾았지만 아직 사회질서가 혼란되여 응당 행사할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생활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질서를 문란시키는 불순분자들을 철저히 없애며 혼란된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사회질서를 세우는데서 보안기관의 역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안기관일군들속에서 인민들을 위협공갈하던 일제 경찰의 잔재를 뿌리빼고 인민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는 기풍을 세우기 위한 투쟁을 강화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보안기관으로 하여금 참말로 인민의 생명재산을 생활을 잘 보호할수 있는 기관으로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21)


그러나 국가건설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진 않았다. 소련군과 김일성주도의 북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당건설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은 청년학생22)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국가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와 노동자조직 관계’에 대한 대표적 갈등 사례로는 오기섭의 노동자권리 옹호론이 있다. 1946년 당시 선전부장에서 노동부장으로 좌천된 오기섭이 그 해 9월 『로동신문』에 게재한 ‘국가와 직업동맹에 대하여’를 통해, 국유화된 기업일지라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국가에 대한 노동자권리 보호를 제기하였다.23) 이에 대해 김일성은 1947년 3월 15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오기섭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권력 옹호론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국유화된 기업소의 지배인은 직업동맹에 들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그의 이러한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국유화된 기업소의 지배인은 국가에서 파견한 사람이며 인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투쟁하는 일군인것만큼 직업동맹에 들어야 할뿐아니라 그 조직내에서 응당 중요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오기섭은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계속 그릇된 리론을 내놓고있습니다.....그는 자기 글에서 우리나라의 국영기업소들에도 자본과 로동간에 계급적리익의 대립이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영기업소 지배인과 로동자들은 대립되는 관계에 있고 따라서 그들 사이에 투쟁이 있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론문》에서 로동자들과 인민정권기관사이에 마찰과 분쟁이 일어나면 직업동맹이 로동자들에게 최대한으로 유리하게 사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로동자들이 인민정권을 상대로 하여 투쟁하여야 한다는 반동적인 주장인것입니다. 그는 로동자들이 인민정권기관을 반대하여도 좋다고 하면서 직업동맹이 마치 로동자들과 인민정권기관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여주는 기관, 다시말하여 로동관계를 조정하는 기관인것처럼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민정권하에서의 직업동맹의 임무를 망각한 그릇된 주장입니다....오기섭은 이때까지 계속 그릇된 리론을 주장하여왔으며 건국사업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습니다. 그는 해방직후 상당한 기간 함경남도에서 좌경적인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건구사업에 혼란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안북도에 가서도 토지개혁사업을 옳게 지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에 평안북도에서 일어난 반동사건들은 오기섭의 과오와 적지 않게 관련되여있습니다. 그는 평안북도에 가서 토지개혁법령을 위반하고 《농촌위원회에서 승인만 하면 지주를 다른데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평안북도에서 복잡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고 또 그 배후에서 이전 지주들이 여러 가지 음모책동을 할수 있게 하는 주요한 조건으로 되고있습니다. 이번에 신문에 실린 오기섭의《론문》도 로동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봅니다. 각성되지 못한 일부 로동자들은 오기섭이 과거 혁명을 하였다고 하며 또 오늘 북조선인민위원회 로동국장으로 사업하고있는것만큼 그의 《론문》을 옳은 것으로 믿고 거기에 있는 그릇된 리론대로 행동하려 할수 있습니다.24)


이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스탈린체제를 모델로 인식하고 있던 김일성세력은 ‘생산력발전과 노동규율 강화를 관리하며 프롤레타리아 국가건설에 복무하는 노동자조직’이라는 사고를 하고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소련이나 중국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결과로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던 북한지역 내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소련군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김일성세력에 대한 직접적 저항을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한편으론 김일성세력이 직접적 저항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기섭의 노동력 권력 옹호론에 대처하는 김일성의 비판에 대한 오기섭의 대응과 이 사건에 대한 김일성의 처리 과정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오늘 회의에서 그는 자기의 《론문》에서 발로된 결함이 본의가 아닌것처럼 토론하였는데 그것은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론문》에 그릇된 리론이 한두곳에 있다면 혹시 실수하여 그렇게 된것이라고 볼수 있을는지 몰라도 《론문》의 전반적 내용이 그릇된 리론으로 일관되여있는데 어떠허게 실수라고 볼수 있겠습니까.25)


