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은 대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내빼는 것은 퇴각이 아니다. 질서 있는 퇴각을 위해서는 후방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했다. “비록 미미할지라도 한국사회당을 지지해왔던 분들에게 이번 총선에서 선택지를 주는 것이 정치적 도리”라고도 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최광은 한국사회당 신임 대표. [출처: 한국사회당] |
다음은 최광은 한국사회당 대표와의 27일 인터뷰 전문이다.
“총선, 진보진영 모두에게 ‘예정된 패배’”
당 대표 취임 이후 첫 담화문에서 “예정된 패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예정된 패배’라는 표현을 쓸지 고심을 많이 했다. 대표자가 그런 표현을 쓰는 게 통상적으로는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위기에 몰린 상황이더라도 당원들에게 자신감과 승리의 확신을 심어줘도 모자랄 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담화문 발표에 앞서 당 대표 수락 연설 때도 솔직히 말씀드리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참패했고 한국사회당도 마찬가지였다. 대선에서 분명한 성과를 내고 그것을 발판으로 총선에서 ‘큰일 해보자’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 자체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총선 때 우리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인 양 비례대표도 지역구도 불출마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총선을 지나가는 것은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정된 패배’라는 것은 총선 결과에 대해서는 예상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전투를 하며 총선 이후에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총선 결과를 놓고 이런저런 평가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미리 수를 두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데(웃음)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서는 당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비록 성적표가 초라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총선에서 후보를 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봤다.
다른 하나는 대선 시기 금민 전 대표도 말했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따르면 퇴각, 후퇴를 할 때도 아무런 대응 없이 그냥 내빼는 것은 퇴각 자체도 어렵게 한다. 그것은 퇴각이 아니라 완전한 패배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질서 있는 퇴각을 하려면 후방 전투를 벌이는 것이 전술적으로 올바르다.
그런 입장에서 지난 3일 중앙위원회에서 내린 총선 불출마 결정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그 뒤 저를 지지하셨던 분들을 비롯해 제 지지자가 아닌 분들도 총선 불출마 방침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그래서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16일 당 대회에서 총선 독자출마 방침을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예정된 패배’는 우리를 가리킨 것이기도 하지만 진보진영 전체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기존 민주노동당의 문제점은 종북주의 밖에 없었고 이에 덧붙여 민주노총 의존성이 지적된 정도였다. 그 정도로는 과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고 대안 진보세력으로 거듭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총선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도 마찬가지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가 지역구 유세에서 연예인 하리수를 내세웠다더라. 짧은 시간 내에 인지도 제고를 위해 스타마케팅이 불가피한 측면은 있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갸우뚱해 하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진보신당 내부에서도 상당한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민노-신당 지역구 갈라먹기가 혁신 자세인가”
박진희 대표 경선후보 등 총선 비례후보 출마 방침에 반발하는 당원들이 탈당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표 경선 과정에서 후보와 지지자들 간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대표 경선 과정에서도 진보신당을 포함한 대안진보정당 건설은 총선 이후 진보정치 재구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차근차근 논의를 밟아나가야 한다고 일관되게 밝혔다. 이것이 총선 이전 진보신당과 통합 내지 공동후보 선출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한국사회당이 독자후보를 내는 것 자체가 이에 소극적,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당이 총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고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순간 한국사회당은 이미 없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더라도 진보신당과 정치적 합의를 이룬 뒤 진보신당 지지를 결정하는 것이 상식적인 절차다. 이런 과정 없이 진보신당에 일방적으로 흡수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일관되게 반대해왔다. 대안진보정당 건설에 합의한다면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공동 추진하는 것이지 누가 누구에 흡수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 대선 이후 패배 의식에 휩싸여 더 이상 한국사회당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우니 진보신당에 합류한다는 발상이 그쪽(진보신당)에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우리의 지난 당 활동에서 무엇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지 진지하게 모색하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틀에서 함께 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될지 자문해봐야 한다. 또 같이 한다고 할 때는 구체적인 근거와 내용이 있어야 한다. 진보신당이 평등, 생태, 평화, 연대를 핵심가치로 내세운다고 해서 같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보수 정당도 저 단어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내용적 논의 없이 비슷하니 합치자는 식이면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밥상을 뒤엎고 새 밥상을 차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입장을 견지하면서 되도록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면서 비례대표 출마를 둘러싼 당내 갈등의 골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그래서 당직자 인선 등 중앙당 개편 작업도 총선 이후로 전부 미뤄놓았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당하시는 분들이 있더라도 그분들이 진보정치와 아예 담을 쌓기 위해 탈당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다른 길을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지역구에도 후보를 출마시키려 했으나 무산됐는데
비례대표 후보뿐만 아니라 대전 서구을과 울산 북구에서도 후보를 내려고 했는데 지역의 상황이 좋지 않아 무산됐다. 보수정당의 상향식 공천 방식과는 달리 우리는 해당 지역구가 있는 시도당에서 후보를 선출한 뒤 중앙위원회의 인준 절차를 밟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시도당에서 같이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후보 선출이 어렵다. 울산 북구의 경우 정치적 조건을 봤을 때 출마하기에 충분히 의미가 있는 지역인데 개인적으로 아쉽다.
