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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나눈 18명 이라크인들의 이야기

[한상진의 레바논통신](10) - 이라크는 매일 "지옥"

어제 아프간에서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자살폭탄공격으로 한국군 한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BBC에서 들었습니다. BBC에서는 정확한 내용을 볼 수 없어서 오늘 이곳 피시방에서 뉴스를 확인하였습니다. 사고가 아닌 공격으로 죽은 첫 번째 한국군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번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는 탈레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는 체니를 대신해서 죽었더군요. 즉각적인 한국군의 철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피해자는 더 많아질 것입니다. 아프간 뿐 아니라 이라크에서 그리고 레바논에서도...

그리고 피해자 늘어 가면 한국군도 직접 적(?)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무고한 희생 뿐 아니라 무고한(?) 살인자까지도 양성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서둘러 한국군의 철군이 이뤄질 수 있도록 3.17 반전 행동에도 많이 참여해 주시고 한국군 철군과 미군 점령 종식을 위한 여러 운동에 힘들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시리아에서 머물고 있는 미국인 평화운동가 친구가 이라크인 친구와 함께 시리아에서 머물고 있는 이라크인들 십 수 명을 인터뷰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글 번역해서 보냅니다.

다음의 이야기들은 2007년 1월 중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많은 이라크인이 살고 있는 인근 지역의 길모퉁이에서 이뤄진 대화들이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친구, 동료, 평화와 인권을 위한 단체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이 이야기들을 나누기를 바란다.


"A" 30대 초반

3일전에 이라크에서 시리아에 도착했다. 나는 내 집과 내 차를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 나는 순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들이 순니라는 이유로 내 이웃에 살고 있는 가족을 죽이도록 마흐디 군에 신고하였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고, 내 가족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신께 감사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직 두렵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아마도 이번 달 말까지 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바그다드에서의 생활은 전기가 들어오면 TV를 보고, 전기가 나가면 친구와 앉아서 대화하고, 또 대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미국에 가고 싶으냐고? 미국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다루고 있는지를 봐라. 거기서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곳 다마스커스에서 한동안 머물려고 한다. 만약 이라크 상황이 호전되면 나는 이라크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

"B" 약 45세

나는 6개월 전에 바그다드에서 왔다. 내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하다. 그들의 학교가 IED(사제폭발물)_에 의해서 목표물이 되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미친 것처럼 모든 곳을 달려 다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단지 아이들이 무사한지만을 보고 싶었다. 내가 아이들을 발견했고 그들이 무사함을 알았을 때 나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준 신께 감사를 드렸다. 나는 다른 IDE가 그들을 데려가도록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시리아로 가는 버스표 4장을 샀다. 우리 모두는 향수병을 앓고 있다. 우리는 이라크가 나은 장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미국에 갈수만 있다면 가고 싶지만, 아마도 비자를 얻기는 힘들 것이고 거기서 사는 것 역시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서 조지부시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이 내 나라를 파괴했다.”

"C" 약 22세

바그다드의 내 집이 알 수 없는 그룹에 의해 폭발 당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이유를 모른다. 일부는 말하기를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일부는 말하기를 내가 시아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내가 그 지역에서 떠나서 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는 내 집에서 머물려고 했지만 파괴되었고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나는 지금 여기 시리아에 있다. 하지만 세상에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은 내나라 이라크의 내 집이다. 나는 거기에 가고 싶고 미군이 떠난 것을 보고 싶다. 우리는 미국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의 군대는 싫어한다.

"D" 약 26세

나는 팔레스타인인이지만 내 모든 인생을 이라크에서 살았다. 이라크인은 시리아에 들어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 팔레스타인인이 시리아에 들어오기 위한 비자를 얻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이라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직도 죽어가고 있다. 어떤 나라도 그들에게 비자를 주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 뒤에 숨어있는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 모두를 하나씩 끝내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바그다드의 팔레스타인 캠프에서는 매일 최소한 두 명에서 8명이 메흐디 군에 의해서 죽어간다. 나도 자동차 폭발로 부상을 입었고, 몇 차례의 죽음의 위협을 당했고, 일거리가 없고, 치안이 없고, 전기도 없다. 나는 내가 이라크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하루 종일이라도 읊을 수 있다. 언제 이런 것들이 끝날 것인가? 어제 차량폭탄으로 70명이 넘는 바그다드 대학의 학생들이 죽었다. 그리고 100명이 넘게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만약 열 혹은 백만의 이라크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어도 누가 신경을 쓰는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미국을 좋아했지만, 만약 내가 거기 갔다면, 그들이 나를 좋게 대해줄지 모르겠다. 이라크에서 그들로부터 온 것을 그리고 그들이 한 짓을 본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들이 우리가 영화에서 본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E" 약 30살

