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여성노동자의 삶

[낡은책] 서울로 가는 길 (송효순, 형성사, 1982.8)

저자 송효순은 17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목욕탕에서 심부름을 6개월 정도 하다가 1973년 구로공단의 대일화학에 입사했다. 1976년도 때부터 도시산업선교회에 다니면서 노조민주화 이후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탄압받아 오산공장으로 부당전직 당했다.

가부장의 덫에 걸린 70년대 여성노동자

한 달 시간외 근무만 130시간 넘게 해도 밥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던 70년대 여성 노동자 송효순은 그러면서도 남동생들 수업료를 조금이라도 더 시골 집으로 보내려고 발버둥 쳤다. 공부를 하고 싶어 찾아간 교회에서 왜 노동법을 가르쳐 주는지 의심하게 경계했던 그이에게 영등포 산업선교회(이하 산선)은 희망이었다. 저자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쳤던 아버지 같았던 인명진 목사는 지금은 뉴라이트의 거두가 됐다. 저자는 최근 회고의 글에서 인명진 목사의 투쟁 때문에 지금도 “한나라당에 강하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말했지만, 인 목사는 2006년부터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농민가와 해방가, 우리 승리하리라를 가르쳤고, 함평고구마사건과 동일방직 똥물사건을 알려줬던 인 목사의 변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자가 박정희 군사정권의 ‘공장 새마을운동’ 바람에 휘둘려 새벽 6시30분까지 출근해 공장은 물론 문래동과 양남동 일대 도로 청소까지 무급으로 해야 했던 70년대말 바로 그 ‘공장 새마을운동’을 주창했던 대통령 영애(令愛)는 지금 유력 대권주자가 됐다. 저자가 1976년 한국노총 화학노조 산하의 대일화학 B포장반에서 당시 냉면 한 그릇 값 470원도 안되는 일당 400원을 받을 때, 바로 그 화학노조의 기획실장을 맡았던 사람은 얼마 전까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자가 1978년 3월 어용노조를 정상적 노조로 바꾸었지만 소위 민주파 첫 지부장은 회사 상무의 매제였고, 화학노조 본조까지 참석한 첫 대의원대회에는 부사장이 나와 축사했다. 회사는 그 해 여름 저자를 포함해 노조간부 4명을 강원도 철원의 제2땅굴에 견학 보냈다. 휴가를 내서라도 지부장 선출 과정을 보겠다는 그 공장 조합원들은 막은 채 진행한 대회장에 축하하러 왔던 화학노조 간부들은 대회 중간에 한식집으로 빠져나와 배터지게 밥이나 처먹고 있었다.

70년대 노조 민주화의 한계

언론이 산선을 빨갱이로 몰아치던 70년대의 끝자락에 회사는 오산의 분공장에서 노조탈퇴공작에 집중했다. 지부장은 화학노조 중앙에 오산문제를 위임해버렸다. 화학노조는 노사협의회를 열어 오산공장 노조원 전원을 모아놓고 탈퇴시켰다. 저자를 비롯한 대의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부장을 불신임시켰지만 잿밥에 눈이 먼 본조와 회유에 넘어간 지부 상집과 회사의 삼각동맹으로 서서히 무너져갔다.

산선이 언론의 집중공격으로 힘을 잃자마자 산선이 하던 교양강좌를 이번엔 회사가 실시했다. 강사로 나온 한글학자는 비서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쳤고, 시민단체 대표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을 가르치며 공순이 티나지 않게 청바지 입지 말고 옷한벌에 5, 6만원 밖에 안하니 사 입으라고 권한다. 한 달 월급이 5만원인 그녀에게. 정권과 기업과 어용노조 등 가부장적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당시 여성노동자를 송두리째 피 빨고, 그 피로 조국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 아래는 저자의 글을 줄여 잡았다.

