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사라져야 한다"

[서평] <아메리카 약자혁명>, 2009, 메이데이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무거운 진지함으로 ‘국가 존재의 의의’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가에 의한 시민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짓밟히는 현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5월의 거리가, 노동자들의 집회가, 용산 참사가 그러했다. 광장은 경찰로 통제당하고 거리는 온통 전투경찰이 활개를 치며 거리로 채워 진지 오래 전이다.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의 교과서에서나 정답이지 더 이상 현실의 정답은 아닌지 오래이다. 역사의 반동적 퇴행 속으로 묵묵히 진군하는 보수 지배계급의 성실성이 돋보이는 시대이다. 현실의 정치권력의 정당성은 이미 권력의 하녀들인 지배 보수언론과 공권력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으며 그 위세는 더욱 가중되고 있다.

  <아메리카 약자혁명>, 2009, 메이데이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이 근대사회 이후 신의 자리를 대체한 새로운 숭배의 대상인 ‘미국’이라는 국가는 과연 어떠할까? 미국은 과연 자신들이 보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일까?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최근의 책이 <아메리카 약자혁명>이다. 이 책은 내용은 쉽게 쓰여 있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내용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현실이 미국의 현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첫 번째 다루는 주제는 선거에 대한 것이다. 형식 민주주의라는 대의제의 한계와 함께 미국 선거에 전자식 투표기계 도입으로 발생한 기계작동의 오류(의도적?)가 민주주의를 더 멀어지게 한 것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현실 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다시금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투표 과정의 왜곡과 자본의 선거 컨설팅 승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의 권리 쟁취로는 민주주의를 올곧게 세울 수 없다. 인민의 실질적인 정치를 이루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또한 이 글에게서는 민영화와 교육비의 증가, 사회보장의 감소로 고통 받는 노동계급과 빈곤층의 양극화를 다룬다. 이는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저자는 9·11테러라고 칭하는 시기에 세계무역센터 옆 빌딩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사태 이후 미국사회가 진실을 왜곡·차단하고, 언론을 통해 테러리스트의 공포를 조장하며 강한 지도자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저자는 주목했다. 사실 공포의 정치는 정치권력의 오래된 내적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공포 정치의 속죄양으로 삼은 것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국가 권력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속죄양(scapegoat)은 고대 유대 사람들이 속죄일에 죄를 씌워서 황야로 내쫓던 양을 말한다. 이는 내부적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지지받지 못하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적을 규정하고 그 적과 맞서 싸우는 강한 아버지의 상과 이를 통한 단결력을 조장하여 공포 정치의 지배력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 속에서 이라크 병사나 미군 병사는 성전을 치르기 위해 떠나는 21세기 속죄양이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슬라보에 지젝이 말하는 누빔점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미국이 항상적으로 내적 균열을 전쟁을 통해 해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내적 저항의 균열을 봉합하고 정치적 지배력을 공고히 해 나간다. 이러한 국가 권력은 무저항적 인간만을 용인하는 사회를 구축한다. 그러나 속죄양을 통해 권력을 작동시키는 것은 그 권력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나라, 이 시대의 속죄양은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고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악을 격퇴시키는 것이 정의이며 애국심임을 부추기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그런데 그 거짓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증가하는 워킹푸어(Working Poor)들이 있고 교육비, 의료비의 증가로 빈곤층의 악순환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기반 속에서 미국은 전쟁 비즈니스 통해 “경제적 징병제”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빈곤층에게는 대학진학 비를 벌기위해 군 입대를 할 수 밖에 없는 형식적으로는 모병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징병제인 미국의 현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02년 부시정권이 제출한 교육 개혁안에는 “낙오자 0%법안”이라는 법안을 통해 고등학생들에게 군 입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의 실현을 위해 각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정보를 군의 모집인에게 반드시 전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 국방성은 국내 15세부터 18세까지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JROTC(Junior Reserve Officer Corp)가 있다. 이 수업은 군복을 입고 수업을 하며 전직 군인들이 수업을 담당한다. 그 내용은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며 충성심이다. 미국의 역사도 성공적인 측면만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업은 총기금지학교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되지 않은 치외법권인 수업으로 사격훈련을 할 수 있다. 교련복을 입고 모형 총으로 군사훈련을 받던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 환경을 위해 이사를 한 것은 환경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이 어린 시절부터 군사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은 이후 군 입대에 대한 거부감을 감소하게 만든다. 이러한 교육의 일환으로 대학비용과 시민권을 미끼로 빈민층의 학생들을 유혹하고 훈육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약자들의 자녀에게 내면화시키는 또 다른 약자들을 죽이게 만드는 훈육의 체계는 섬뜩할 정도이다. 우리네 현실도 섬뜩한 것은 마찬가지 이다. 해외 파견을 칭송하며 성조기를 나부끼며 화형식을 하는 사이비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참으로 자기모순을 넘어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평화를 외치는 군국주의자들의 예수는 어떠한 모습일까?

군국주의자들을 훈육하는 또 다른 매개체는 전투 비디오 게임인 ‘아메리카즈 아미’라는 온라인 게임이다. 이 게임을 위해 자신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가입하고 미군의 데이터에 기록된다. 게임의 프로젝트 림의 한 사람은 군의 모집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교육과 문화 매체, 군방성이 만들어 내는 국군주의의 훈육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미국이라는 국가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나아가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건 군사주의와 종교주의와 그 내용을 문화와 미디어, 교육으로 내용을 채우고 있다. 빈곤층을 이용하여 다른 빈곤층을 죽이는 국가, 전장 터의 트라우마, 국가의 예산을 인간을 죽이는 것이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교육하고 의식을 규정하는 국가, 이것이 바로 현실의 학교 교육을 통한 의식의 통제와 국가 지배 질서의 재생산의 총체화된 미국이라는 국가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저항은 있다. 고등학생들은 그러한 군사문화교육에 인터넷을 통해 단결하고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모이고, 노동자들이 모이고, 그렇게 그들은 집결하고 있다. 우리네 현실, 우리네 어미, 아비, 노동자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 오늘따라 정태춘의 노래 구절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기에 가슴을 파고든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 칼 쥐고 총가진자들, 싸늘한 주검 위에 찍힌 독재의 흔적이 검붉은 피로, 썩은 살로 외치는 구나. 더 이상 욕되이 마라 너희 멸사봉공 외치는 자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덧붙이는 말

박종성 님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한다.

태그

아메리카 약자혁명 , 속죄양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종성(방송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네모인간

    오타 좀 수정해주세요. 좋은 글인데... 뒷부분에 좀 있네요.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