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에 대한 기억과 고백

[새책] <푸른 끝에 서다>, 고영일, 새만화책

9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겐 그리 먼 시절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일명 '연세대 사태(1996년)'와 '자주대오 조직사건(1997년)'으로부터 십 년 이상이 지났다. 주변의 동료, 선배,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거나 혹은 이야기듣거나 한 후일담 같은 이야기가 처음으로 그려져 책으로 나왔다.

  <푸른 끝에 서다1>, 고영일, 새만화책, 1만2천원
잡지 <새만화책>에 6년간이나 연재한 끝에 출간된 고영일의 <푸른 끝에 서다>는 학생운동과 구속 사건을 겪은 저자의 실화를 토대로 기억과 고백을 담담히 그린다.

1997년 11월 어느 날, 저자가 막 병장을 달고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부터 만화는 시작된다. 느닷없이 기무대 수사관으로부터 구속 영장을 받은 저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43일간 영창에 수감되고,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 시절을 회상하면서 '조직 사건'이 국가에 의해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를 곰곰히 따진다.

취조실은 생각보다 간소했고, 다 말라버린 겨울 낙엽처럼 건조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 공간은 오랜 시간 무엇을 보았을까요?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품었다 돌려 보냈을까요?

"벽을 보고 서 있는게 그렇게 굴욕적인 것인지 몰랐어. 눈을 가리면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거. 그냥 뒤를 돌아봐도 되는데 그럴 수 없는 알 수 없는 나. 내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할 때면 그곳에 갔던 것이 구속이 아니라, 이렇게 그 기억을 매번 떠올려야 하는 것이 구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취조와 재판을 겪은 주인공에게 "법정에서 당당하게 최후 진술하는 선배들의 모습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어딜 가면 누가 날 쫓아오지 않나. 감시당하고 있지는 않나. 도청당하고 있나 두려웠"지만 이런 후유증조차 격한 원망 대신 초현실적인 묘사와 자조적인 시선으로 그려진다.

이 책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자주대오 활동가 조직의 사상적 근간이 바로 주체사상의 학습이었음을 자백받는 것이 이 사건의 핵이었으니까요.

'개그 콘서트'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주체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사파다. 나는 주사의 달인이다. 나는 주사다. 나는...' 제가 그렇게 뻔뻔한 거짓말쟁이인 줄 처음 알았죠.

하지만 지금도 국가 보안법이 존재하고... 제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외부의 폭력에 저의 생각을 너무 단숨에 내던진 후로, 세상 어떤 생각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죠. 언제 또 제 생각을 쉽게 내 던질지 모르니까요.

눈물을 흘리는 것만한 최후 진술이 따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본인은 물론 검찰관, 변호사, 판사 모두가 알고 있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어쨌든 판결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푸른 끝에 서다1> 본문 중에서 [출처: 새만화책]

조직사건으로 수감되기 전까지 주인공인 저자의 군 생활이 세세히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군대 만화'로 불리기도 한다. 이 책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군 문화가 곧 대한민국 사회 병리현상으로 이어지는 이 사회에서, 고영일의 학교-군대 사이를 오고가는 체험담은 그곳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삶을 포괄함과 동시에 조망한다"고 평했다.

또 "군 문화의 실상과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를 투시한 거의 국내 최초의 장편 군대 만화"라며 "거대한 철옹성에 갇혀 자존감을 박탈당하는 체험. 그것이 영창과 병영이 공유하는 지점이다. 이 지당한 현실을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푸른 끝에 서다>는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도 썼다.

93학번으로 학생운동, 조직사건, 군 생활과 영창 수감을 두루 겪고 6년간이나 이를 되새긴 저자의 고집도 만만찮을 터. 고영일은 '작가의 말'에서 "아파했던 상처들과 오해들, 미움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하고 반추하면서 내게 쌓여 있던 어두운 의미들을 덜어내고 털어내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민주화 운동'의 386세대들 중 일부는 그 훈장을 두고두고 과시하며 정치가가 되거나 후일담을 팔거나 했지만, 30대가 된 90년대 학번들은 십 년에 걸친 국가의 집요한 '학생운동 토벌 작전'을 겪으며 남몰래 신음했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며 그저 '별일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은 늘 궁금했다.

'학생운동' 경험을 자랑스러워하건 후회하건 '그 때 그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날 그 선배를 따라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은 평생을 지배하는 질문이다.

보기 드문 '군대만화'이자 '학생운동'이라는 소재,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다룬 '역사만화'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한 <푸른 끝에 서다>는 거대하고 부조리한 권력이 인간 각자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지금에 비춰 읽어도 충분한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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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사건 , 군대 , 영창 , 푸른끝에서다 , 새만화책 , 고영일 , 연대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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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뎡야핑

    와아 이런 만화가 있었다니!!!! 얼른 읽고 싶네요>ㅅ<

  • 내일

    최후진술 당당히 하던 그 주사선배들이 그립구나..우리때 선배들은 대부분 다주사^^ 그사람들만이 잘못된 권력에 늘굴하지 않았지..좌파라는 우리들은 늘 도망 치기 바빳고 -- 쩝..사실.. 이거 아는 사람은 다아는 사실..그 주사선배들중 배신한 사람도 있지만 열심히 인생을 살고 운동도 꾸준히하는 선배들 참 그립다.술한잔 항상 사주고는 했는데 말이야..음...-- 에이

  • 이바여

    내일/
    당신네들이 도망쳣으면 당신네들이 도망쳤다고 해라 좌파일반이 그랬다는식으로 지껄이지말고 자기네들의 불철저함을 타 정파에 전가시키려 하네 어느 정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썩어문드러진 정파겠지

  • .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pd임이 확실 ㅋㅋㅋ

  • ㅋㅋㅋ

    웃기네 지금 주사파들 뉴라이트 전향 한 애들 많은건 먼데? ㅋㅋㅋ
    사람 따라 운동을 지속할수도 있고 그만둘수도 있는거지 정파 자체를 매도하려고 하네 ㅋㅋ 웃긴다

  • 주사파가 사람이 많으니 좌파보다 ㅋㅋ 배신한 사람도 더많겠지
    ㅋㅋ 언제쯤이면 주사 따라갈려나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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