또한 직접적인 저항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장한 김일성세력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하부로 파장이 퍼지지 않도록 기민한 대처를 한다. 강력하고 급속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위해 권력지반의 동요를 신속히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한 당원이라면 또 과오를 고치려고 한다면 응당 당앞에서 자기비판을 하여야 합니다. 만일 오기섭이 결함을 접수하지 않고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잘못했다고 하는가 하는 관점을 가지고 비판을 회피하려 한다면 더 엄중한 과오를 범할 것이며 결국 발전하여나갈수 없을 것입니다. 결함을 비판하기 두려워하는 것은 소부르죠아적근성입니다. 오기섭은 자기의 과오를 어물어물해서 넘기려 하지 말고 결함을 다 내놓고 비판하여야 하며 그것을 깨끗이 고쳐야 합니다. 당과 직업동맹에서는 직맹사업에 대한 오기섭의 그릇된 리론을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여 하급단체들에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당단체들은 당원들과 직맹일군들 속에서 인민정권하에서의 직업동맹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해설사업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당원들과 직맹일군들이 직업동맹사업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고 일해나가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26)


오기섭이 46년 9월 18일 노동신문에서 “직업동맹은 노동자들의 유일조직체이기 때문에 끝까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이어야 한다. 지금 북반부에서는 경제산업기관들이 국유화되었지만 그 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은 역시 직업동맹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한다. 국유화된 산업경제기관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부질없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침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이 있으며 직업동맹은 그와 같은 직장과 투쟁하면서라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여야 한다”라는 국가권력에 대한 노동자조직 권력 옹호론을 제기한 것이다.27)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자조직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옹호했던 오기섭은 “직맹이 행정과 계약을 맺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기자신과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는 김일성의 비판과 함께 ‘개인영웅주의’에 물들어 있는 ‘종파주의자’로 몰려 1948년 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고 1958년 숙청되었다.28) 김일성의 주장은 “인민의 소유로 된 국영기업소에서는 자본과 노동간의 계급적 이익에서의 대립이란 있을 수 없으며 지배인과 노동자들 사이에 근본적으로 대립될 조건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29)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1948년 북한 국가체제 건설과 함께, 북한지역 내 ‘노동자조직 권력 옹호론’은 좌절되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직맹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북한 노동자조직인 직맹이 완전히 노동당의 외곽단체이며, 국가기관화된 것은 한국전쟁을 경과한 후 북한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자.





1)‘노동자의 생산도구화’란 구체적으로 볼셰비키 혁명 직후 시도되었던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운동(Worker's Control Movement)’에 대립되는 역사적 굴절을 지칭한다.


2)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북한경제통계자료집』, 1994, pp.68-69, 김병로, “조선직업총동맹 연구,” 이종석 외, 『북한의 근로단체 연구』, 세종연구소, 1998. p. 69.


3)Alec Nove저, 배왕규 역, 『소련경제사(1)』(명지: 1989), pp. 42-80. 박정진, 『북한의 생산정치와 노동자조직의 성격변화에 관한 연구』, 동국대 석사논문, 1996, p. 18. 류승호, 『독점자본주의하 노동자의 자주적 통제운동론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1988 참조.


4)차문석,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정책,”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학위논문, 1999, p.107.


5)Issac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Trotsky 1921-1929, Vintage Books: Oxford Univ. Press, 1959, pp.44-45.


6)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제1권, 자료18,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회의록”, p.136. 그리고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에서 남한 ‘조선노동조합평의회’와의 통합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51년 1월 20일 ‘남북조선 직업총동맹연합회의’를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북조선직업총동맹’과 남한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통합하여 현재의 ‘조선직업총동맹’에 이르고 있다. 이진순, “해방후 북한의 노동정책(1945-50)”,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9. p.23.


7)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선인, 2005.


8)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선인, 2005.


9)민주조선사, 『해방후 4년간 국내외 주요일지』, 평양: 1949, pp.15-27.


