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

[논설] 국가와 시장만으로는 파국을 면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 1970년대 공화당 출신 닉슨 미국 대통령의 선언이다. 그 이후 이 선언이 무색하게도 80년대 레이건행정부의 등장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었고 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고 케인스주의는 구닥다리가 되었다. 하지만 닉슨의 선언이 있은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부시 대통령이 이 선언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케인스주의자다, 모두 국가가 구제해 주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파산위기를 맞은 베어스턴스를 JP모건이 인수할 수 있도록 미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 주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2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으로 공기업으로 만들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보호신청을 해 사실상 국유기업이 되었고, AIG에는 역시 구제금융으로 국가소유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미 의회에서 7천억에 달하는 구제금융 기금이 승인이 났으니 또 상당수의 금융기업이 공기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저격수 폴 크루그만 교수는 최근 미국의 구제금융과 관련해서 “1990년대 초 스웨덴 정부가 실시했던 방안, 즉 금융시스템을 부분적, 일시적으로 국유화하는 대책은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훨씬 좋은 방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감세보다도 “부진한 소비지출과 고용을 자극할 경기부양책” 즉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실시하라고 주문한다. 전형적인 케이스주의자의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의 교리, 워싱턴 컨센서스는 무너졌다. 그것도 미국에 의해서 무너졌다. 국가개입없이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Post Washington Consensus), 중국식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로 간주된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가 최근 위기상황을 맞아 다시 득세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왕의 귀환을 연상케 하는 ‘국가의 귀환’, 정확히 말하면 ‘케인스주의의 귀환’이다.

아직 케인스주의가 대세가 될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문제지만 국가의 시장개입은 확실히 더 확대되고 있고 그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나 시장의 부분적 통제와 국가개입주의로 현재의 위기를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신자유주의가 대공황 이후 자본의 황금시대와 케인스주의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대응임을 감안할 때, 케인스주의의 반복이 신자유주의 위기 대응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유럽의 복지국가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정책이 확산되었고 복지가 축소되고 노동권이 약화되었던 현실은 바로 그런 식의 국가조절이 불가능함을 웅변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금융의 투기적 성격을 규율하고 진보적 방향으로 자본축적을 이루는 것은 양립불가능하다. 신흥시장의 형성과 파생금융상품의 등장으로 세계경제의 위기가 오히려 지연된 점을 감안해 본다면 금융적 팽창은 자본의 불가피한 운동과정이다. 설사 금융체제 전체를 일시적으로 국유화한다하더라도 다시 자본운동이 각종의 신용창출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규제완화, 감세, 민영화, 투자은행 만능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조차 불가피한 국가개입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떤 효과도 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발 신용경색으로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고 여기에 더 큰 폭으로 원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9월말부터 100억달러 이상 현물시장에 달러를 쏟아 붇고도 효과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렇게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일 경제상황점검회의에서 한.중.일 재무장관회의의 추진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우리에 비해 10배 이상 서브프라임 손실을 보고 있어 자금 여력이 없다. 그나마 중국에 손을 내밀 수 있는데 그럴 경우 대미관계의 문제가 된다. 경제문제가 아닌 정치문제가 되기 때문에 미국의 양허없이 불가능하다. 결국 재무장관회의를 해봐야 달러를 줄 곳도 받을 곳도 없다. 최근 논란이 된 외환보유액 가용 규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상당한 금액을 하루 또는 일주일 내에 현금화할 수 있다”는 정부당국자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더라도 미국 국채 등에 투자되어 있는 외환을 당장 현금화하는데 미국정부의 승인없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언제나 경제는 곧 정치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섣부른 경기부양책은 유효수요가 늘어 소비가 촉진되는 선순환보다는 통화공급량을 늘려 인플레로 나아가는 악순환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 금리인하의 경우 특히 고도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될 상황이다. 외환이 불안정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는 현 상황에서 물가마저 뛴다면 정부의 통제력은 완전히 상실될 우려도 있다. 또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재정적자까지 감수하면서 정부지출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경기가 회복될 전망이 없다. 우리가 미국이 아닌 이상 달러를 찍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금을 더 걷을 수도 없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로는 오늘 당장 무너질 판이며, 국가개입주의로는 내일이면 무너질 상황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는 ‘죽거나 나쁘거나’다. 신자유주의도, 국가개입주의도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 대안인가? 그것은 경제주체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펀드와 주식시장 수익률에 목을 매는 주주행동주의가 지속되는 한 어떤 정책도 파국으로 갈 것이다. 자본통제를 목표로 한 사회적 행동주의와 생산수단에 대한 실질적 사회화가 형성되지 않는 한, 국가와 시장만으로는 어떤 대안도 되지 못한다. 이것이 20세기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