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에는 희망이 숨어있다!

[김하돈 시인의 경부운하 不可紀行] 이 강산 아직 죽지 않았으니 ⑤불가기행 연재를 마치며

또 한 번의 봄이 지나는 길목, 정말이지 ‘세상’이란 말이 새삼스럽다. 바야흐로 세상이 온통 ‘대운하’ 천국이다. 대운하 때문에 나라가 살고 대운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마치 대운하에 의해 총선의 승패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듯 정국이 갑자기 요동을 친다. 운하에 매달려 꼬박 2년을 보낸 사람도 아직 실체를 못 잡고 서먹서먹하기만 한 그 대운하라는 말이 어느 순간에 세상의 절대 명제가 되었다. 왜일까?

대운하는 선거용이었다

1995년, 다만 충주호의 물을 낙동강 유역으로 넘기는 방안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경부운하’였다. 물론 이 문제는 앞뒤가 바뀌어도 결과는 같다. 즉, 한강 물을 낙동강으로 넘기기 위해 경부운하라는 좀 더 그럴싸한 외투가 필요했거나, 아니면 경부운하라는 물류 혁명을 위해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문제가 발생했거나 그 결과는 같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경부운하라는 말은 태어났다가 곧 사라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수십 명의 전문가가 경부운하를 연구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왜냐면, 이렇다 할 연구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연구는 세상에 결과를 내놓을 만한 연구가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2006년 여름,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가 제 1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경부운하는 세간에 다시 등장했다. 한 술 더 떠, 북한지역까지 아우르는 한반도 전체 강의 물길을 운하로 바꾸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도 아주 단순한 언론기사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면, 그 예비후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될 확률이 워낙 적었기 때문이었다.

대략 2006년 11월부터 2007년 초반까지 경부운하는 구체적인 연구결과나 사업계획이 아닌, 공약적인 측면에서 선거용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선거현장에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으로 경부운하가 맹위를 떨쳤고, 한 편에서는 선거캠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대운하 연구회’가 북치는 고수 역할을 맡아 밑그림을 그렸다. 이때 그들이 주요하게 내놓았던 것들이 이른바 물동량, 경제성, 공사비, 공사기간 따위였다. 일부 학계와 시민단체가 이에 대응하면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물동량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배의 규모나 소요시간에 대한 찬반이 엇갈렸다. 경제성과 더불어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놓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 무렵의 경부운하 논쟁은 세상과 아주 동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세상의 후미진 한쪽 구석일 뿐이었다. 그런 학술적인 수치나 통계에 관심이 있을 리 없는 세상의 선거현장에서는 경부운하를 내세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날로 상승하여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향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으로 반전되었다.

대운하는 타이타닉이다

2007년 5월에는 마침내 대운하연구회의 ‘한반도대운하 구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한반도 대운하 구상은 수십 명의 전문가가 10년 동안 연구한 결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구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이미 선거는 판가름이 나 있었다. 경부운하 공약을 앞세운 예비후보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8월을 지나 대선을 치르는 과정까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경부운하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나 실체에 대한 분석은 무의미했다.

배는 이미 출발했고, 그 배가 어디로 가는 배인지, 그 배의 정원이 몇 명인지, 하다못해 연료는 얼마나 채워져 있는 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운하라는 타이타닉은 그렇게 21세기 한국사회를 싣고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갔다.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신년 연설에서 ‘경부운하는 향후 1년 정도 의견 수렴과 다양한 합의를 걸쳐 계획을 세울’ 것이라는 말로 한 발 물러섰으나, 바로 그 다음 날부터 각 해당 지자체에서 결성한 대운하추진위를 중심으로 ‘공약이행’에 대한 시위가 벌어지고 담당 부서가 생기면서 재앙의 조짐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행여 대선이라는 바다를 지나고 나면 슬쩍 항로를 바꿀 것으로 기대했거나, 혹 일단 대선이라는 바다를 통과한 뒤 그 다음 대응책을 강구하자고 편안히 생각했을 지도 모를 ‘대운하라는 타이타닉’은 정작 대선이라는 바다를 건너 본격적인 재난의 해협을 만났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배, ‘대운하호’는 이대로 침몰의 해협으로 가는가? 한국사회가 마침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술렁이고, 문화예술인들이, 종교인들이, 학계의 지식인들이 선지자가 되어 대재앙을 예고하고 뱃머리를 돌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2008년 2월, 대통령 취임이 임박해지면서 그때까지 지면이나 언론을 주로 장식하던 ‘경부운하’가 일제히 ‘대운하’로 바뀌었고, 세간의 이목은 하루가 다르게 대운하를 향해 몰려들었다.

