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지금 길을 내고 있습니다”

[연정의 바보같은사랑](4) - 금속노조 5차 중집 날, 기륭전자분회 집회

5월 10일, 금속노조 5기 5차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다. 10시간 동안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투쟁 문제가 논의되었다. 합의안 폐기와 책임자 처벌 문제 등을 놓고 중집위원, 참관인, 하청지회, 지부, 지역본부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논의를 하던 11일 오전 7시 경,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발언하십시오. 어떻게 정리하면 좋겠습니까? 수석(부위원장) 사과로 끝냅시다. 그렇게 해도 되겠죠? 사과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시간 휴회로 아직도 잠이 덜 깬 중집 위원들과 참관인들 앞에서 금소노조 정갑득 위원장은 이렇게 말하고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이른바 ‘날치기 통과’였다. 참관인들의 문제제기로 ‘날치기’는 철회되고, 하청지회 문제는 중집을 다시 열어 재논의 하기로 했다. 역시 참관인들의 요구로 하청지회 위로금 배분을 금속노조에서 보류 요청하기로 했다.
“제 목숨 줄까예?”
“목숨을 뭐 할라고 줘? 살아서 싸워야지.”
‘날치기 통과’를 항의하는 한 노동자에게 정갑득 위원장은 살아서 싸우라고 했다.
금속노조 5기 5차 중집이 5월 16일 오전 9시, 대전동구청소년수련원에서 속회될 예정이다. 이 날, 하청지회 문제와 함께 장투 집중투쟁에 관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길을 내는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는 그런 날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 주]


요즘 장투 동지들의 화두

5월 10일 오후, 영등포역에서 수원행 전철을 탔다. 낯익은 오렌지 빛이 보인다. 기륭전자분회 동지들이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대게는 같은 목적지를 가다가 경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몇 번 경험하다보니 이젠 크게 놀래지도 않는다.

  전철 안에서 만난 기륭분회 동지들

“연정 기자는 삼성 비정규직 집회 왜 안 왔어? 거기 기자들 많이 왔는데...”
“다른 기자들 많이 왔으면 됐죠. 저는 금속노조 갔다 왔어요.”

기륭 동지들은 더 말이 없다. 내가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에 다녀오는 줄 알기 때문이다. 요즘 장투 동지들, 특히 금속 사업장 동지들의 화두는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투쟁이다. 게다가 어제 이젠텍 집회에 참석한 이후 고민의 무게가 좀 더 늘어났다. 요즘처럼 “현장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마음 아프게 다가올 때가 없다.

마을버스에서 내리자 기륭동지들이 충남슈퍼로 들어간다. 점심을 못 먹은 조합원들이 빵을 고른다. 2년 동안 드나들던 가게인데, 오늘은 현재 주인이 마지막 영업을 하는 날이라 한다. 주인 아저씨가 하드 하나 씩을 선물로 준다. 언젠가 조합원 생일 날 축하한다며 와인 한 병을 챙겨 주던 일이 생각난다. 천막 농성장 주변 바뀐 간판들과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6백 여 일의 시간을 말해준다.

“가슴 아프다는 말을 할 뻔 했습니다...”

기륭전자 앞에 도착하니 가수 김성만 선배가 음향 설치를 하고 있다. 르네상스 동지들은 “왜 맨 날 기륭만 가요?” 하고 기륭 동지들은 “왜 맨 날 르네상스만 가요?” 한다면서 은근슬쩍 인기를 자랑하는 성만 선배가 오늘은 발전기에 바퀴를 달아주었다. 그동안 집회 때마다 2~3명 씩 달라붙어 옮기느라 애를 먹이던 발전기를 한 명이 술술 밀고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만 선배는 기륭투쟁 초기에 기륭동지들의 컨셉인 오렌지 빛 조끼를 창안해서 선물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연대동지들이 오기 시작한다. 천지, 하이텍, 시그, 르네상스, 금천구위원회, 남부노동상담센터,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 덤프연대 서남지부, 전해투, 선경오피스텔, IT산업노조, 학습지노조, 신나는세상, 채널 만호, 서울대․고대․성균관대․중앙대 학생들이 함께 한다. 기륭 집회에서 보기 드문 정규직인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동지들도 함께 했다. 오늘은 멀리 현대차전주 비정규직지회 김형우 지회장도 참석을 했다. 어제 평택 집회를 한 이젠텍 동지들도 도착했다. 참, 얼마 전 만기 출소한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박정훈 지회장과 조합원들이 일정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참석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꼭 전해 달라 했다. 그래도 빈 자리가 곳곳에 보인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테트라팩 동지들이 ‘먹고 튀는 테트라팩’이 큼지막하게 써있는 차에서 내린다.