1부 나 어릴 적

난 원래 고향인 전북 익산군을 무척 싫어한다. 내가 자란 충남 논산군 연무읍 황하1동 20여 가구의 조그만 산골마을 죽림동을 오히려 아늑하게 느낀다. 봄이 되면 마을은 온통 진달래 꽃으로 빨갛게 된다.
우리는 모두 8남매다. 아버지는 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오빠 둘과 언니 하나와 살다가 우리 어머니와 재혼했다. 어머니도 결혼에 실패해 아버지와 재혼했다. 어머니에게 딸린 큰 언니를 나는 좋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뒤 따로 살았다. 아버지는 양반이라고 절대 일을 하지 않았다. 상속권은 큰 오빠에게 주고 바람까지 피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고향인 죽림동으로 왔다. 큰 언니는 결혼하고 남은 어린 4남매를 어머니 혼자 고생스레 키웠다. 내 바로 위 난희 언니는 17살에 돈 벌러 서울로 갔다.
어머니는 명절 때면 내게 고기국이라도 얻어먹고 오라고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나는 차라리 고기국을 안 먹는 게 좋았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뼈를 깎는 고생 끝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 집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가을 저녁 때 불이 났다.

2부 서울로 가는 길

1973년 봄 16살의 나는 서울 이모가 잘 아는 신도림동 낙원목욕탕에서 일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부인이 둘이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아이는 양순이였다. 나는 말로만 듣던 불고기가 이 집에선 매일 아이들 도시락 반찬이 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6살 먹은 주인집 여자 아이는 오전 10시 자가용을 타고 한국고전무용을 배우러 갔다. 주인집 며느리는 내 한달 월급 4천원보다 10배가 넘는 5만원의 돈을 써가며 옷을 한 번에 다섯 벌이나 맞춰 입기도 했다. 때밀이까지 종업원은 모두 10명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월급으로 5천원을 주었다. 할머니는 인정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작은 언니가 다니는 대일화학으로 옮겼다. 큰언니집은 무척 초라했다. 무허가 판자촌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나는 왜 가난하게 태어나 공장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야만 되는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큰오빠의 딸 송명석의 이름으로 공장에 들어가는 게 무섭고 싫었지만 나는 공장으로 가야 했다. 생전 처음 공장에 들어온 나는 경비아저씨들이 순경인줄 알았다. 목욕탕 주인 할머니는 매우 서운해 했다.

나는 1973년 6월4일 작은 언니와 함께 대일화학으로 첫출근했다. 나는 주력상품인 ‘네오파스’ 포장반에서 일했다. 포장하는 고참을 위해 포장상자를 집어 주는 일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점심에 35원짜리 라면을 사먹기도 하고 빵을 먹기도 했다. 공장의 첫 월급은 각종 수당을 합해 7200원인데 식대를 제하고 6천원을 받았다. 교회에 나갔다. 어떤 때는 한 달에 시간외근무를 130시간 넘게 할 때도 있었다. 넓은 공장에 석유난로 4개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 했다. 점심이면 15원짜리 단팥빵과 샌드위치를 난로에 구워 먹었다. 나는 공장은 다 이런 것이겠지 하면서 이렇게 돈을 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973년 12월이 되자 작은 언니는 착실하다는 이유로 공장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반장이 됐다. 나는 내 동생들 수업료를 조금이라도 더 보내려고 노력했다. 동생에게 쓴 편지는 “재운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로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한없이 미워졌다. 연말 보너스가 기본급 100% 나왔다. 반장, 과장에게 잘 보인 사람은 5% 더 나왔다.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시켰다. 동료들은 1974년 1월 4일 시무식에서 모범상을 탄 사람을 보고 누구 누구에게 잘 보인 결과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열심히 한 덕에 남보다 먼저 A조에 올랐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1974년 6월 작은 언니는 수영 오빠와 결혼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친구 경남이와 같이 자취하기로 했다. 경남이는 옷과 이불만 가지고 이사를 왔다. 나는 양남동의 교회에 나갔다. 공장에서 재순이와 복순이를 사귔다. 여름휴가를 맞아 시골에 내려가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결국 그 해에 돌아가셨다. 나는 네오파스를 포장하다가 파스 선별부서로 옮겼다. 냄새가 독해서 힘들었고 특히 여름엔 심해서 눈이 아팠다. 1975년 시무식에서 나도 모범상을 받았다. 나는 다시 큰언니 집으로 들어갔다.