희망은 정작 대운하 속에 숨어있다

2008년 3월, 신통하게도 대운하 찬반 여론이 반대쪽으로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신통하다는 표현보다는, 어쩌면 그 동안 대운하에 대한 진위 여부나 실체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사회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졌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과 그 밖의 야당, 그리고 이런저런 관련자들을 포함하여 모두들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모두의 말이 다르고 모두의 입장이 달라졌다. 분열의 시대, 그 서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4만 불 시대 국운융성 길’의 선봉장이었던 대운하를 총선 공약에서 슬그머니 빼버린 집권 여당이나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대운하 문제에 총선의 사활을 걸어버린 야당이 펼치는 총선 전략이나 모두 별로 기대할만한 것은 못 된다. 다만, 대운하는 그런 정도의 총선 결과에 따라 해결될 수준의 재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운하에 대한 해답은 대운하 자체가 품고 있다. 왜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운하 같은 화두가 출현했는지, 지금의 한국사회가 과연 어떻게 이 진퇴양난의 국면에 대한 해법을 찾아낼 것인가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운하 문제는 이제껏 우리 사회가 겪었던 단순한 찬반양론의 의견대립과는 사뭇 다르다. 대운하는 여야의 문제도 아니고, 좌우의 문제는 물론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국가와 시민의 문제이거나 환경 대 반환경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대운하의 본질은, 20세기의 낡은 방식인 ‘경제성장 중심의 국가발전’과 21세기형 새로운 방식인 ‘생태경영 중심의 국가발전’ 사이의 과도기적 갈등이다. 20세기의 구시대적 경제만능사회와 21세기의 생태선진사회가 교차하는 변화에 대한 진통이다.

대운하의 목적은 대운하가 아니다

총선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사회는 어쩔 수 없이 대운하 문제에 대한 폭풍의 해협을 한 차례 건너가야만 한다. 만약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국민의 승인(?)을 등에 업고 대운하 특별법을 통과시키려 한다면, 그야말로 한국사회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반대로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제 1공약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낼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혼란은 그야말로 극에 달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운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운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야당이나, 좌파나, 진보나, 시민단체에 소속된 사람들로 몰아붙이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대운하 반대의 특징은 지금까지 결코 보지 못했던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신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난 반대를 한다는 점이다. 수천 명이나 되는 대학 교수들이 선거 국면을 무릅쓰고도 이렇게 전면에 나선 일이 일찍이 있었던가? 대운하를 강행하려 한다면, 이제 각계각층으로 번지는 반대선언 도미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정쩡한 타협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반대의 일각에서도 벌써부터 경인운하나 영산강 운하, 혹은 부산과 구미사이의 낙동강 같은 일부 구간을 먼저 해보고 결정하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것이야말로 대운하의 본래 계획과 무엇이 다른가. 대운하의 목적지는 결코 대운하도 아니고 경부운하도 아니다. 대운하의 마지막 노림수는 일정한 기간 동안 나라의 건설기업들이 쉬지 않고 자본을 돌릴 수 있는 운하건설 현장에 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까닭은 기업의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운하가 강산을 죽여 생명의 삶터를 그르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생명과 자연과 더불어 생산적인 건설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운하를 넘어 선진사회로 가자

겨울부터 봄이 오는 사이, 강화도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국토를 넘나들며 제일 절망스러웠던 것은 이 아름다운 산천을 볼모로 지금 우리가 너무 무모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라가 있기 위해 국토는 가장 우선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해야 할 재산목록 1호이다. 국토가 불안전해지면 거기 더 이상 국민이 깃들여 살아갈 수 없다. 우리 국토는 안타깝게도 자본가치의 창출을 위한 수단에 밀려 개발의 만수위를 이미 넘어섰다. 이젠 다독이고 복원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돌려놓는 사업을 벌여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총선에서, 끝내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지켜 ‘운하는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21세기형 국회의원이 많이 당선되기 바란다. 제발 그런 국회의원들이 과반수만 넘겨줄 것을 눈물로 기도한다. 지금 세계 어디에도 단순히 경제에 목을 매고 국토의 생태계를 망치는 그런 선진사회는 이미 없다. 이번 진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국토개발로 이권을 챙기는 정부나 기업이나 개인이 떳떳치 않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국회의원을 만나고 싶다.

한국사회가 대운하라는 홍역을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으로 넘어서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인 21세기의 비전이 결정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정녕 대운하야말로 우리 사회에 희망적인 출현이며, 한국사회를 생태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부디 한 쪽은 밀어붙이고 한 쪽은 막아서서, 하려는 쪽이 중도에 하차하거나, 막아선 쪽이 아픈 상처를 입는 끔찍한 비극이 우리 사회에 재현되지 않도록, 모든 지혜와 열정을 모아야 할 때이다.

분노 가득한 답답함으로 산천을 아무리 돌아다녀 본들, 강산이며 산천초목 앞에 부끄러워 돌덩이를 짊어진 듯 어깨가 결리고 속으로 병이 깊었다. 스스로 짊어지려 해도 너무 무겁고 가당찮은 이 불가기행을 이만 접는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장차 대운하를 반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 대운하를 뛰어넘어 여전히 찬란한 그리움으로 펼쳐져 있는 꿈과 희망의 산천에 대한 기행을 다시 쓰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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