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눈물, 초패왕 항우 그리고 모택동

[백원담의 시와모택동](6) - 우미인아, 우미인아, 그대를 어찌해야 좋겠는가?

첸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를 보셨는가,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 혹은 장기판의 초楚·한漢 대국.

지금으로부터 2,207년 전 중국대륙에서 천하의 쟁패를 놓고 일어난 전쟁상황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다지만, 춘추전국시대 전국戰國 칠웅七雄들을 차례로 패퇴시키고 무력으로 잡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시황이 죽자 진승陳勝 등의 반란으로 대륙천지는 거대한 혼돈에 빠지고, 군웅들이 각지에서 궐기를 하는데, 초나라 장수였던 항우項羽(項籍)은 마침내 진을 멸망시킨 후 스스로 패왕覇王 곧 초패왕이라 명명하고 천하쟁패를 위해 대 군사집단을 이끌고 혼란 속을 내달았다. <사기史記〉에는 이 전쟁의 기록이 지리할 만큼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군웅들의 할거와 합종연횡, 무력과 지략, 백성들이 겪어야 할 참상은 차마 떠올리기 두려울 정도이다.

중국의 5세대 거장 감독 첸카이거는 그의 영화〈패왕별희〉에서 초패왕 항우를 스토우石頭, 돌대가리로 명명한다. 경극과 현실을 교직시킨 영화 속 재현 속에서, 세상의 변화이치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여 막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천하제패의 꿈도, 아름다운 애첩도 지키지 못한 무력한 위인으로. 그런데 사실상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鼎(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이는 큰 솥)을 들어올릴 만 했으며 재기가 범상치 않아 모두가 두려워하는 기개를 가진 인물이었다.

항우는 지금의 소주 蘇州(吳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오중은 강남의 요충지 회계땅의 중심지로 진시황이 회계군을 유람하고 절강을 건널 때 아버지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할 수 있으리라”고 포부를 내보이기도 했다. 항우는 유방과 공모와 대립 속에서 5년 가까이 천하제패를 쟁투하였다.

  경극 <패왕별희>에서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 결의장면

이 두 영웅의 천하쟁패를 다투던 전쟁의 종국은 항우가 유방과 홍구鴻溝를 중심으로 서쪽은 한나라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 땅으로 반분하기로 약조하고, 유방의 부모처자를 돌려보낸 뒤, 유방이 장량과 진평의 말을 듣고 지친 항우의 군대를 공략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유방은 한신과 팽월의 힘을 얻어 항우의 군대를 해하垓河(지금의 中國 安徽省 靈壁縣 동남쪽)에서 포위하게 되는데 이 때 유방의 부하 장량은 초나라 군대의 사방에서 초나라의 구슬픈 노래를 한나라 군사와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다.

초나라 노래가 사방에서 들리자(四面楚歌) 초땅이 이미 유방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생각한 항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이미 초나라 땅을 모두 얻었단 말이냐.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리도 많을꼬!” 항우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을 돌아보며 전의를 상실, 장중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에게는 우虞라는 미인이 있었는데, 항상 총애를 받으며 시종하였다. 또 추騶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이 말을 타고 다녔다. 항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비통한 심정으로 이렇게 시를 읊었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뒤덮을만 한데.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기개세
시운(時運)이 불리하여 추騶 또한 나아가지 않네. 時不利兮騶不逝시불리혜추불서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우미인아, 우미인아, 그대를 어찌해야 좋겠는가?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경극 패왕별희에서 우미인의 자진 직전 마지막 검무 장면

오늘날 전해지는 해하가垓河歌가 그것으로, 항우가 여러 차례 이 노래를 되풀이하자 이에 우희는 “대왕이 의기조차 다했는데 제가 구차히 살아서 더 무엇하리오”, 하고 화답하고는 항우의 칼을 뽑아 자진하였다(후대 송나라 증공曾鞏은 ‘우미인의 피가 변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가 되었다’는 시를 남겼다). 우희의 자진과 항우의 피눈물, 좌중이 모두 통탄에 빠져있을 즈음, 항우는 돌연 말에 올라타 마지막 전의를 불사른다. 뒤따르는 휘하 장사 8000명, 그들은 그날 밤 포위를 뚫고 남족으로 질주, 회수를 건넜으나 농부의 말에 속아 큰 늪(大澤), 곧 함정에 빠지고 만다. 유방의 군사는 추격해오고, 겨우 28기만이 남은 군사를 둘러보며 항우는 한탄하였다.

