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예술이 있다

[새책] 끝나지 않는 전시

용산을 기억하는 이들은 누구나 ‘여기 사람이 있다’는 구호 역시 기억할 것이다. 참사 당일, 현장의 참극을 목격했던 누군가의 입에서 안타깝게 터져 나온 이 말은, 한 예술가의 발빠른 손놀림을 통해 판화작업으로 거듭났다. 이후 이 작업과 구호는 대형걸개그림으로, 현수막과 포스터로 추모 공간과 집회마다 등장하며 용산참사를 상징하는 이미지와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용산에는 수많은 예술행동들이 함께 했다. 열사들의 영정과 벽화, 설치작업, 시낭송, 무용, 퍼포먼스, 노래, 마당극, 공연, 전시까지. 현장에 상주했던 한 활동가는 ‘용산범대위 활동의 50%는 문화예술활동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때때로 예술은 힘이 세다. 그것은 정공법으로 문제를 따지고 파고드는 것 이상의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끝나지 않는 전시
<끝나지 않는 전시>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1년 동안 미술행동을 펼쳐온 미술가들의 이야기다. ‘끝나지 않는 전시’는 이들이 일 년 동안 이상림 열사 가족이 운영하던 호프집을 개조해 만든 레아미술관에서 진행한 릴레이 전시의 주제다. 실제로는 누구보다 용산의 문제가 해결되고 전시가 끝나기를 바랬을 이들이 ‘끝나지 않는 전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전시장에 갇혀 사회와의 소통을 등한시하는 미술을 거부하는 이들의 전시는 끝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전시, 이것이 야만의 시대를 증거하고 물감이 아닌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책에는 일년 내내 용산에서 벌인 예술행동의 기록들이 빼곡하다. 이들이 단지 현장을 치장하고 그림 몇 점만 그려낸 것은 아니다. 참사현장에 걸개 그림을 들고 가장 먼저 진입한 것도 이들이었고,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대담하게도 분향소와 농성공간을 확보한 것도 이들이었다. 새로운 공간을 열고, 그 공간에 상징의 형식을 부여한 것도, 매번 그 공간과 작품들이 망가진 것에 항의하며 전선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었다. 용산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예술과 예술가를 읽어내도 좋을 것이다.

미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용산참사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만들어졌겠지만, 이들의 작업은 살인자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까발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몇몇 작가들은 현장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주워 모아 포장마차 전시장을 열었다. ‘국수와 소주 대신 기억과 추억을 파는’ 용산포차가 탄생했다. 낮은 목소리로 유족들과 철거민들의 상처를 다독이는 이들의 작업은 용산을 외롭지 않게 했다. 한 작가는 망루에 올랐던 생존자들이 그날의 충격을 마주하며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미술치료를 진행하기도 했다. 실제 싸움이 장기화되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마음을 다친다. 미술인들의 끊이지 않는 미술행동은 싸우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우아하고 고상하며 일반인과는 다른 세련된 외양을 갖추거나, 세상사 따위 아랑곳 않으며 천둥벌거숭이 같은 기행을 일삼는 ‘전통적 예술가상’에 익숙한 이들로서는 현장을 지키며 작업하는 이들의 활동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술이 기꺼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들 스스로는 그것을 매번 다시 태어나는 것, 다른 삶의 주체로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미술운동을 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렇게 내가 다른 삶의 주체로 변이되어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미술이 삶을 떠민 것인지, 삶이 미술을 떠민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미술을 한다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나로 거듭 태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추리의 주민으로, 기륭전자분회의 명예회원으로, 다시 용산4가 골목 주민으로 털털하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81쪽)

미술이 삶을 떠민 것인지, 삶이 미술을 떠민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것은 언제나 소외와 모순이 겹친 현장 한가운데로 급파되는 ‘파견미술가’로 표현된다.

“우리는 개개인의 안락한 작업실에서 왜곡된 권력에 의해 소외된 현장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급파된다. 이 시대의 고통 받는 현장으로 나아가고자 스스로를 파견하는 우리는 ‘파견미술가’이다.”(93쪽)

혹, 누군가는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작품이나 경직된 내용, 왠지 어둡고 무거운 그림들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을 증거하거나 그리는 일은 언제나 이데올로기를 가뿐하게 넘어선다. 현장에 가 본 이들은 안다. 외부의 시선이 그들을 철 지난 이념의 추종자로 아무리 덧칠하려 해도 현장의 공기를 마셔본 이들은 그들이 누구보다 ‘인간’을 주장하기 위한 길 위에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아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꼬뮨을 지향하는 이들은 언제나 스스로 꼬뮨의 질서를 체화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현장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이나 의무가 아닌 현장의 해방감과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주는 에너지와 기쁨이다.

“사람들은 참사 현장, 투쟁 현장하면 칙칙하고, 무겁고, 어두운 광경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그 현장에 있어 본 이들은 안다. 그곳이 얼마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해방감으로 충만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의 확인을 통해 얼마나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그 소중한 공간을 우리만이 소유하고 싶지 않다. 더 많은 이들이 그 기쁨과 해방감을 나눠 갖게 되기를 바란다.”(229쪽)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폭주가 계속되고 있는 한, 용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용산은 더욱 더 다양하게 이야기되고 기억될 필요가 있다. <끝나지 않는 전시>는 현장의 치열한 기록인 동시에 현장예술에 대한 굳은 인식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줄 치료제와도 같다. 더 많은 이들이 현장의 기쁨과 해방감을 나누어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 기존 예술의 허위와 통념을 넘어선 진짜 예술이 있다.


