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서의 예술

[새책] 안토니오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에 대하여 (갈무리, 2010.8)

안토니오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갈무리)이 출간되었다. 최근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 b),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문학의 정치](인간사랑)와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이학사), 그리고 네그리의 이 책이 번역 출간됨으로써, 이 시대의 독창적인 급진주의 사상가들의 예술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사상가들은 각자 독특하게 고안해낸 개념들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예술에 대한 사유 방식 역시 독창적이다. 이들 모두는 예술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바디우의 경우, 정치나 과학, 철학, 정신분석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예술 고유의 진리성을 주장한다. 바디우는, “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의 절차”이고 “예술은 작업의 결과(작품)가 (효과가 아니라) 실재인 사유”([비미학], 23면)라고 말한다. 즉 “예술은 자신이 내놓은 진리와 정확히 외연이 같”으며(내재성), “이러한 진리는 예술 이외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주어질 수 없다”(독특함)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가르치려는 바는 다름 아닌 예술 자체의 실존”이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실존을 만나는 것, 즉 사유를 사유하는 것뿐”(24면)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술과 관련하여 바디우와 같은 철학자가 할 일은 무엇일까? 바디우는 이에 대해 “철학은 예술과의 관계에서 예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철학은 진리와의 만남에서 중매쟁이이며 참의 뚜쟁이”(24면)라는 대답을 마련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바디우가 예술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 고유한 진리는 결국 뚜쟁이로서의 철학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면에서, 바디우에게 “시는 단지 철학이 시가 말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그리고 철학이 시의 놀라움 안에서 발견하는 척하는 것을 말할 뿐”([미학 안의 불편함], 132면)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랑시에르 역시 다른 영역으로 환원 불가능한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타율성의 이면으로서의 자율성이다.

그는 바디우처럼 예술의 고유한 진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예술의 미학적 체제가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인 의미, 즉 치안에 의해 구획된 감성을 전복하고 재분할하는 예술의 정치성을 주장한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해방과정, 즉 몫 없는 자들이 평등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과정으로 보고 그 정치와 치안과의 부딪침의 현장에서 정치적인 것을 포착한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 된다.

랑시에르의 이론은 치안과 정치가 부딪치는 갈등의 현장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이론은 어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성격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면도 있다.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공동체의 증명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14면)라고 랑시에르가 말할 때, 그 능력의 증명은 바로 평등의 작업이자 해방을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평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몫 없는 자들은 몫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때 ‘도래할 민중’을 창출하는 것과 같은 어떤 사건이 발생시키는 차이 자체와 ‘차이나는 것’의 구축에 대한 포착은 상대적으로 경시될 가능성이 있다.

치안에 의해 감지할 수 없게 된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는, 예술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론에서도 감각적인 것이 평등하게 재분배되어 있는 작품의 민주주의적 잠재성이 중요시되지 감각적인 것이 ‘도래할 것’이라는 시간성 속에서 구축되는 ‘사건’이 중요시되지는 않는다. 사건이 창출될 때의 카이로스의 시간성이 경시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에 소개된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에서 표명된 예술론은 랑시에르의 예술론과 변별점이 있다. 네그리는 랑시에르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정치적 성격을 주장하는데, 강조점과 내용은 다르다. 네그리의 사유 체계에서 예술의 정치적 성격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구성하는 힘’에서 도출된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네그리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미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네그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생산, 환칭컨대 집단적이고 비-목적론적인 생산이다.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은 혁신이며, 따라서 구성constitution은 부단한 혁신에 다름 아니”(네그리, [구성권력], 웹진 [자율평론] 14호)라고 개념화한다. 이에 따른다면 정치적인 것의 구성은, 자유롭게 생산하고 특이하게 구성해나갈 수 있는 우리 삶의 “존재론적 역량”-제헌하는(구성하는 힘)-이 ‘제정된 권력’의 감옥을 파괴할 때의 ‘절대적 사건’을 창출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구성은 “시간의 완료와 ‘장차 올 것’의 열림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네그리, [혁명의 시간], 갈무리, 42면)인 ‘카이로스’ 속에서 산출되는 사건이자 혁신이며 제헌 권력의 구축 과정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힘이 삶의 능력 그 자체라면, 그 힘은 제정된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 있는 우리의 삶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론적 역량”이란 바로 우리 삶에 내재해 있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네그리는 [예술과 다중]에서 그 ‘잠재력’과 예술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이 책에서 네그리는, ‘잠재력’에 대해 “그것은 존재의 상상력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상상하고 창조하기 때문이지요. 거기에는 하나의 한계가 있지만 바로 그 한계 위에서 존재는 잠재력의 형태로 퍼져 있습니다.”(84면)라고 말한다. 존재는 잠재력 자체이고, 잠재력은 상상과 창조로서 존재를 넓히는 힘이다. 물론 어떤 한계 위에서 존재는 확장되지만, 잠재력 자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 잠재력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힘, 동적인 힘이다.