3부 또 다른 고향

영숙이가 어떤 교회(산업선교회)에서 야학을 한다고 했다. 거긴 ‘차돌이’ ‘비비’라는 모임이 있었다. 산업선교회는 생리문제, 뜨개질, 노조법을 가르쳤고 신협도 운영했다. 나는 왜 교회에서 노동법을 가르쳐 주는지 이상해서 간다고 하고는 가지 않았다. 나는 1976년 ‘비비’그룹에 가입했지만 산업선교회에 경계심을 계속 갖고 있었다. 그런데 활동하면서 보니 너무 좋은 곳이었다.

조승혁 목사님이나 인명진 목사님의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노조법이라는 이상할 만큼 좋은 법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황순애 언니와 문래동에서 당산동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다녔다. 차비가 부담이었다. 1976년 2월 재운이는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와 나와 같이 자취하면서 큰형부가 하는 용산의 철공소에서 일했다. 생활고 때문에 산선을 탈퇴하고 매일 잔업에 시달리면서 살다보니 자꾸 짜증이 났다. 결국 산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프 작업하는 생산부 2과는 과장이 자기 부서 아가씨들을 농락했다. 월급을 남들보다 더 올랴준다는 조건으로 공장내 여공들을 데리고 다니며 놀았다. 나는 그 과장이 미웠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마 뒤 새마을 차장으로 승진했다. 그때는 ‘공장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 새벽 6시30분까지 출근해 공장은 물론 문래동 일대와 양남동 도로까지 청소했다.

나는 1976년 5월 다시 산선에 들어갔다. 산선은 5월에 봄 야유회를 했다. 황순애, 나, 김겸순, 김경애, 윤순억, 홍형순, 오설자 등 8명이 헌인능으로 야유회 가기로 했다. 갑자기 경애가 자기는 못가겠다고 했다. 경애 고모부는 우리 회사 새마을 차장이었다. 야유회 사건으로 회사가 뒤집어졌다. 새마을차장은 우리 보고 “선산은 선교를 빙자해 너희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B포장반은 회사의 감시를 받았다. 공원들은 모두가 분노했다. 쉬는 일요일 날 우리 맘대로 야유회 간게 무슨 죄인가. 인명진 목사님께 상의하니 목사님은 “내가 사장님한테 항의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공장의 월급은 너무 적었다. 1976년 일당은 300~460원 정도였다. 당시 냉면 한 그릇에 470원이었다. 우리는 사장과 노동청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우리 회사는 월 2만원이 못되는 근로자가 반이나 됩니다. 청소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인정해 주세요. 매일 아침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명목으로 7시30분에 출근해 무료로 청소하는데 근무시간으로 인정해 주세요. 법정 휴일에 쉬게 해주세요. 철야 노동을 시키지 말라. 매주 토요일이면 24시간 철야노동을 합니다. 토요일 오전 8시반에 출근해 일요일 8시반까지 쉬지 않고 일합니다. 강제 잔업을 시키지 마세요. 잔업을 강제로 저녁 9시반까지 합니다. 퇴직금을 법대로 받게 해 주세요. 노동청에서 조사나올 때 자유롭게 얘기하게 해 주세요. 여자들을 때리지 마세요. 1976년 5월 21일” 이 편지를 반장까지 전부 서명 받아 점심 때 산선이 면회 왔을 때 넘겨주었다.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장은 조회시간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누가 집안 일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이야기하느냐고 야단이었다.

생산1과 구0회 과장은 우리들을 감시하고 야단을 쳐댔다. 공장장은 군인출신으로 역시 명령 불복종은 있을 수 없다고만 되풀이했다. 나는 영업부로 쫓겨났다.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다시 생산부 사무실로 내려오라고 해 내려가니 웬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상무로 새로 부임해온 분이었다. 우리들은 게시판에 공고가 붙어 새마을교육을 받아야 했다. 새마을 지부장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밥탈 때 새치기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나는 생산2과 새마을 차장을 봐도 인사도 안 했다. 빈번히 폭행이 일어났다. 폭행 당한 신수정과 황순애가 대표로 진정서를 작성했다. 박0원 상무를 통해 고충처리했다. 여러운 일이 생기면 산선이 박 상무와 자주 면담했다. 월급도 줄 서서 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부르던 새마을 노래도 중단했다.