내 군사를 일으킨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 전투를 벌여, 맞선 적은 격파시키고 공격한 적은 굴복시켜 일찍이 패배를 몰랐고, 마침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결국 이곳에서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로다. 오늘 내 정녕 결사의 각오로 통쾌히 싸워서 기필코 세 차례 승리하여,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 끝내 그대들에게 알게 하겠노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이윽고 항우는 파죽지세로 말을 달려 적군들을 참살하며 자신의 저력을 내보였다. 이어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는데, 오강의 정장이 항우에게 강동으로 건너가 작은 땅이지만 그곳의 왕이 되어 지배할 것을 촉구하니, 항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무얼 하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의 젊은이 8,000명과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준 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그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우는 정장에게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애마 추를 주고 혼자서 한나라 군사 수백명을 죽이고는 온몸에 부상을 입고, 이전에 부하였던 적장 앞에 섰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나의 머리를 천금과 만호의 읍邑으로 사려고 한다 하니,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리라.”

항후는 곧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유방의 부하들이 서로 항우의 몸을 쟁탈하고자 하니, 항우의 몸은 다섯 조각이 났고, 그들은 항우의 몸을 맞추어 유방 앞으로 가지고 갔다. 유방은 이들에게 각각 봉토를 나누어주고 각 지방의 제후로 봉했다. 한편 유방은 항우를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노공을 봉직받은 땅 곡성에 안장하고 초패왕 항우를을 위해서 흐느끼며 떠났다 한다. 천하제패를 눈 앞에 두고 배반에 죽어간 항우, <사기>의 말미에 사마천은 항우를 두고 이렇게 적는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삼지 아니하며, 패왕의 공업이라고 하고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 하다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에서 죽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책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끝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는 말로 핑계를 삼았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마천은 특이하게도 항우의 일대기를 세계世系와 년대 순으로 중국 제왕들의 일을 기록한 본기편(황제黃帝로부터 전설적인 중국의 다섯 제왕을 서술한 오제본기五帝本紀,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고대 왕조 각각 본기, 진나라의 진본기·진시황본기, 이어 사마천이 살았던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기술)에 넣어두었다.

사마천은 항우가 진말의 대세를 틈타 민간에서 흥기하여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천하를 분할하여 왕·후를 봉하고 모든 정치명령이 항우에게서 나왔으며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한 점, 천자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에 이른 것만으로도 근고 이래 없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였으니, 항우를 황제들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한나라의 사관이었던 사마천이 한나라건국의 걸림돌이었던 항우를 유방 한고조의 앞에 위치시켜 놓았다는 사실이다.

항우와 달리 유방이 덕과 지혜로 천하를 거머쥔 것으로 묘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면 항우의 패왕적 형상을 각인시킴으로써 후대에 경계심을 일깨우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러나 사마천은 항우본기에 분명하게도 유방이 자신을 살려주었던 항우와의 약조를 저버리고 전투태세를 전혀 갖추지 않은 귀로 중의 항우를 공략하여 천하를 얻을 수 있었음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한 왕조의 흥기와 관련하여 천통天統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역사가로서의 사마천, 그에게 있어서 천통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천명天命과 천통, 천명을 승계할 수 있는 정통성으로서의 천통, 중국은 고래로 천하를 통치하는 것의 가장 최고의 형태를 성인에 의한 행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무위정치無爲政治에 두었고, 차선으로 훌륭한 군왕에 의한 왕도정치, 덕德의 정치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 왕권에 이르는 길, 천하를 얻는 길은 물론 민을 얻는 것이다.

천통을 얻었다 함은 백성의 뜻을 정치삼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마천은 한나라의 건국으로 시작되는 중국 봉건 왕조가 어떤 도덕적 후과가 아니라 권모술수와 배반 등 냉엄한 권력을 향한 쟁투, 그 승과 패의 갈림길을 선명히 증언함으로써 이후의 과제, 올바른 통치질서의 구축은 바로 이 천통의 문제를 어떻게 안느냐에 달려있음을 제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사마천식 역사쓰기에서 그 선명한 대비의 미학은 그 권력의 쟁취를 둘러싼 갈림길, 항우의 실패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에서 칼끝처럼 빛난다. 그러나 사마천 서사미학의 진경은 그 순간의 착지가 아니라 미래 국가건설과 운영의 실제적 과정 위에 푯대처럼 꼿꼿이 역사의 거울(鑑史)을 들이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천통은 천운의 소산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과제임을.