내 이웃들이 내 가족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바그다드를 떠났다. 거기서 4번의 자동차 폭탄 폭발이 있었다. 나는 내 가족이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고 내가 부모님을 보러 갈 때 혹은 거리에 있는 가게에 갈 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고 상황이 너무 복잡하여 예를 들면 검문소가 만약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리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뉴스에서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때, 내가 이라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척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나는 미국에 가고 싶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리워서 내 집에 먼저 돌아갈 계획이다. 나는 친구들이 그립고 내가 살던 거리가 그립다.

"F" 나이 30 대 중반

8개월 전에 이라크를 떠났다. 남편이 살해를 당했고 이 세상에서 남은 유일한 것인 내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범죄자들이 내 남편의 차를 훔치고 그를 죽였고, 그가 죽고 난 다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아이가 셋이고 내 남편이 죽고 난 후 이들 살인자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 가족들까지 끝내고자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라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나를 정부에 대해서 가장 화나게 만드는 것은 남편이 경찰 검문소에서 불과 200피트 떨어진 곳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G"

나는 이곳에 거의 일 년 전에 왔다. 나는 바그다드에서 생존을 할 여유가 없었고 내가 가진 직업은 대단히 위험한 직업이었다. 이 위험한 직업은 이발사였다. 이발사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음을 당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내게는 가족이 있고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일을 계속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손님들도 머리를 자르러 오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 이발사를 죽이러 온 사람들이 가게 전체에 총질을 해대서 손님들까지 죽는 일이 몇 차례에 걸쳐 발생하여 손님들까지도 이발소에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가고 싶으냐고? 물론, 모두들 거기에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내 고국이 무척 그립다.

"H"

이라크는 지금 한마디로 묘사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지옥” 매일 모든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 내 남편은 미군의 침량과정에서 폭격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다.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니이고, 이라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순니이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순니의 리스트 첫 번째에 올라가 있다. 이라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합해서 15,0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들은 작년에 그 중 5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왜 이라크를 떠났느냐고 묻고 있다.

"I" 40대 초반의 여성

전에 내 삶은 매우 좋았다. 나는 내 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남편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 후 도서관의 내 직장으로 출근을 하였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우리는 바그다드의 매번 다른 장소로 소풍을 가거나 식당에 가거나 “롤러 코스터 시티”에 가거나 동물원에 가거나 했었다. 내 인생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웠다. 전쟁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정말로 끔찍했다. 바그다드는 위험한 장소가 되기 시작했고, 특히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자동차 폭탄은 특히 그랬다. 그리고 미군은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체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오랫동안 아무런 이유 없이 가두어 놓았다. 내 형제와 시동생이 부카 캠프에 재판 없이 16개월 동안 갖혀 있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이라크인이 재판 없이 1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시기가 지난 후 새로운 시기가 왔다. 우리의 정체성이 죽음을 당했다. 만약 당신이 순니라면 시아그룹에게 체포를 당해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신이 시아라면 순니에게 체포를 당할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이런 일은 정말로 없었다. 믿어 달라. 이것들은 전쟁과 함께 왔다. 남성과 여성, 시아와 순니를 불문하고 어떤 이라크 사람에게든 이런 살인에 관해서 물어보라. 그들은 시아가 순니를 죽이고 순니가 시아를 죽이는 것은 미국의 창작품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라크를 떠났다. 그들은 거기서 고생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중 하나를 잃는 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라크에서 여성은 그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권리가 없다.