구속된 인명진 목사님을 위해 종로의 기독교 방송국 강당에서 금요예배가 매주 열렸다. 나는 기도회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농민가, 해방가, 우리 승리하리라 등이었다. 함평고구마사건, 동일방직 똥물사건도 거기서 들었다. 그 때 산선이 빨갱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야근 때는 새벽 1시에 조회를 했다. 나는 일요일날 두번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계부서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월급이 10% 올랐는데 산선 회원들은 월급이 5%밖에 오르지 않았다. 고분고분한 사람은 15%가 올랐다.

황영애 언니는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표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영애 언니가 그만두자 얼마 뒤 이정예라는 아이가 조장으로 앉았다. 1976년 12월이 되자 생산1과의 한형복이란 아가씨가 구0회 과장에게 또 폭행당했다. 우리는 진단서를 떼어다 구 과장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동생 재운이는 용산의 공장이 힘들어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문래동의 작은 공장에서 용접을 배웠다. 양남동으로 이사해 금숙이와 금자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막내동이 재신이 수업료를 부쳐주기 바빴다. 방은 어찌나 작은지 겨우 두 사람이 누워도 발을 뻗지도 못할 정도였고 부엌도 없었다. 회사에 비밀리에 노조가 설립됐다는 얘기가 있었다. 우리들은 증거가 없고 조합비를 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알았다.

구0회 과장은 생산5과 여자들이 단결이 잘되고 회사에 불만이 많아 잡아놓으려고 자신감을 가지고 과장으로 왔다고 했다. 입사 6개월도 안된 신입을 고등학교를 나왔다며 반장을 시켰다. 우리는 생산5과를 잡아 놓아야겠다는 구 과장의 자신감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유자가 변해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

4부 거듭난 삶

1978년 3월 윤순덕 등 남자 몇명이 어용노조를 정상적 노조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화학노조 본조에서도 협조하고 전 지부장인 과장대리 변0근 지부장의 자진 사표를 받았다. 우리 대일화학지부는 화학노조 조직부장 이0연이 임시 지부장을 맡았다. 여자들은 윤순덕이 가입원서를 받고 남자들은 홍0아, 손0환이 앞장섰다. 3일 뒤 대의원 선거를 했다. 조합원 30명에 1명의 비율로 대표를 선출했다.

초대 대의원으로 윤순덕 이유자 나 송효순 등 모두 14명을 뽑았다. 지부장은 홍0아를, 부지부장은 손0환을 선출했다. 대회장은 화학노조에서 3명, 회사 대표로 총무부장과 축사를 한 부사장이 왔다. 금방이라도 큰 변화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노조는 지부장 전임문제를 회사에 몇 번 건의하고 협의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지부장은 무리해서 하혈을 한다고 1주일 휴가를 낸 뒤 집에서도 반대하고 매제인 박 상무도 반대했다. 지부장은 며칠 뒤 선출 4개월도 안 돼 노조에서 손을 뗐다. 회계직을 맡았던 윤0현이 물망에 올랐다.

1978년 하반기 임금인상에서 78년 입사자는 10%, 76년은 15%, 75년은 20%, 74년 25%를 인상했다. 고참과 신입생의 임금격차가 작아서 상후하박형이었다. 지부장 혼자 전임하다가 상임서기 한0섭도 전임했다.

회사는 1978년 8월 21일 부녀부장 윤순덕, 상임서기 한0섭, 대의원 권0순, 나 이렇게 4명을 강원도 철원의 제2땅굴에 견학을 보냈다. 회사는 노조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반대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 우리는 서울시에 회사를 고발했다. 공장생활 하면서 학원 정도 나가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1979년 1월 노조 부녀회 주최로 불우이웃돕기를 했다. 약 20만원 정도 모아 문래동 6가 판자촌 노인을 도왔다. 경로당에 TV 1대와 연탄 2백장을 기증했다. 노조 간부 몇 명이 대표로 MBC와 함께 경로당을 방문하고 위로했다.

나는 1979년 2월 나와 장금숙, 익순이 등이 대의원으로 다시 뽑혔다. 윤순덕은 밴드포장반에서 반장이 됐다. 순덕이는 처음에는 조합원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듯했으나 시일이 조금 지나자 박 상무를 비롯해 회사 간부들을 자주 만나더니 무슨 일이 생기거나 회원들을 만나도 회사를 대변하고 우리더러 한 발 양보하라고 했다.