김소연 분회장이 대회사를 한다. 5월 하순 힘 있는 투쟁을 통해 기륭전자를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오게 하겠다고 한다. 작년 여름, 기륭 동지들의 한 달 간의 단식을 통해 어렵게 교섭 물꼬를 텄다. 그러나 사측은 노조 일상 활동을 갖고 교섭을 거부했고, 어느덧 반 년이 넘었다.

김형우 지회장은 자기를 죽여도 충성하는 개가 되지 말자며 개에 관한 이야기를 두 가지 한다. 금속노조가 산별이 되면서 커졌는데, 오히려 노동자들은 불안해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테트라팩 동지들은 오늘 오전 9시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보지 않은 여주 공장을 폐쇄하는데 60일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체 노동자 110명 중에 22명이 남았다. 지금 자신들이 후퇴하면 얼마 남지 않은 정규직도 모두 비정규직이 될 거라며 “질긴 자가 승리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했다.


“가슴 아프다는 말을 할 뻔 했습니다...”
사회를 보던 미영이는 자꾸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 동지들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그 시간, 하청지회 동지들을 생각하는 것은 미영이 만이 아니었다. 여름 날씨처럼 뜨거운 햇볕 아래 집회 분위기는 평화롭기만 하지만, 자리에 앉아 힘차게 팔뚝질을 하는 동지들의 눈동자에서 문득문득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미영이는 미안한지 느닷없이 기륭분회 집회용품을 소개한다. 밥그릇과 꽹과리에 이어 오십리 걷기 때 호루라기 하나가 더 생겼다고...

“여기서 투쟁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집회 내내 큰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했던 이젠텍분회 이선자 부분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어제 이젠텍 집회가 끝난 후 참석했던 이들이 탄 관광버스가 한 대 두 대 떠날 때였다. 참석자들이 길바닥에 벗어두고 간 우비를 정리하던 이젠텍분회 한 조합원의 쓸쓸해보이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발언하고 있는 이젠텍분회 이선자 부분회장

  5월 9일 금속노조 이젠텍 집회가 끝난 후 우비를 정리하고 있는 이젠텍분회 조합원

“어제 15만 금속노조 확대간부 결의대회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2005년 10월에 분회설립을 하고, 1년 6개월 동안 싸워왔습니다. 우리 분회에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작년에 재정사업 때문에 안산 사업장에 갔다가 정년퇴임을 하는 10여 분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저는 ‘투쟁을 잘 해서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까지 투쟁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서 투쟁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어제 우리 분회의 한 동지가 장기투쟁 동지들은 길을 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길을 내고 있습니다. 이젠텍, 기륭, 테트라팩, 현자 전주비정규직지회... 우리는 지금 길을 내고 있습니다. 10년, 20년 30년, 우리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길을 내고 있습니다. 열심히 투쟁해서 우리 조합원들이 정말 노동자로 대우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어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15만 금속노동자들의 보호 속에 있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당사자들이 투쟁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체이기 때문에 보호 받으려 한다면 이젠텍 투쟁은 없습니다. ‘우리 여기서 끝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설 때 투쟁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투쟁해서 승리하는 투쟁을 만들겠습니다.”