이렇게 사유된 잠재력은, 상상과 창조에 의해 생산되는 예술과 곧바로 연결되는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네그리에게 예술이란 잠재력 자체이다. 좀 더 한정시켜 말하자면, 네그리에게 예술은 “인간의 총체적 운동을 선취”하는 “구성하는 권력, 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잠재력”(129면)이다. 더 나아가 네그리는 이 ‘잠재력’으로서의 예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노동’과 연관시켜 논한다.

예술이란, 이미 말한 것처럼 노동이며 살아 있는 노동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특이성을 발명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특이한 형상이나 오브제를 발명하는 것이며 언어적 표현이고 여러 가지 기호들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즉 이 첫 번째 운동 속에 행동하는 주체의 잠재력이 있고 세계를 재발명하기에 이르기까지 인식을 깊이 있게 만드는 예술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39면)

네그리에 따르면,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예술은 언어적 표현들을 특이하게 발명한다. 이러한 예술은 텍스트에 포박되어 있지 않다. 예술은 곧바로 세계를 재발명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예술과 세계 사이에는 장벽이 없다. 예술은 세계가 될 수 있으며 예술은 시적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의 잠재력이다. 이 잠재력을 네그리는 시(포에지poésie, 시적인 것)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시-포에지’란 “생산과 생산에 대한 명령(즉, 착취)이 부과하는 어떤 조건과 관련해 살아 있는 노동의 잉여를 표현”(189면)하는 것이다.

시와 노동을 연결시킨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포에지란 단어가 제작을 뜻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상황주의자 바네겜은, 한 노조원이 “두 푼짜리 재료를 합당하게 사용하면 우리는 기관차를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 주장을 포에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일상생활의 혁명], 275면 참조.) 그는 여기에서 시(포에지)란 “새로운 현실을 낳는 행위”이자 “관점 전복의 행위”(같은 면)가 된다고 말한다. 관점을 전복하여 파업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낳는 것, 그것 역시 시라는 주장이다.

포이에시스와 포에지를 연결시키는 그의 생각에 따르면 시란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이며 “질적인 것을 그것의 내적인 일관성에 따라 개발하는 것”(274면)이라고 정의된다. 네그리의 포에지 개념과 관련된 ‘살아 있는 노동’이란, 자본에 포섭된 노동, 우리가 억지로 해야 하는 노동과는 달리 “자연과 역사적 현실을 철저하게 변형시키는 능력”([예술과 다중], 38면)이다. 그 노동은 바로 바네겜이 말한 “새로운 현실을 낳는 행위”이자 ‘창조적 자발성’을 조직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네그리에게서 ‘살아 있는 노동’과 시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그에게서 시는 ‘살아 있는 노동’의 ‘잉여’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적 제 조건을 초과하는 인간의 변용 능력이 표현되어 드러날 때 이에 대해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란 과잉이다. 네그리가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는 과도함”(192면)이라고 말할 때, 그 ‘살아 있는 노동’의 잉여가 표현된 ‘과도함’이란 가치가 바로 ‘시-포에지’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착취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의 능력-잠재력-이 발휘되는 살아 있는 노동은, 그 조건을 초과하는 어떤 과잉-잠재력-을 표현하고, 그 표현된 과잉-거기에 있는 잉여-에서 우리는 ‘시-포에지’를 만날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해 생산된 예술은 ‘시-포에지’를 발산한다. 그래서 네그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과도한 것, 극단적인 초과 - 예술이나 혁명을 생각해보면 좋겠지요 -에 어떤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잉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현존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어떤 생산적인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처럼 조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92면)

예술은 잉여-현실의 조건을 초과하는 잠재력-를 발산하면서 저기에 저렇게 있다. 허나 저렇게 있는 저 잉여물은 “어떤 생산적인 토대를 구성하고 있”기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서 조직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노동의 잠재력-시-을 드러내고 있는 저 예술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조직하고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는 동시에 기계로서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저 예술이 뿜어내는 과잉된 무엇인 ‘시-포에지’와 접속하여 정동되는 ‘사건’을 통해 우리의 잠재력을 강화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주체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이 지닌 “존재론적 역량”이 정치적인 것을 창출하고 또한 구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삶의 존재론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예술의 포에지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정치적인 것의 구성이란 역으로 ‘시-포에지’를 동반하면서 진행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포에지’와 정치적인 것의 용해가 이루어졌던 광경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촛불의 바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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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 , 랑시에르 ,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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