끝나지 않는 전시 (용산참사 추모 파견미술 헌정집)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미술인들 저 | 삶이보이는창 | 2010.02.03
ISBN9 788990492791 | 페이지 수 288페이지 | 정가 16,000원



<저자소개>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미술인들

우린 스스로를 ‘파견미술가’라고 명명했다. 거창한 목표나 이념을 건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으면 외롭고 힘들어서 자기만의 방문을 열고 세상의 아픈 저자거리로 ‘스스로를 파견한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행복은 나누지 않으면 확인할 길이 없어, 행복하기 위해 미술이라는 작은 매개를 들고 우리는 사람들 곁으로 수줍게 다가섰다. 한때는 대추리로, 기륭전자로, GM대우 비정규직 농성장으로, 때로는 국경을 넘어 머나먼 티베트 분쟁 현장으로 가기도 했다. 모두 아프고 갸륵한 곳이었고, 새로운 꿈과 희망과 연대가 자라나야 할 곳들이었다.

우리에게 재료는 따로 있지 않았다. 버려진 매트리스에, 합판 쪼가리에, 이부자리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뺑기’를 칠하고 만들었다. 버려야 할 것들은 따로 있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작품 중 여럿은 빼앗기거나, ‘저들’에 의해 어느 구석엔가 처박히곤 했다. 바람 씽씽 부는 날 애써 설치한 걸개는 채 하루도 안 되어 사라지고, 벽 위에 새겨놓은 열사들의 영정그림은 용역들이 뿌려대는 스프레이에 더럽혀지곤 했다. 포장마차 미술관 「아빠의 청춘」 오픈은 전경들에게 포위되어 본의 아니게 성대하게(?)... 치뤄지기도 했다. 평화박물관에서 시작한 「망루전亡淚戰」은 부산, 대구, 전주, 광주, 인천 등 전국을 돌았고, 지난 4월에 시작한 ‘레아’ 미술관의 「끝나지 않는 전시」는 50여 명이 넘는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전시」는 말 그대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차>

여는 글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미술인 | 용산철거민 열사 유가족 | 008

1부 기억하라! 연대하라!
달리는 그림들 | 014 | 절망의 터를 희망의 터로 | 022 | 수많은 얼굴들로 되살아난 열사들 | 030 | 그림 밖이 모두 물 | 038 | 가난한 화가들 돈을 모으다 | 046 | 현장 행위 미술행동 | 052 | 140인의 예술행동 | 058 | 낙지도서관 만들기 | 066 | 재밌는 1인 시위 | 072 | 금요 문화행동의 날 | 078 | 2009년 12월 32일 | 084 | 떠나가는 사람들 | 090

2부 또 다른 미술들
<망루전(亡淚戰)>
김종길 | 리얼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없다! | 103 | 진창윤 | 섬 | 136
용산포차 <아빠의 청춘> 展
전진경 | 기억을 파는 포장마차 | 139 | 안태호 | 용산포차, 문래동에 떴다! | 144

3부 끝나지 않는 전시
1회 | <현장> 展 | 173 | 2회 | 김성건 | 수묵그림 展 <동행> | 178 | 3회 | 김재석 | <사람> 展 | 182 | 4회 | 이철재 | <인생역展> | 186 | 5회 | 배인석 | <2009년 120MM 안에 갇힌 힘없는 그림들> 展 | 190 | 6회 | 김종도 | <불꽃과 함께 사라지다> 展 | 194 | 7회 | 이영학 | <엄마야 누나야> 展 | 198 | 8회 | 성효숙 | <용산참사 부상자들과 함께하는 미술치유> 展 | 202 | 9회 | 권윤덕 김병하 김종도 김환영 이광익 이상권 이승현 이억배 장호 조은영 조혜란 홍기한 | <그림책 화가, 촛불을 들다> 展 | 206 | 10회 | 성낙중 | 조각 展 <둥지> | 210 | 11회 | 박건웅 | <꺼꾸로> 展 | 214 | 12회 | 엎어컷(권오준 김동범 남동윤 박태성 서성관 여누 유재영 최덕현 현상규) | <별이 지다> 展 | 218 | 13회 | 구본주 서포터즈 | <별이 되다> 展 | 222 | 14회 | 나규환 전진경 이윤엽 | <3인의 땜빵> 展 | 226 | 15회 | 곽영화 | <풀이하다> 展 | 230 | 16회 | 이윤정 | <룰루랄라 생활미술> 展 | 234 | 17회 | 나카니시 레몽 | <여섯 개의 돌> 展 | 238 | 18회 | 이원석 | <슬픈 집> 展 | 242 | 19회 | 김기호 천호석 신주욱 | <땜> 展 | 246 | 20회 | 나종희 | <추락> 展 | 250 | 21회 |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모든 예술가들 | <따뜻한 연대> 展 | 254 | 22회 | 신유아 정윤희 박정신 | <美人田> | 258

4부 파견미술에 대하여
임정희 | 용산에서 다시 만난 행동주의 미술, 그 잠재력과 가능성 | 264 | 안태호 | 이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던지자 | 274 | 김준기 | 여기 예술이 있다 | 279

부록
용산참사와 함께한 미술인 활동 일지 | 286
태그

여기사람이있다 , 용산범대위 , 용산참사 , 예술행동 , 파견미술 , 끝나지 않는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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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부팅이

    예술인들의 투쟁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집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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