102만 7천 3백 원

집회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특별한(?) 투쟁기금 전달식이 진행되었다. 며칠 전, 기륭투쟁에 연대하는 성균관대 노동문제연구회 학생들이 대동제 기간 중에 기륭투쟁 승리를 위한 일일주점을 열었다. 오늘, 그 수익금을 전달하게 된 것이다.

“맨 처음 왔을 때, 장투 사업장이라 우울한 분위기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와서 보니 밝고 명랑하셔서 기륭 투쟁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을 했습니다. 주점을 열심히 해서 하루 동안 투쟁기금도 번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 없던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알려냈던 것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노동문제연구회 김태승 회장이 이야기를 한다.

  대동제 기간 중에 일일주점을 해서 투쟁기금을 전달하는 성균관대노동문제연구회 김태승 회장과 김소연 분회장

“투쟁기금(금액)을 말해도 되나요? 은근히 자랑하고 싶습니다.”
“하하~ 네!!!”
“102만 7천 3백 원 입니다. 투쟁 열심히 하시고 긴요한 곳에 써 주십시오.”

연대 동지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김태승 회장이 금액을 공개하고, 김소연 분회장에게 전달한다. 김소연 분회장이 조합원들보다 음식을 더 잘 만들더라며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주점에 다녀온 조합원들은 학생들이 주점에서 모금함까지 돌리는 것을 보고 민망함과 고마움, 미안함이 교차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지만, 집회장은 연대의 온기로 여전히 따스하다.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여기서 내 할일을 하라”
“자, 길을 갑시다.”

성만 선배가 노래 <길>을 부른다. 어제 이젠텍 앞에서도 불렀던 노래다.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나는 안다. 이 길의 역사를. 길은 내 앞에 놓여있다. 여기서 내 할일을 하라. 허나 어쩌랴 길은 가야하고 죽창 들고 나섰던 이 길. 가자 또 가자 모든 것 주인 되는 길 오 해방이여”

  언제나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노래하는 노동자 김성만

성만 선배가 막간을 이용해 <비정규직차별철폐가>가 테트라팩 동지들의 수련회에 가서 만든 노래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돌아가리라>를 부른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집회가 끝난 후, 현수막을 찢은 천에 소원을 적어 공장 앞에 매다는 상징의식을 했다.

  소원을 적고 있는 테트라팩 노동자들

  나부끼는 장투 동지들의 소원


“투쟁없이 쟁취없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비정규직 철폐”, “기륭투쟁 반드시 승리하자”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원들이다. 집회에 참석한 동지들이 열심히 소원을 적고 전봇대에 올라가 새 천을 단 줄을 메어준다. 작년 8월 회사 앞 노숙투쟁 때 걸었던 천들은 때가 묻고 빛이 바래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새 천이 매달리니 보기 좋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기륭 집중집회의 마무리는 <비정규직철폐연대가>와 함성이다. 상쾌한 봄날 초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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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차려

    비정규직이 싫으면 600일이나 데모 하지 말고 그 기간에 집에 가서 공부해...너덜 눈에는 중고생때 묵묵히 참으면서 공부한 사람은 개 거지로 보이냐? 돈 처 들여 대학가고 학비 모자라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하면서 졸업한 사람은 뭘로 보이냐고? 600일이나 일 안하고 데모할수 있는 지경이면 집도 잘 사는가보네...나는 한달만 안해도 우리집 거덜 나는데...그러니 정상적인 노동자로 안보일밖에..

  • 윗분

    기사에 나온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다시 생각해보길 바랄뿐

  • 구로공단

    글쓰는 꼬라지 보니 정신차릴려면 아직 멀었구나
    정신을 놓고 있으니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꾸 헛소리만 지껄이지
    쯔쯔..빨리 제정신 차리길 바란다. 불쌍한 넘

  • 세상참나원

    박사 ,석사, 교수들이 너보다 못해서 계약직 비정규직이냐 이한심한 인간아
    너같은 인간이 한국을 다벼려 놨어 귀신들은 뭐하나 저런인간들 다안잡아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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