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소녀, 소수자-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걷는다

[에뿌키라의 장정일기](3) - 군산시 대야면에서

또 하루의 태양이 떠오른다. 책상 앞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따사로운 봄햇살에 어느새 살결도 제법 그을린 듯. 그러나 내리 쪼이는 햇살에 익어가는 것은 살결만이 아닐 것이다. 햇살 차곡차곡 담아 곡식이 영글고, 걸으면서 던지는 우리들의 질문 또한 농익어가겠지.

대장정 3일째. 오늘 하루도 힘찬 결의로 시작했지만, 그간 쌓인 피로는 슬슬 우리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발을 절룩이는 사람도 있고 숨이 가빠오는 사람도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아스팔트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내가 왜 걷고 있는지도 잊어버리곤 한다. 오직 이 길을 다 걸어야 오늘 하루 몸을 누일 곳에 도착하겠지라는 생각뿐.


그러다 옆의 친구가 외치는 구호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다.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한미 FTA 반대, 투쟁!” 또 다른 친구들은 노래를 불러 기운을 북돋는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빨간 자전거가 직접 곡과 가사를 지은 대장정의 주제곡이다.

거기에 ‘민중시인’ 고추장이 새로운 가사를 덧붙여 어느덧 가사가 10절에 이르렀다. “새만금에 둑을 터라~백합조개도 함께 외친다” “산을 헐어 바다 메우는 죽음의 행진 당장 멈춰라~” “만물 죽이는 자본이냐~만물 하나된 생명이냐~” 여럿이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축 쳐졌던 발걸음에도 다시 힘이 붙는다. 함께 걷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해답을 찾는 건 각자의 몫이라 해도, 함께 품었던 질문을 잊지 않는 것, 이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또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함께 걷는 친구들 덕분이다.

하루를 꼬박 걸어 드디어 군산시 대야면에 도착했다. 농민분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그분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온다는 우리들을 며칠이고 손꼽아 기다리셨단다. “서울에서 온 젊은이들, 그리도 고마워”라고 손수 쓰신 글을 나눠주시는 분, 아무 것도 준비 못해 미안하다며 수건 세 장을 수줍게 건네시는 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농약을 거의 쓰지 않고 키웠다는 쌀을 선물하신 분... 그분들 이마에 짙게 패인 주름살만큼이나 깊은 정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가만히 놔둬도 더 이상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농촌을 왜 기어코 죽이려고만 하는 건지..” 한 농민분의 탄식이다. 개발독재 이래로 산업화의 뒷전으로 밀려났던 농민들은 이제 한미 FTA로 다시 한 번 결정적인 희생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 측(미국국제무역위원회, USITC)의 발표로도 FTA로 인한 한국의 농업생산량 감소는 최대 44%에 이를 것이라 한다. 물론 정부는 농업을 포기하는 대신 1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거라고 장담한다. 그나마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겠지만.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60줄의 농민들이 과연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우리를 눈멀게 해온 경제성장률 몇 %, 국민총생산 몇 만 불이라는 추상적 수치들. 그러나 그런 수치들은 우리네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 수치가 누구의 희생을 바탕으로 누구의 주머니를 불렸는지, 그렇게 늘어난 수치로 과연 우리 삶의 질이 높아졌는지, 그리하여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행복해졌는지... 그렇기에 이제 소수자들이 말하고 있다. 나의 삶과는 무관한, 아니 심지어 내 삶을 희생시키고 파괴하는 '전체'의 이익이란 단지 허상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있다.

물길이 끊겨 썩어가는 갯벌 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새만금의 조개가,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겹겹이 둘러친 철조망 안에서 앙상하게 여위어가는 대추리의 보리가, 단지 최소한의 활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온몸 굴려 건너야 했던 중증장애인들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국민'총생산량을 키워가면서도 정작 '국민'은커녕 인간으로도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그리고 이곳 대야면의 농민들이...

이 목소리들은 여럿이면서 또 하나다. 자신들 생존도 위태로운 마당에 새만금 방조제로 갯벌을 잃은 계화도 어민들을 걱정하고 저 멀리 대추리 농민들 일을 제 일처럼 분노하는 이곳 농민들에게서, 모든 소수자들이 서로 친구임을 배운다. FTA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선물이라고 했던 한 농민활동가의 말씀도 이런 뜻이었다. 한미 FTA라는 재앙이 이 여러 흐름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이제 머지않아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이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서로를 증폭시켜 큰 함성을 이루리라. 그래서 우린 걷는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곳곳에서 웅성이는 소수자-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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