모택동은 1962년 1월 중국공산당확대중앙공작회의 상에서 민주집중제를 이야기하면서 전 당에 항우의 실패한 일생을 일깨웠다. 각급 지도자들이 서초패왕 항우처럼 스스로 패왕으로 칭하며 대중 위에 군림하는 패왕=독재자의 형상을 닮아서는 안되며 지도자의 존재양식은 아래로부터 민주의 실현에 의해 의견을 집중하고, 그것에 의해 새로운 사회주의건설의 전략과 방침 등을 조정하고 현실화해가는 것임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이 항우의 실패를 거론한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그것은 간단한 역사회고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당시 확대중앙공작회의에 모인 사람은 7천명에 달했다. 인민공사, 대약진의 실패 이후 정치적 실각. 모택동은 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경제프로그램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인식 속에서 소련식 경제모델에 대한 문제와 함께 내부에서 농민의 소외와 관료주의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모택동의 대책방안은 하나, 그는 긴 연설문 내내 지속적으로 민주집중제문제를 꺼내든다.

혁명 승리 이후 사회주의건설에 접어들면서 모택동의 지속된 고민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실현이었다. 그것은 수십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생산력의 제고문제와 사회주의혁명의 지속이라는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이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이 실현해야 할 중심과제였지만, 두 가지의 동시 실현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 50년대 전반에 걸쳐서 생산력의 확충과 그를 위한 기술관료중심사회의 강화가 농민의 사회적 지위하락과 농업생산력의 전취全取로 결과되는 가운데 사회적 불평등과 관료주의의 심화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노정해오고 있었다.

모택동은 이의 문제를 반우파투쟁·인민공사·대약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경제적 기획으로 가져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혁명기획의 계속된 실패에 따라 60년대 초반은 유소기의 노선 하에 사회전반에서의 회복기미가 두드러졌고 이로써 모택동주의자들의 입지는 극도로 약화되고 있었다. 모택동은 스스로 쇄신을 토로하였다.

계속되는 경제개혁의 실패로 한껏 위상이 좁혀진 모택동은 7,000명이 모이는 확대중앙공작회의에서의 연설이라는 주어진 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약진 이후 당에 만연한 관료주의 방식과 행동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시하며 호된 비판을 가했다. 모택동의 강화는 시작부터 회의방식의 민주적 과정에 대해 역설한다. 유소기와 다른 동지들이 준비한 보고원고를 중앙정치국에서 먼저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모택동의 제의에 따라 대회에 참가한 전원에게 먼저 보고원고를 나누어주어 토론하고 의견을 내게 하는 8일 간의 토론과 수정기간을 거쳐 유소기와 당 지도자들이 다시 아래로부터 논의된 결과를 가지고 보고문을 재작성하는 형식의 개변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민주집중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이 하층에 근접하였고, 그런 점에서 중앙의 지도자들보다 현실정황과 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이 중앙에서 제기한 기본방침 외에 많은 의견을 제출하여 현실에 걸맞는 사업방침을 정하는 아래로부터의 경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민주집중제란 선민주와 후집중, 대중으로부터 나오고 대중으로 돌아가는 것, 지도자와 대중의 상호결합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민주란 정책결정의 추진력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아래로부터 올 것인가 하향식 명령에서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회의형식으로부터 현실의 민주집중제확충의 필요성을 갈파한 모택동은 이어서 유소기 등이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초레닌주의적으로, 극단적인 중앙집권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에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동지들이 맑스·레닌이 말한 민주집중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혁명성을 상실했다는 것, 무엇보다 대중노선의 원칙을 방기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이런 나쁜 태도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당 관료제의 기둥인 성·지구·현 당 위원회의 제1서기들도 있었다. 모택동은 이들을 민주집중제의 반장이 아니라 스스로 ‘패자覇’라고 하는 부류라고 단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 패왕 항우를 끌어들이는데, 항우는 도무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했고, 그에게는 측근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가장 믿었던 한 사람 범증의 말조차도 의심하고 듣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패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여식기가 유방을 찾아왔던 이야기를 비견하면서 유방의 경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새겨듣고 취함으로써 천하를 쟁패할 수 있었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리고는 항우의 필패를 형상화한 <패왕별희>의 경극을 떠올리면서 초패왕처럼 사랑하는 애첩과도 이별할 것이냐, 유방처럼 천하를 얻을 것이냐를 묻는다. 그때 모인 7,000명의 웃음소리.

  하급간부들에 둘러싸인 모택동

새로운 정치국면의 창신, 그 웃음소리를 유발해내기까지 모택동이 집중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관료주의 작풍에 의해 마비된 사회가 아니라 생기발랄한 대중적 자발성을 이끌어내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이루어가는 새로운 정치국면을 열어내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또한 당의 고위급에서 자신을 비롯한 소수파의 위치를 염두에 두면서 그 권리를 변호해나가고자 하였다. “종종 소수의 의견이 맞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역사상 허다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하라.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은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쫓겨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모택동은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로 연설을 마쳤다.