10)김일성, 위의 논문(김일성저작집2, 1979: 270)


11)김일성,「새 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과업」(김일성저작집1, 1979: 269-279)


12)김일성,「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김일성저작집1, 1979: 282)


13)김일성,「새 조선 건설과 민족통일 전선에 대하여」(김일성저작집1, 1979: 332-333)


14)김일성,「단결하여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자」(김일성저작집1, 1979: 339-345)


15)김일성,「새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우리의 과업」(김일성저작집1, 1979: 364)


16)김일성,「건국도상에 가로놓인 난관을 뚫고나가자」(김일성저작집1, 1979: 400-401)


17)김일성,「진정한 인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김일성저작집1, 1979: 406)


18)김일성, 위의 논문(김일성저작집1, 1979: 407-408)


19)김일성,「건국사업에서 인테리들 앞에 나서는 과업」(김일성저작집1, 1979: 422-427)


20)김일성,「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갈 것인가」(김일성저작집1, 1979: 456)


21)김일성, 위의 논문(김일성저작집1, 1979: 457)


22) 청년학생들과의 갈등 원인은 정치적 지향의 차이도 있었으나, 당시 청년학생 대부분이 지주나 소자본가의 자녀였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특히 평양남도는 이러한 경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따라서 1945년 11월 말 현재 국가건설의 주력부대가 되어야 할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 건설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청년학생들이 다양한 정당과 계급의 이해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세력투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공산당 주도의 국가건설에 반대했던 대규모 시위 중 대표적인 것은 ‘신의주 사건’이었다. 1945년 11월 23일 오후, 신의주에서 약 500~1000명 가량의 중학생들이 시위를 하였다. 핵심 요구사항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에서 배치한 중학교 교장들을 해임시키라는 것이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세력이 교육과 국가건설을 주도하는 것, 그리고 소련의 개입이 확장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 시위는 비무장 평화시위였으나 보안기관과 소련군대, 비밀경찰로 구성된 무장세력이 학생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때 약 24명의 학생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타 지역 반(反)공산주의와 반(反)소비에트 시위에 불을 당겼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김일성은 긴급히 신의주에 내려왔으며 정세를 살핀 후, 1945년 11월 27일 신의주 시민대회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당내 공산주의자로 위장한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 관청과 인민재판소에 이 사건을 회부하겠다며, 신의주 학생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였다. 이렇듯 기민한 그의 대응은 산발적인 대중시위를 잠재우고, 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청년조직 강화에 기여했다. Charles K. Armstrong,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N.Y, Cornell Univ., 2003, pp.63-64,99-106, 김일성,「애국적 청년들은 민주주의 기발아래 단결하라」(김일성저작집1, 1979: 439-441)


23)김병로,「조선직업총동맹연구」『북한의 근로단체 연구』(성남: 세종연구소, 1998), 91-92쪽.


24)김일성,「대중지도방법을 개선하며 올해 인민경제계획 수행을 성과적으로 보장할데 대하여」(김일성저작집3, 1979: 185-187)


25)(김일성저작집3, 1979: 185)


26)(김일성저작집3, 1979: 187-188)


27)김창순, 『북한오십년사』 (서울: 문지각, 1961), 108-109쪽.


28)김창순, 위의 책, 136쪽.


29)현동운, 박양엽,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을 영광의 한길로 이끄시여』, (평양 : 근로단체출판사, 1982), 133쪽.
덧붙이는 말

이 글의 원 제목은 '국가건설 과정에서 좌절된 20C 사회주의 노동자 자주결사' 입니다.

태그

북한 , 박영자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영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진보를 바라며..

    참세상 편집진의 재고를 요청합니다.

  • 들사람

    님이 경직된 반응을 보이시는 듯싶네요.. 사실 제목의 선정성 여할 떠나서, 통일(운동의 논리) 그 자체가 선인지 냉정히 따져야 할 국면이 된 건 분명하자나요?

  • 들사람

    굳이 어떻냐고 한다면, 선정적이라기보단 도발적이라 해야지 않을까싶군요.. 머, 한반도-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운동의 기조를 통일에서 탈분단으로 바꾸자는 이들에게야, 별로 도발적일 것도 없는 이야기겠습니다만.


  • 왕허접

    이글엔..구구절절..반론을..다는것..조차..사치다..그냥..애처롭고..불쌍할뿐이다..어찌..저리..무식할..수..있는가?

  • 흠..

    개발/. 노다지. 소비시장......그거뿐.....
    결국 그들에 의한 통일은 파괴, 차별, 불평등의 심화만 낳을뿐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