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적 제약자본의 독점에 맞서야 할 때

[진보논평] 태국 의약품 강제실시의 교훈

진보전략회의(준)는 한국사회 주요 전략아젠다에 대한 진보적 정책생산을 목표로 모인 연구자, 활동가들의 전략네트워크이다. 사회운동의 통합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운동과 운동을 이어주고 지역, 부문, 현장에서 운동기획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전략회의(준) 회원들이 주요한 사안에 대해 발표하는 '진보논평'을 민중언론참세상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태국의 의약품 강제실시 옹호를 위한 국제공동행동

올해 1월 태국정부는 혈전치료제 플라빅스(사노피-아벤티스 社)와 에이즈치료제 에파비렌즈(머크 社), 칼레트라(애보트 社)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하였다. 더 이상 비싼 특허약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값싼 복제약을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의약품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ing)’는 특허권자외의 제3자에게 특허권의 사용을 허락하는 것으로, 특허의약품의 복제약을 생산, 공급할 수 있는 조치이다. 강제실시는 태국 특허법뿐만 아니라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상으로도 합법적 조치이다.

초국적제약회사들과 미국정부는 태국정부에게 강제실시를 철회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특히 2차 에이즈치료제 칼레트라에 대한 특허권을 갖고 있는 애보트는 태국의 강제실시를 무력화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애보트는 3월초에 강제실시를 철회하지 않으면 태국에서 7가지 치료제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애보트가 판매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치료제 중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상온보관할 수 있는 칼레트라이다.

기존의 칼레트라는 냉장보관을 해야하는데 아프리카나 태국처럼 더운 기후의 지역에서는 냉장보관용 칼레트라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의사들과 에이즈환자들이 상온보관용 칼레트라를 만들것을 촉구하여, 애보트는 현재 상온보관용 칼레트라를 선진국에 연간 7740달러, 45개 중간소득국가에 연간 2200달러,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및 최빈국에 연간 500달러에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태국정부가 강제실시를 철회하지 않고, 인도제약사 시플라(Cipla)에서 상온보관용 칼레트라의 복제약을 연간 1560달러에 공급하겠다고 하자(4월 1일) 애보트사는 40여개국에서 연간 2200달러에서 1000달러로 인하하고 공급지역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4월 10일). 애보트는 태국의 강제실시가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협정)에 위반되고, 애보트의 칼레트라가 세상에서 제일 싸며, 복제약의 품질은 저열하다고 공세를 펼치고 있다.

태국의 HIV/AIDS감염인과 농민, FTA를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태국에서의 첫 번째 강제실시가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애보트 보이콧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애보트 주주총회 하루전날인 4월 26일에 영국, 프랑스, 미국, 인도, 독일, 스위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케냐, 싱가포르, 뉴질랜드, 호주,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 애보트 앞에서 항의시위, 항의서한 전달 등의 국제공동행동을 진행했다. 한국에서도 백혈병환우회, HIV/AIDS감염인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세상네트워크, 의료연대회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사회진보연대, 정보공유연대 등에서 4월 26일에 한국애보트사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가격인하가 아니라 초국적 제약회사의 독점을 파괴해야

애보트의 가격인하 발표는 지금까지 에이즈환자들을 대상으로 환자 일인당 연간 1200달러만큼의 폭리를 취해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초국적 제약회사가 신약연구개발을 위해 특허권이 강화되어야하고 비싼 약가는 당연하다고 주장해왔던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연 2200달러를 내지 못해 죽어간 에이즈환자들의 생명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더욱이 애보트의 가격인하는 독점을 유지하기위한 임시방편의 조치일 뿐이다. 강제실시가 철회되고 독점이 유지되면 애보트가 과거에 에이즈치료제 노비르의 약값을 갑자기 5배 인상했듯이 애보트 마음대로 약값을 인상할 수 있고 공급을 중단시킬 수 있다. 강제실시는 의약품 가격을 깎는 효과만이 아니라 초국적제약사들이 의약품독점을 빌미로 약가를 마음대로 올리는 조치를 예방하고 환자에게 의약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기때문이다. 애보트의 가격인하에 만족할 것인지, 애보트의 독점을 파괴할 것인지는 이번 투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문제이다.