고전시들을 독파하곤 했던 모택동은 항우의 해하가 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다른 사람이 내는 (다양한)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다.’ 초패왕 항우의 실패를 직시했던 모택동, 그렇다면 그는 한나라를 일으켰던 최후의 승자, 유방이었을까. 물론 모택동은 자신을 고전인물 특히 봉건적 인물에 대비시키는 것을 꺼려했다. 만일 사마천이었다면 모택동을 과연 어떻게 각인해내었을까. 모택동은 주어진 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를 일으켜간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으니, 사마천이라면 아마 그를 민란을 이끌어 수천년 봉건 중국의 전제지배를 타파하고 근대중국을 일으킨 사회혁명의 영도자로 형상해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혁의 마지막 고지에서 예기치 않은 배반의 칼을 받은 모택동, 유방의 급습으로 무너져간 항우의 최후의 결전 같은 문화대혁명으로의 질주, 그 예정된 몰락. 사마천이라면 그 역사적 파열의 긴장을 어떻게 포착하여, 파란의 대서사를 응결지었을까.

초패왕 항우는 자신은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하늘이 자신을 돌보지 않아 어쩔 수 없노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역시 최선을 다했다. 측근들의 지략을 수용, 항우와의 맹약을 저버리고, 항우의 귀로를 공략했던 유방,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청취함으로써 권력을 거머쥐고, 그로서 건국 이후에도 새로운 봉건제국의 기틀을 닦아나갔다던 그의 유난히 큰 귀, 그러나 그 큰 귀의 실질은 삼국지의 세 패자覇者 중 하나인 유비劉備의 끝내 실패한 형상에서 오롯이 확인되는 바이다. 큰 귀와 민주집중제, 유방과 모택동의 그것은 그 수천년의 시간차만큼이나 본질과 지향이 다르다.

승자 유방이 한나라, 한족의 대 중화세계, 동아시아의 보편을 이루는 수천년 봉건전제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그러나 그 봉건중국은 중국의 문호 노신이 서구적 근대의 문턱에서 그토록 저주했던 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유교윤리로 사람을 잡아먹었던 식인의 나라에 다름 아니었다. 모택동은 노신의 절망, 전근대적 지배체제의 유지·온존을 혁명으로 타파한 장본이고, 상하신분질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민주의 실현을 통한 평등세상의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 국가권력의 주체적 구성을 고뇌해갔다. 봉건중국은 모택동식 반자본주의적 근대기획으로 타파되었지만 새로운 사회주의적 근대의 실현에서 모택동은 항우처럼 맹약을 저버린 내부의 반란에 절규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역사해석과 현실돌파력, 고육지책과도 같은 토로와 강력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주집중제의 실현제안은 그의 정치적 실각과 강고한 관료주의 팽배분위기 속에서 당의 정책과 실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62년 모택동의 또다른 문제제기로 당정사회에 정풍운동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미 깊어진 문제의 골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택동의 현실적 좌절은 이후 문화대혁명의 파고를 야기하였고, 모택동과 현대중국은 지금까지도 그 문제적 심연을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다. 당시 모택동의 깊은 심사가 헤아려져서 일까, 1920년 모택동이 쓴 항우의 애첩 우희, 우미인이란 곡조에 맞추어 쓴 <베갯머리에서 (虞美人, 枕上, 1920年秋)> 라는 제목의 시가 물처럼 스며 흘러 가슴을 적신다.

베개 위로 쌓여오나니 근심은 어떤 형상인지 堆來枕上愁何狀,
강과 바다에서는 파랑이 일고. 江海翻波浪.
밤은 길고 하늘빛은 어찌 밝기 어려운가, 夜長天色怎難明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일어나 가벼운 한기 속에 앉았네. 無奈披衣起坐薄寒中.

새벽이 오니 온갖 상념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曉來百念皆灰燼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데, 몸은 그렇지 않고. 倦極身無恁
갈고리 같은 잔월은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一勾殘月向西流
이 바람에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구나. 對此不抛眼淚無由


청년 모택동의 수심의 눈물이라, 40년 뒤 노구를 누윈 베갯머리에서 다시 흐르는 모택동의 눈물과 시름이 잔월처럼 황해 위를 흘러 떠오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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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샘

    1921년 모택동이 부인 양개혜를 생각하며 쓴 시를 20년 청년 모택동의 혁명 관련 시로 해석 오버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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