동료 옥순이는 충남 천안에서 7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7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일곱 딸들을 키우기 위해 힘겹게 일했다. 옥순이는 제약계로 가서 생리불순까지 생겼다. 결국엔 일하다가 피를 토했다. 동료 재숙이는 충남 당진에서 7남매 중 6째로 태어났다. 사당동 무허가 판자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막노동했다.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살림을 부쉈다. 어머니는 닥치는대로 일하다가 불행히도 폐결핵에 걸렸다.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계속 이 여자 저 여자를 사귀었다. 재숙이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몸져 누워있는 어머니 약값이라도 벌려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결국 재숙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회사는 박 상무를 중심으로 회사가 원하는 사람을 지부장으로 세우려고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대의원들은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다. 1979년 6월 30일 화학노조 지부장들과 본조의 손님들을 모시고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조합원들은 “우리도 우리 대표가 선출되는 과정을 지켜보겠다”며 휴가를 내려 했지만 회사는 휴가를 내주지 않았다. 겨우 조합원 2명만 휴가를 얻어 대회장인 회의실에 참석했다. 오후 3시 휴식시간에 되자 조합원들은 휴식시간 15분을 이용해 대회장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사무실 밖에서 노총가를 함께 힘차게 불러 응원을 해주고 내려갔다. 지부장에 다시 윤0현 지부장을 뽑았다. 부지부장은 이유자가 됐다.

대회를 마치고 저녁을 하러 한식집에 가니 그곳에 다른 회사 지부장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어쩌면 대의원대회에 축하하러 와놓고 끝까지 보지도 않고 회의의 반도 진행되지 않았을 때 나와서 저렇게 포식을 하고 있을까. 역시 화학노조는 정상적인 노조가 없다고 하더니 저렇게 먹는데는 신경을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윤0현 지부장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예상외로 일을 하지 않았다. 상임서기인 한0섭은 노조의 입장에서 일하지 않고 회사의 총무과 소속으로 생각하고 일을 처리하려고 해 문제점이 많았다. 그런데도 대의원의 대부분이 남자이고 아직까지 의식이 뚜렷하지 않아 개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유자나 윤순덕, 한0섭이 한패가 됐다. 인0기 직장이 여공 임경님을 폭행했다. 우리가 임 직장을 내쫓으려 하자 윤0덕과 이유자가 인0기와 임경님의 비밀을 탄로해 두 사람 모두 자진사표를 받았다.
산선은 새 회관을 짓고 이사를 하느라 분주하고 창립 2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를 치르느라 바빴다.

1979년 8월11일 신민당사에서 YH사건이 일어나자 인명진 목사님은 구속됐다. 해태제과는 8시간 일하기 운동을 벌였다. 신문과 방송은 산선을 빨갱이로 대대적으로 몰았다. 정부는 산선을 조사하겠다고 우리 회사에까지 왔다. 공안과 검사가 찾아와 나는 6시간 동안 조사 받았다. 이제 회사가 산선이 하던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대일화학도 매주 목욜마다 퇴근후 교양강좌를 했다. 정문에서 강제로 강의장인 식당으로 내몰았다. 반공강연도 들었다. 한글학자인 한0태 선생은 한글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비서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쳐주었다. 대일화학엔 비서가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강의한다고 회사에서 돋 받고 하는 줄 오해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자존심과 자기인권은 퇴근할 때 찾아가지고 가라고 했다. 사랑받는 아내교실의 조0춘 선생은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해 여자들이 취해야 할 점을 얘기하고 나중엔 “여러분 제발 청바지 입지 마세요. 청바지 입으면 공순이 티나고 교양이 없어 보이니까요. 유명백화점에 가면 옷한벌에 5, 6만원 밖에 안해요. 한벌씩 사입으세요”라고 말했다. 우리 월급이 한 달에 5만원인데.