"J" 50대 중반의 남성

미군이 이라크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가게를 운영했다. 나는 그때의 내 인생을 사랑했지만,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 이라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인생의 일부를 돌려받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나는 내 가게와 내 아들을 자동차 폭탄 폭발로 잃었다. 나는 내 아들을 잃어서 슬프지만 동시에 아이들 중 하나를 잃은 모든 부모들 때문에 더욱 슬프다. 이라크 정부는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고, 이라크 정부와 미국인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 되어 그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단지 돈을 위해서 이라크인의 피를 빨고 사람들을 죽여서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여생을 슬픔에 젖어서 살도록 하는 이런 짓을 언제 끝낼 것인가?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을 허용한 이 세상에
더 이상 법은 없다. 나는 늙었고 나는 이 생애에 더 이상 커다란 애착은 없다. 나는 매일 모스크에 가곤 했지만, 지난 2년간 모스크는 위험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미국인들이 습격하여 거기서 기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미국인에게 체포당할 두려움 없이 모스크에 갈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든 내 아들의 영혼과 이 전쟁에서 죽은 모든 이라크인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신은 이라크를 돕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할 것이다.

"K" 30대 후반의 남성

내 인생은 다른 이라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내 유일한 문제는 나는 시아이고 그래서 간단한 일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내 형제는 남부의 봉기에서 사담 후세인의 군대에 의해서 처형을 당했다. 나는 사담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군인들을 동원해서 죽인 그런 방법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사담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나도 죽였고, 내 가족들의 미래까지도 죽여 버렸다. 전쟁 이후에 내 인생은 무척 힘들어졌다. 모든 것이 비싸졌고 내 수입은 내 가족이 소비하는 가스, 물, 전기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했다. 우리는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라크를 떠났다. 하지만 내가 이곳으로 오도록 압박한 진짜 이유는 매흐디군이 내가 시아이기에 내가 그들의 군에 결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이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지만, 어느 날 문에서 만약 내가 그들에게 결합하지 않을 경우 나와 내 가족을 죽일 것이라고 쓰인 종이를 발견하였다. 나는 이것을 믿지 않았지만, 내 시아 친구도 똑같은 종이를 받았다. 그도 역시 믿지 않았고 일주일 후에 그와 그의 형제 그리고 아버지까지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그들의 집 앞에 매달려졌다. 나는 신이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겁이 나서 내 부모님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3일 후에, 나는 내 작은 가족들만을 데리고 시리아로 떠났다. 나는 집과 차가 있었다. 나는 집을 짓기 위해서 3년을 일했고 차를 사기 위해서 5년을 일했다. 지금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이도시를 좋아하고 사람들도 우리에게 잘 대해준다. 하지만 비록 내가 전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집은 항상 집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내 집과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그리고 바그다드의 내 거리가 그립다.

"L" 40대 초반의 남성

내 인생은 대단히 좋았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나는 아들이 둘 있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내게 모든 것이다. 나는 재산이 있어서 이것을 세를 주었고 그래서 나는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내 아들들은 말을 좋아해서 나는 매주 아이들을 데리고 말을 타러 갔었다. . 나는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로 이라크를 떠났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누가 내 가족들을 돌보고 먹여 살리겠는가? 나는 죽음의 위협을 두 번 당했고, 바그다드에서는 이러한 위협을 무시할 수 없다. 그중 하나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죽이고 당신과 함께 사는 모두를 죽일 것이다.” 두 번째 노트는 말하기를 “우리는 만약 당신이 30,000달러를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 가족의 생명의 용서의 대가로 지불한다면 당신을 용서할 것이다.”나는 이것을 읽고 웃었고 그리고 시리아로 떠났다. 나는 그들이 강도이지 종교그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라크가 언젠가는 바로잡힐 것을 바라고 내가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아니라면, 내 생각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거기서 환영을 받겠는가? 그들이 우리가 세계무역센터 파괴에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을 것인가? 비자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미국인들이 우리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만 한다. 그들이 우리를 존중할 것인가 아닌가?

"M" 젊은 여성

전쟁 전에 내가 연극을 무척 좋아해서 내 친구와 나는 극장에 자주 갔다. 그리고 우리는 걸어서 집까지 돌아왔다. 하지만 전쟁 이후 이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우리가 가는 유일한 극장은 우리 꿈속에 있다. 미군은 들어와서 우리 모든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들은 와서 말하기를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가져온 것은 공포뿐이다. 나는 내 가족이나 내 친구들이 죽는 모습을 서서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이라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인생 전체를 단 한 방울의 피도 보지 않고 살았었다. 그리고 전쟁 후에 나는 피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 피는 나의 사람들 것이었다. 이라크에서는 매일 이세상의 누구나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미국인들에 관해서는, 나는 우리를 아주 나쁘게 취급하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내 친척 중 한사람이 미군에 의해 수감되었고 우리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린존에 갔었다. 그곳의 군인들은 우리들을 마치 동물처럼 취급했지만, 우리는 한 인권단체를 만났고 그들은 우리 친척을 찾는 일에 우리를 돕고자 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마치 천사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미국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미국 정부와 민간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N" 27살의 남성