에이즈치료제 확보를 위한 노력

초국적제약자본에 맞서 에이즈환자들이 주체로 먼저 나서게 된 이유는 에이즈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질병이고 인종차별, 성차별, 빈곤, 성소수자차별이 에이즈확산의 주원인이라는데 있다. 전 세계에 4천만명이 넘는 HIV/AIDS감염인이 있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각하여 에이즈환자들은 각종 차별에 노출되어있고, 에이즈치료제의 개발과 공급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적이다. 본격적으로 에이즈치료제를 사용하게 된 것은 1995년부터이고, WTO출범시기와 같다. 에이즈치료제 대부분 특허가 있고, BMS, GSK, 로슈, 머크, 베링거인겔하임, 애보트, 길리어드, 화이자 등 몇몇 초국적제약회사가 주도하고 있다. 치료제가 개발되었지만 초국적제약회사의 독점으로 인해 약값이 비싸서 하루에 8000명의 에이즈환자가 사망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에이즈로 인해 평균수명이 30세전후로 떨어졌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에이즈치료제의 개발과 공급은 국제사회, 정부, 환자 모두 각각의 이유에서 필요했다.

1990년대 중반 브라질 정부가 에이즈치료제를 공공제약사를 통해 직접 생산하여 공급함으로써 1차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독점파괴와 가격경쟁이 시작되었다. 2000년 8월기준 스타부딘, 라미부딘, 네비라핀의 연간 환자당 비용을 비교해보면 오리지널 의약품 비용은 10,439달러이고, 브라질에서 공급한 복제약 비용은 2,767달러였다. 2001년 1월 오리지널 의약품을 공급하는 초국적제약사는 브라질의 복제약만큼 가격을 인하하였다. 그리고 2001년 2월에 인도제약사 시플라가 350달러에 공급하였고, 2003년 4월 인도제약사 헤테로가 201달러에 공급하는 등 복제약 경쟁이 지속되면서 2005년 2월 기준 오리지널 의약품 비용은 562달러, 헤테로사의 복제약 비용은 168달러로 인하되었다. 5년에 걸쳐 오리지널 의약품 비용은 약 18배 인하되었고, 복제약도 약 16배 인하되었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2001~2006년에 걸쳐 브라질에서 생산되지 않는 에이즈치료제에 대해 초국적제약회사를 상대로 강제실시하겠다는 발표만으로도 가격인하 협상을 이끌어내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짐바브웨, 잠비아, 가나, 모잠비크 등에서는 이들 국가의 경제상황과 에이즈의 급속한 확산 때문에 2002~2005년사이에 1차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하였다.

태국 HIV/AIDS감염인들의 의약품 접근권 투쟁

1998년 태국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는 과도한 의약품 가격이 공중보건의 이해에 반할 경우 강제실시를 촉구하도록 권고했고, 태국국영제약회사GPO(Government Pharmaceutical Organization)는 에이즈치료제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를 통해 싸게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미무역대표부와 미제약협회는 강제실시 폐지,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 폐지,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감시강화, 독점보호기간 연장을 요구하였다. 또한, 태국의 최대 해외 무역품인 보석의 미국 시장 진출을 줄이겠다는 위협과 함께, 목재와 보석의 미국 수출품에 대한 관세를 깎아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결국 2000년 1월 태국정부는 에이즈치료제를 포함하여 필수의약품의 강제실시는 제한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를 거절했다.

그러나 태국의 에이즈환자와 활동가들은 미국의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미국의 압력에 대항하고, 스스로 강제실시청구를 했을 뿐 아니라 초국적제약회사 BMS와 태국지적재산권부(DIP)를 상대로 특허법위반소송과 특허권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의 살고자 하는 열망과 지속적인 투쟁은 2004년 2월에 BMS가 에이즈치료제 디다노신에 대한 특허권을 태국에 양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존의 두가지 치료제를 혼합했을 뿐인 에이즈치료제 콤비드에 대해 특허권반대투쟁을 지속하여 2006년 8월에 GSK가 콤비드에 대한 특허권을 전 세계에서 포기하게 만들었다. 미태FTA협상을 실제로 중단시키게 만들었고, 에이즈치료제 뿐만아니라 다른 치료제에 대해서도 강제실시를 하게 만들었다.

태국 강제실시를 옹호해야하는 이유

태국의 강제실시는 2차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독점을 파괴한 첫 번째 사례로써 애보트와 인도제약사간에 경쟁을 하게 만들었다. 1995년 본격적인 에이즈치료를 시작한 이래 10년이 넘게 지나면서 1차 치료제에 대한 내성과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태국, 브라질 등 국가에이즈치료프로그램을 통해 무상공급을 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내성과 부작용을 해결하기위해 2차 치료제 공급으로 관심이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개발도상국에서 2차 에이즈치료제는 1차 치료제에 비해 14배 이상 비싸다. 브라질만 2000년 이후에 출시된 2차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가격협상을 진행한 바 있으나 독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브라질 정부는 제약회사가 가격을 인하하도록 만든 후 강제실시를 철회했다.