울산 지역에서 민주노총의 압력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서로 후보가 겹치지 않도록 북구와 동구를 하나씩 나눠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표를 최대한 끌어오기 위해 실리적인 결정을 한 것인데, 진보정치 재구성을 논하면서 민주노총과의 관계 재정립과 노동운동 혁신을 주장하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낡은 민주노동당’ 이미지인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 출마하는 울산 북구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봤다. 그런데 열악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출마가 무산된 데 대해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좌파, 자주파보다 무능하다는 것 인정해야”
한국사회당을 포함해 현재 진보정치 진영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겠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흔히 지적하는 종북주의 문제나 민주노총에 대한 의존 관계에 대해 저도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소위 민주노동당 자주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이 갖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자주파 외의 좌파들은 자주파에 대한 문제제기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냉정하게 말해 좌파들은 자주파가 벌이는 대중활동 수준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올바른 가치를 내세우고 주장을 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뀐다면 혁명은 예전에 일어났어야 했다. 사람들을 어떻게 감화시킬 지에 대해 자주파는 일정한 궤도에 올랐다. 좌파와 비교하면 수준 차가 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진보신당이든 한국사회당이든 좌파 진영이든 굉장히 큰 한계 속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출처: 한국사회당] |
제가 말한 ‘예정된 패배’도 같은 맥락인데, 말로는 대선 끝나고 석 달 만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겠지만 이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주느냐,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장기적인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토론하고 조직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2010년 지자체 선거도 사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최소한 지금껏 해왔던 노력에서 조금 더 공력을 투여한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한국사회당도 좌파가 가진 한계를 공유하고 있다. 한계 극복을 위해 생산의 정치와 생활 정치 두 영역에서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두 영역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 청년진보당부터 시작해 한국사회당의 지난 10년 역사를 돌아봤을 때, 앞으로는 맨 앞에서 깃발 꽂고 투쟁에 앞장서는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예전에는 주로 20대로 혈기 넘치는 활동가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당원 가운데 생활인이 많아졌고 가정을 꾸렸고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또 그동안 한국사회당이 생산 기반이든 지역 생활공간 기반이든 대중적 기반 형성에 많이 부족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물론 규모가 작고 역량이 부족해 못한 부분도 있지만 의식적 노력을 소홀히 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사회당은 노동운동 영향력 확대를 위해 보다 사업을 확장해야겠지만 단순히 조합과 노동운동 시야에 갇힌 발상이 아니라 노동자 내에서의 보편 의제로 공장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노동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시민이자 국민이다. 공장 안과 밖의 노동자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공장 안과 밖의 운동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장운동 강화뿐만 아니라 운동 전망 확대에 당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한국사회당은 서울 지역의 장애아동 주말학교 등에서 장애아동의 부모이자 노동자인 당원과 만나며 공장의 시야에 갇힌 것이 아닌 좀 더 넓은 범위의 소통을 해나가고 있다. 노동자 정치의식 형성을 위해 계급성, 자본과의 전투를 남발한다고 진보적 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전투적인 것이 곧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양자는 구분돼야 한다. 무조건 머리 박고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 영역과 재생산(생활) 영역 모두에서 이를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궁극적으로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 없이 새로운 가치를 주장해야 공허하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저와 당도 지난 10년을 거쳐 이제야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정도다. 그동안 전혀 해온 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치밀한 계획을 짜지 않으면 앞으로 10년간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힘들 것 같다. 자주파는 지금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은 10년에 걸친 꾸준한 투자와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운동진영은 그런 투자를 하지 못한 것이다. 말로만 하는 좌파는 벗어나야 한다. 말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었으면 열 번도 넘게 바꿨다.
“총선 이후 외부세력 연대 적극 나설 것”
총선에 임하는 현실적인 목표는
득표와 관련해서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한국사회당을 지지해준 당원과 국민들이 한 번 더 지지를 보내주길 바라고 그것이 확인되는 선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대선과 총선이 좀 다르니 대선보다는 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사회당 지지자 가운데 진보신당을 밀어주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 섣불리 낙관하지는 못하겠다.
어쨌든 미미하다 하더라도 지난 10년간 한국사회당이 마음에 들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분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 정치적 도리라고 여긴다. 제 자신부터도 4월 9일에 투표하러 갈 텐데 투표용지에 한국사회당 칸이 없어서 다른 당을 찍고 싶지는 않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적은 당원이지만 우리 당이 없어 다른 당을 찍게 하는 일을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
총선 이후 진보정치 혁신과 재구성 방향에 대한 구상을 밝혀달라
총선 이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크다. 외부 활동으로는 초록정치연대와는 실무 협의를 거쳐 4월 초 초록정치공동위원회를 발족시킬 예정이다. 진보신당에도 총선 공동대응을 위한 양당 대표 회담을 제안하는 공문을 보냈다. 당장의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양당 대표가 만나는 것은 의미있는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총선 이후에는 두 세력뿐만 아니라 좀 더 열어놓고 다양한 세력들을 만나겠다. 밖으로 굉장히 많이 돌아다닐 생각이다.
내부적으로는 앞서 밝힌 지역정치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역정치위원회를 팀 체제로 운영할 계획이다. 당헌에서 규정된 틀에 맞추기보다는 유연하게 적용해 장기적인 지역 전략뿐만 아니라 2010년 지자체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지역과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대표 경선 시기 강령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는데 강령을 손보는 것은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고 개정 여부에 대해 아직 판단하기에 이르다고 본다. 현재 탈배제 강령(대선 시기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공화주의’를 명시하고 있다-편집자주)에서 밝힌 내용이 당분간은 나침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비례대표 후보를 출마시키면서 잠정 결정한 슬로건이 ‘초록좌파’다. 단순히 초록과 좌파를 조합한 것이 아니라 우파 정부 이명박 시대에 분명한 지향점을 가진 선명한 좌파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같이 정했다. 초록적 상상력, 생태학적 상상력은 자본주의와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경부운하로 생태 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지만 초록을 생태문제로 좁게 이해하면 안 된다고 본다. 초록에는 풀뿌리 생활, 다양한 가치 공존, 위계적 질서와 공간적 배제, 분리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고 그런 점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좌파는 초록좌파라고 본다. 이번 총선에 임하면서 하나라도 분명한 메시지, 작지만 분명한 화두를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