우리는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은 있었지만 최소한 치안은 있었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우리는 잘 수 있었다. 우리는 전쟁 전엔 어딘가를 가곤 했었지만 지금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집이다. 나는 거리에서 담배를 팔았었고, 나중에 가족들의 도움을 조금 받아서 차를 한 대 사서 택시 영업을 했었다. 전쟁 후에 차를 도둑맞았고, 그래서 나는 미군 및 KBR과 함께 일해야만 했으며, 그러자 나는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이곳 시리아의 사람들은 대단히 친절하고 우리에게 잘 대해준다. 나는 이라크가 더 나은 곳이 되어서 우리가 이곳 시리아 사람들을 우리나라로 초대하여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 가고 싶고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에 관해서 그리고 지금 그들의 정부가 단지 파괴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 이라크에 관해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고 싶다.

"O" 34살의 남성

전쟁 전에 사담은 바그다드에서 시아사람들의 전통에 많은 제약을 가했다. 나는 단순한 삶을 살았었다. 나는 식료품 가게를 가지고 있었고, 수입은 괜찮았었다. 하지만 침략 후에, 모든 곳에서 미군들의 존재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고, 가게 주인인 내게는 많은 문제들을 안게 되었다. 이라크인과 미국인을 구별하지 않는 폭탄과 같은 것들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곳 시리아의 모든 이라크인은 이라크를 떠나야만 할 이유를 갖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들의 집을 떠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시아이기 때문에 만약 메흐디군에 결합하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벌주겠다고 하는 위협을 받았다.

"P" 42세의 여성

전쟁 전에 내게 바그다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령의 도시가 되었고, 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자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죽음을 당한 그들의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지금현재 울부짖고 있다. 나는 3년 전에 내 남편의 차가 미군 탱크와 충돌하여 파괴되었을 때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이런 금속 괴물에게 다시는 충돌당하지 않기 위해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룻밤 만에 모든 것을 두고 떠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지만 얼마 후 우리 아이들이 학교엘 갈 수 있게 되었고, 남편은 좋은 직장을 찾았다. 현재 우리는 많은 시리아인 친구들이 있지만 바그다드에 있는 내 친구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함께 했었는가 생각할 때 마다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나는 지금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꿀 뿐이다.


다음은 사람들이 이라크를 떠날 수 있도록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여권발급 사무실 밖에서 이뤄진 면담들이다.

"AA" 40대 초반의 여성, 4자녀의 어머니

나는 내가 지금 여기 서있는 첫 번째 50명의 명단 안에 들어가기 위해 여기서 내 작은 아기를 돌보면서 밤을 새웠다. 만약 내가 첫 번째 50명의 명단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나는 여권을 얻을 기회를 상실할 것이고 명단 안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6개월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정부는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바그다드의 각 지역마다 정해진 날짜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지역별로 한 바퀴 도는데 6개월이 걸린다. 왜 내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내가, 내가 모르는 다른 나라로 가기를 바라는가? 만약 당신에게 아이가 있다면 당신은 그들을 잃을까 두려울 것이다. 내 두 형제가 성묘(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의 모스크 폭발사고인 듯)에서의 사고로 죽었고 두 명이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이것이 이유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가?

"BB" 20대 초반의 부부

내 아내와 나는 50명의 명단에 들어갔다. 그것이 내가 여권 부서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밤을 샌 이유이다. 우리는 쓰레기 근처에서 잠을 잤다. 거기는 파리들이 날아다니고 끔찍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그룹이 내 자매를 납치했고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우리는 그 돈을 만들 수 없었고 그들은 그녀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 나는 그런 일이 내 아내에게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비록 내가 굶주림으로 이라크 밖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이 매일 밤낮으로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한상진 활동가 후원계좌 하나은행773-910053-98605, 제일은행250-20-440303, 국민은행063301-04-054340, 농협205035-56-033336 예금주: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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