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민주주의와 관계없습니다?

[쿡! 세상 꼬집기](7) 전태일 정신이 절실한 2010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새천년의 꿈과 희망에 들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새천년도 십년이 흘렀다. 그 사이 새천년의 꿈과 희망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더 이상 절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대한민국 땅에 사는 이의 바람이 되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아침마다 출근을 한다. 이년마다 재계약을 맺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이미 벼랑 끝이다. 삼백만 명에 이른다는 실업자들은 오늘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씩 죽어가고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이제 장례를 치루고 흙에 묻혔으나 포클레인 주걱의 무자비한 철거 폭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제2의 용산참사가 재현될 지 초침을 위태롭게 바라보고 있다.

새천년의 새로운 십년인 2010년.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주기가 함께 하는 해이다.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4월혁명 50주년, 전태일 40주년, 5월 광주민중항쟁 30주년. 벌써 언론들은 특별기획으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위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여러 단체들이, 때론 정부가 나서서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사건도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곳이 있다. 2001년 7월 24일 만들어진 민주화운동기념사회법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던 민주화운동 정신을 국가적으로 계승 발전 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내용)’에 따라 만들어진 단체이다.
설립 취지에 맞게 이 단체의 올해 발걸음은 바빠질 수밖에 없다. 이 단체의 기관지 ‘희망세상’의 2010년 1월호 여는 말도 이 역사적 사건을 화두로 시작되었다. 잠깐 살펴보자.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와 3월 15일 마산 3․15의거 그리고 4월 19일 4․19민주혁명 50주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30주년, 5월24일 김재규 부장 희생 30주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10주년, 6월 25일 민족상장의 비극 60주년, 8월 29일 국치 1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김재규 부장 희생’이나 ‘대구 학생의거’까지 챙기는 걸 보니, 역시 이 단체의 역사적 인식이 ‘전문가’답다.
여는 말은 계속된다. 위의 역사적 사건을 차례대로 나열하며 ‘2010년이 바로 창조적 한 해이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바른 사관에 기초한 참된 민주주의 가치를 가슴에 품고 구체적 실천을 다짐’하며 글을 맺고 있다.

허나 어쩌랴! 이 값지고 소중한 글을 읽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100주년, 60주년, 50주년, 30주년, 10주년까지 꼼꼼히 챙기는 ‘전문가’다운 솜씨에서 왜, 40주년은 보이지 않는가?
1970년 전태일의 항거는 한 가난한 노동자의 동정 받아야 할 분노의 목소리가 아닌 저 프랑스 시민혁명 정신에 버금가는 인간 선언이었다. 여기서 전태일에 대해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럼 묻고 싶다. (오해마시라! 6월 민주항쟁 기념식처럼 귀 단체가 주관이 되어, 대통령이나 장관을 모시고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행사를 열어달라는 말이 아니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전태일 40주년을 몰라서 언급하지 않았는가? 알면서도 뺀 것인가? 노동자는 낄 자리가 아니라서 당연히 뺀 것인가? 위에서 ‘바른 사관에 기초한 참된 민주주의’ 운운했는데, 노동자는 이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비 맞는 전태일과 천막 안의 추모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무엇인가를 기대하거나 무엇을 비판하려고 이 말을 끄집어 낸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3년차를 맞이하여 더욱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의 외침이 많은 2010년,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서민을 말한다. 시민을 말하고, 풀뿌리를 이야기한다. 물론 들러리로 비정규직이며 노동자라는 말도 양념처럼 끼워 넣기도 한다.
노동자는 모름지기 이 땅의 다수를 이루는 서민이자 시민이고 민주주의의 풀뿌리다. 노동자가 쓰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독재로 회귀할 수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말한다. 2010년 새해 첫날 이명박 정권에 첫 번째로 날치기 당한 민주주의가 노동법이고 노동자들의 권리다. 언론악법을 막지 못해 금배지를 버리겠다고 국민과 약속한 야당의 우두머리들은 새해 첫날 또 다시 민주주의 날치기 현장에 여전히 금배지를 달고 있었다. 진정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항거’로 자신들이 그토록 국민들에게 욕하고 씹어대던 한나라당의 독주에 무능력이 아닌 동조를 한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에게 표를 몰아주면 통합 무엇인가를 꾸려 운영하겠다고.

정녕 이명박 정권을 독재라 여긴다면, ‘한나라당 독주구도’를 ‘흔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다시는 독재로 회귀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이 바람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민주주의의 풀뿌리, 서민의 다수, 시민의 대부분인 노동자, 바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조직하고, 연합하고 연대하자고.

전태일 40주년. 기념하거나 기억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화려한 행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염원에 전태일의 정신, 전태일의 인간 선언, 전태일의 실천을 아로새기고 행동하면 된다.
10년 주기의 뜻 깊은 역사적 사건이 줄을 잇는 2010년, 가장 초라한 한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기념이 아닌 혼불로 피어올라 참된 민주주의를 여는 여정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2010년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전태일 40주년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한민국만의 한 청년 노동자가 있어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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