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위기, WTO는 필요한가?

[논설] 자국산업보호, 생존을 위한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자유무역, 퇴조?

다자간 자유무역의 규범을 논의하는 WTO(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또 무산됐다. 12월14일 WTO 사무총장은 최종적으로 올해 협상결렬과 종료를 선언했다. 물론 이런 식의 협상결렬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만 최근 세계경제위기의 확산 속에서 이 일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른바 자유무역의 퇴조라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확산이후 G7 정상회담, G20 금융정상회담, APEC 정상회의, 최근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각국 정상이 모인 회의 때마다 WTO의 조속한 타결을 약속했었다. 단 1년간만이라도 보호무역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주요국 정상들의 선언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보는바 대로다. 여기에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도 각국별로 시들해지고, 금융모델의 총아로 불리던 두바이의 공든 탑은 무너지고 있다. 명백한 자유무역의 퇴조로 보인다.

미국발 자동차 산업보호

애초 미국의 자동차 3사에 대한 구제지원에서부터 보호무역주의 우려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GM 등 미국 자동차 업계에 불황이 찾아오자 오바마 당선자와 민주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긴급구제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주말 미국 상원은 140억 달러 규모의 자동차 구제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즉각 미 행정부는 금융권에 투입할 7천억 달러 중 일부를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미 정부당국의 자동차 3사에 대한 지원이 WTO 보조금 협정위반이라는 것이다.

WTO 보조금협정에 따르면, 보조금의 유형은 금지보조금(Prohibited Subsidies), 조치가능보조금(Actionable Subsidies), 허용보조금(Non-actinable Subsidies) 등 3가지로 나뉘어 있다. 수출입을 위한 정부 보조금은 모두 금지보조금으로 규정되어 있다. 허용보조금은 연구개발비나 환경개선비 등이 존재하는데, 이것도 1999년 말에 폐지되었다. 현재 WTO 보조금협정을 위반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조치가능 보조금 밖에 없다.

조치가능 보조금의 경우 정부나 공공기관이 재정적인 기여를 하지 않아야하고, 보조금수령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되며, 특정산업이나 기업을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 있다. 이를 지킨다 하더라도 조치가능 보조금으로 인해 상대국이 피해를 입게 되면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미국 정부가 자동차산업을 지원하면 미국을 WTO에 제소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다.

세계경제위기와 WTO

하지만, 이것이 미국만의 일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실물경제가 얼어붙자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와 각국에서 정부보조금의 형태로 특정산업에 대한 지원방안이 쏟아지고 있다.

독일 자동차산업협회 회장은 미국에 생산공장을 둔 모든 업체에 대한 자금지원을 주장하고 나섰고 EU에 200억~400억유로(약 72조원) 규모의 자금 지원까지 촉구했다. 폭스바겐은 독일 정부에 5000억유로 규모의 대출 보증 프로그램으로 자동차 금융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스웨덴 정부도 자국 자동차 업체들을 구제하기 위해 35억달러의 긴급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반도체시장의 불황이 확산되자 일본과 대만에서도 정부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대만 정부는 메모리반도체 회사를 위해 24조원을 지원키로 했다. 한국의 경우 얼마 전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정부지원을 말했다가 하이닉스 측의 항의로 이를 정정하고 나서기도 했다. (하이닉스는 2002년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WTO에 제소되어 일본, 유럽 등에서 상계관세를 받은 적이 있다.)

WTO 보조금협정 제11조는 (보조금협정 위반인) 정부 또는 공공기관의 재정적인 기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상대출이나 지분참여와 같이 정부가 직접 자금지원을 하는 경우, 대출보증 등 자금 또는 채무부담의 잠재적인 직접이전, 세액공제와 같이 정부가 받아야 할 세입을 포기하는 경우, 정부가 상품을 직접 제공 또는 구매한 경우와 정부 대신 민간기관이 위와 같은 조치를 대신하는 경우까지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형식으로든 특정기업에 대해 정부가 재정적 기여는 보조금이라는 것이다.

WTO는 어디로?

문제는 지금부터다.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기업과 산업에 대한 구제는 모두 WTO 협정위반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업종, 석유화학기업, 키코 피해를 본 (수출)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모두 WTO 협정위반으로 걸릴 수 있다. 앞으로 경제위기가 더 확산될수록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지원이 늘어날 텐데 역시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이런 추세로 접어들 공산이 크다.

경제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자국산업의 몰락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각국이 수년 내에 서로 WTO에 제소하여 보조금 협정위반이 가시화 되면, 상호간에 보조금을 금지시키거나 상계관세를 물릴 수 있다. 만약 상대국의 이런 행위로 다시 보복관세를 매기게 된다면 1930년대 발생했던 관세전쟁까지 재발할 수 있다. 그러면 WTO체제는 깨진다. 이래저래 WTO는 분열의 씨앗이다.

생존을 위한 치킨게임

사실 자유무역이냐 보호무역이냐는 허구에 가까운 논의들이다. 자유무역기구인 WTO는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을 다루면서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장벽을 쌓아왔다. 다자간, 양국간 무역개방은 각국의 대기업과 대자본이 더욱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위한 무역조건의 변형이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일반적 자유무역이 아니라 기업자유무역이라 불려야 한다. 이처럼 자유무역론자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기업’이다.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자국산업보호론이 제기되는 것도 한계기업 청산에 대한 국가별 방어 때문이다. 즉, 자국 기업은 청산당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며 끝까지 가보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재 선진국들조차 국내로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초국적기업들의 모국에 대한 생산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소니가 중국에서 철수한 후 일본 내에서의 생산을 늘리는 것은 일본 정부의 지원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이런 식의 생산이 확산될수록 기술력이나 인프라가 열악한 나라들에서는 인건비를 줄이거나 노동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노동비용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내년도 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3분의1에 해당하는 3000만대가 과잉이라고 한다. 과잉생산과 과잉자본 청산을 둘러싼 치킨게임은 이제 시작되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청산과정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