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돈들을, 그 돈의 배경이 되는 조건들인 학력을 쫓아가는 삶에 젖어 있어서인지 잘 팔리는 작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저 선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 선망의 시선을 깨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그래야만 작가다. 내 작품 얼마나 팔렸다는 것을 자랑하는 작가는 봤어도, 많이 팔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많이 팔려서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조심스러워 하는 작가를 나는 보지 못했다.
기존의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글을 쓰는 것, 그것이 사실은 ‘작가’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많은 돈과 고학력과 좋은 집과 좋은 음식과 좋은 배필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문제의식 없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아니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삶을 살아갈 때, 작가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가.
▲ 소설가 공선옥 [출처: 오도엽] |
작가는 장사꾼이 아니다
보통의 선량한 시민이란 그러나 누구인가. 소위 주류담론을 생산해 내고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왜 힘겨운가, 자신을 힘겹게 하는 구조에 대한 물음은 물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을 힘겹게 하는 구조에 대한 물음 대신 힘겨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을 힘겹게 하는 구조에 대한 물음을 묻는 대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신 우리가, 우리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대신 물어줘야 한다.
물어주기는커녕 그 구조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작가의 이득은 기실, 부당이득이요, 양심불량의 이익이다. 그는 이미 작가가 아니면서 작가소리를 듣고 있고 그럼에도 자신의 작가호칭에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작가는 장사꾼이 아니다.
상업주의 다시 말해 돈 만능주의에 절여진 사회에서 그렇게 돈 만능주의에 절여져 있는 사람만이 정상적인 삶으로 치부되고 있는 세상에서 진정한 작가가 취해야 할 포지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노동자에겐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없는가
그러나 포지션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 번째는 싸워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돈은 사람의 영혼을 분열시킨다. 돈과 돈을 가진 자본가는 노동과 노동자를 돈으로 분열시킨다.
현대차노조가 한미 에프티에이 반대 파업을 벌였다. 정치파업이란다. 대통령은 대통령도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권리가 있다고 헌법소원까지 냈다. 그런데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대통령만 있고 노동자에게는 없는가.
노동자는 맨날 임금 얼마 인상 건만을 가지고 파업해야 하는가? 먹을것 더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애나 짐승취급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은 그가 대통령이든, 자본가든, 노동자든, 어린아이든,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까지에 사고하고 동참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으니까 사람이다.
노동자들이 정치파업을 하고 있다, 라고 여론을 선동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정치파업을 할 수도 있는 ‘숭고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폭력적 언설이다.
노동자가 파업이라는 형태로 겨우 표현할 수 있는 한계란 언제나, 고용불안정, 임금동결건, 해고라는 경제주의에 국한된 선에서만이라야 하는가. 그러나 기실은 생존권조차도 짓뭉개는 현실임에랴.
폭력에 맞선 저항의 문학
정치권력은 물리적 폭력이다. 그러나 자본권력은 홍세화씨도 말했듯이 부드러운 폭력이다. 부드러워서 더 노회한 폭력이다. 80년대 리얼리즘이 물리적 폭력 앞에서 저항한 문학이었다면 이제 이천년대의 리얼리즘은 부드럽고 노회한, 그래서 더 치명적인 폭력의 폭력성을 간파하고 드러내고 저항하는 문학이어야 한다.
에프티에이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체제가 그나마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는 우리민중공동체를 어떻게 파괴시키고 있는가. 멕시코, 브라질 농민들의 예를 보듯이, 제나고 자란 땅에서 소박한 꿈을 일구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것이 자유무역체제다.
신자유주의체제란 오직 돈, 자본만이 자유를 누리는 체제다. 작가는, 이유라곤 오직 힘이 없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소박한 삶과 꿈이 산산조각 나는 삶을 강요받는 우리의 인간가족들을 위해 글로써 싸워야 한다.
자본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정치권력이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본이 먼저 간파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자본가의 가방 든든한 빽이고 자본가는 정치권력의 가장 든든한 동지다.
최근의 이랜드사태를 보라. 악용할 소지가 있는 법을 만들어놓고 자본가가 그것을 악용했다. 악용할 소지가 있는 법을 만든 ‘원죄’가 있어서일까.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중 어느 누구도 악용된 법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의 한사람들인 노동자들에게 악용될 소지가 있는 법을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지금 노동자인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정치권력을 가진 그래서 악용의 소지를 제공한 자들 중 어느 누구도 악용될 소지 없는 법을 만들자는 소리 하지 않는다. 법을 악용한 자본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합법적으로 법을 악용한 자본가 대신 불법적으로 권리를 주장한 노동자들에게 연행, 구금 ,실형선고, 손배소라는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다시 리얼리즘을 생각한다
자, 현실은 이렇다. 후안무치한 인간들이 정치와 돈으로 권력을 잡고서 힘없는 민중들에게 호령한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그래서 다시 리얼리즘을 생각한다. 진정한 리얼리즘정신이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문학인가? 그나마 있는 그대로의 현실조차도 외면하는 문학이 문학의 모든 것으로 되어 있는 작금인지라 단순히 현실을 반영한 문학이 리얼리즘문학이 될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리얼리즘문학이란 완강한 현실이라는 표피를 뚫고 들어가 현실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캐내는 문학이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리그’를 위한 장치들을 법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좋아하는 배부른 자들의 토대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쓰기도 목이 터져 버릴 것 같고(피가 들끓어서) 손도 빠개질 것 같아서 그만 쓰기로 한다. 대신 말하고 싶다. 자본의 달콤한 유혹 앞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큰 핸디캡인 돈이 어떻게 우리의 인간성을, 우리의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고 파괴시키는지를 우리는 글로써 고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자면 좀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