두 번째로, 혈전치료제 플라빅스에 대한 강제실시는 개도국에서 에이즈치료제 외의 의약품에 대한 독점을 파괴한 첫 사례로서, 더 많은 의약품에 강제실시를 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에이즈치료제외에 강제실시가 청구되거나 요구되었던 치료제는 글리벡, 플라빅스, 타미플루 등이 있다. 대만에서 조류독감에 사용하는 타미플루에 대한 강제실시가 실행되었으나 로슈의 공급량이 부족할경우로 한정되었고, 나머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초국적제약회사와 미국정부가 의약품 강제실시에 대한 조건을 국가비상사태나 응급상황으로 제한하여 거의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압력에 맞섰다는데 의미가 있다. 2001년 WTO각료회의에서 아프리카의 국가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정부는 ‘TRIPS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문’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도하선언문은 “TRIPS협정 중 그 어떠한 것도 회원국들이 각국의 공중보건과 관련된 조치들을 채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회원국에게 강제실시권이 있고 그 조건을 결정할 권한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강제실시의 발동조건을 제한하려는 초국적제약회사와 미국정부의 압력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유럽, 캐나다정부가 강제실시를 발동한 사례가 많으면서도 개도국에서의 강제실시에 대해서는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무역보복을 가해왔다. 태국의 강제실시는 도하선언문의 취지를 실행한 사례이다.

네 번째로, 태국의 강제실시는 태국만이 아니라 40개 이상의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애보트가 40여개국에 칼레트라의 가격을 절반이상 인하하게 되었고, 애보트와 인도제약사간의 경쟁이 진행될수록 앞으로 가격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브라질정부도 에파비렌즈에 대한 강제실시를 고려하게 되었다.

태국 HIV/AIDS감염인들의 투쟁의 교훈

태국에서의 의약품 접근권 투쟁과정은 글리벡 투쟁을 경험하고 한미FTA타결을 맞이한 우리에게는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의미는 태국의 에이즈환자들이 초국적제약자본의 독점에 파열구를 낸 당당한 주체였다는 점이며, 오랜 투쟁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일주체로 자리매김을 했다는데 있다. 이들은 제약사의 선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언제든지 공급의 불안정성을 담보해야하는 약가인하전술이 아니라 안정적인 생산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초국적제약회사의 독점을 파괴할 수 있는 투쟁전술을 택했다. 글리벡과 마찬가지로 의약품 개발에 있어서 공적부문의 공헌을 특허권이라는 수단을 통해(혹은 특허권을 제약자본에게 유리하게 남용함으로써) 독점이윤을 창출하려한 초국적제약사의 횡포를 꺾어낸 것은 에이즈환자와 활동가들의 승리이다.

백혈병환자든 에이즈환자든 간염환자든 태국에 살건 미국에 살건 초국적제약회사앞에 선 환자의 처지는 같다는 인식을 가지고 질병과 국경을 넘어선 연대투쟁을 벌여야한다. 초국적제약회사의 무대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이기 때문에 국내적 수준의 투쟁뿐만 아니라 초국적 제약회사에 대항하는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디다노신 강제실시를 못하게 하려던 미국정부에 대항하기위해 태국활동가들과 미국활동가들이 연대한 사례와 애보트의 횡포에 맞서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했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이런 투쟁의 성과는 그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콤비드의 경우처럼 태국과 인도의 활동가들이 특허권 반대투쟁으로 모든 국가에서 콤비드 특허가 취소되도록 만들었고, 칼레트라 역시 40여개국의 개발도상국에서 가격인하와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한편 초국적제약회사가 공을 들이고 있는 한국이나 선진국시장에서 초국적제약회사의 독점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투쟁전략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초국적제약회사의 독점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한 경험은 대부분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쟁취한 것들이다. 콤비드의 특허가 취소되었고 애보트가 칼레트라의 가격을 인하했지만, 이는 OECD가입국인 한국이나 선진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초국적제약회사는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을 시장으로서는 포기하고 선진국에서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초국적제약회사가 이윤의 크기에 따라 시장으로서의 매력을 판단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이 전체 의약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적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환자들의 투쟁이 거세지면 그제서야 초국적제약회사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가격을 내리거나 특허권을 양도하기도 하지만 실은 이윤을 조금 줄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한국이나 미국처럼 특허권을 맹신하는 정부는 제약회사의 독점을 옹호하기위해 환자의 주머니를 터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진보전략회의(준)05.03]
덧붙이는 말

권미란님은 공공의약센터 활동가로 진보전략회의(준)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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