노조 지부장이 조합일을 제대로 하지 않자 뜻 있는 대의원과 전0구가 마음을 합해 노조를 좀 더 조직적으로 운영하려고 전0구가 제의한 조직연락망 ‘새마음봉사단’을 만들기로 했다. 회사는 오산공장에서 노조 방해작업을 했다. 지부장은 대응은 안하고 YH사건 뒤엔 산선 비판만 했다. 화학노조 본조에 오산문제를 위임했다. 화학노조 본조는 오산공장에서 지부장과 회사와 중앙노사협의를 개최하더니 이들 뒤엔 아예 노조원 전원을 모아놓고 탈퇴시켰다. 그러고는 본사에 와선 지부장은 지금은 시기가 어려우니 오산공장은 세월이 좋아지면 다시 하자고 터무니없는 얘기를 했다. 대의원들은 지부장을 불신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1980년 2월 13일 지부장을 불신임할 임시대대를 잡았다. 대의원 12명 중 10명(오산공장 2명을 뺀 모두)이 지부장 불신임안을 제의하자 지부장은 받아들이지 않고 폐회하고 퇴장해 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임시의장을 뽑아 회의를 계속 진행해 이0호를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회사는 이0호 지부장을 인정해 주지 않고 윤0현을 지지했다. 노조는 서서히 갈라졌다. 회사는 매일같이 손0한, 이유자, 윤순덕을 중심으로 외출을 내보내고 누군가를 만나 현 지부장을 불신임시키려고 주력했다. 이유자의 출근카드를 보니 한달에 두번이나 생리휴가를 썼다.

내 동생은 계속 코피를 쏟았다. 회사와 싸움에서 진 대의원들이 많아 나혼자 대의원에 다시 뽑혔다. 회사는 새 대의원을 선동해 이0호 지부장을 불신임시키는데 총동원했다. 결국 1980년 3월 20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이0호 지부장 불신임을 제기해 무조건 통과시켰다. 선출 40일만이었다. 손0한이 새 지부장이 되고 이유자가 부지부장에 됐다. 이들은 어용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임금을 인상했다. 오산공장 조합원 전원 탈퇴에 대해 조합원들이 계속 경위설명을 요구하자 지부장은 1980년 4월30일에 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부장은 당일 아침 웬 여자강사를 데리고 왔다. 구로상담소에 근무하는 김0희이 와서 조합원의 자세를 교육했다.

내가 겪은 5.18

우리 대일화학 노동자들은 5월17일 불광동에 있는 임마누엘 수도원에 수련회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일수련회는 인명진 목사님이 참석을 하시지 못할것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부산의 대중집회에 강사로 초대 받아 강의를 하시기 때문에 실무진과 우리들만이 아쉽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토요일 6시 퇴근후 임마누엘 수도원에 도착해보니 목사님이 계셨다. 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집회가 취소됐던 거다.

수련회에서 참된 삶이라는 주제를 놓고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촛불예배를 보면서 서로의 잔을 나누고 떡을 먹여주고 서로가 서로를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고 마음껏 웃어보기도 하고 그동안 외로웠던 일 다 잊고 즐겁기만 했다 목사님은 전에 고문 때문에 생긴 디스크로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우리들을 지켜보셨다.

그러면서도 앞으로가 걱정이라며 남몰래 한숨을 쉬시곤하셨다. 목사님 무슨걱정이세요? 우리들이 철부지처럼 물어보면 목사님은 나라가 걱정이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셨다.

새벽 1시가 돼 내일을 위해 잠을 자기로 하고 누워 소근소근 이야기를 하는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 불빛이 왔다갔다 하다가 창문을 두드리며 인명진 목사님을 나오라고 했다. 못 나간다고 하자 호루라기를 불고 불빛을 비추고 군화발 소리가 요란하고 개짖는 소리로 수도원은 삽시간에 공포로 휩싸였다. 수도원 주위는 형사들이 포위하고 외곽에는 총 맨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우리는 “목사님 어떻게 하냐”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캄캄한 한밤에 무슨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채 너무나 답답했다. 형사들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호루라기를 불고 공포총을 쏘며 우리를 위협했고 목사님은 기도만 하시는 듯했다. 감옥을 세 번이나 갔다온 목사님은 갖은 고문으로 몸도 다 상하셨는데 구속되면 어떻게 하냐며 울고있는 우리를 위로하시면서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계속해서 그렇게 한시간 가량을 공포 속에 있는데 형사들은 주인을 데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와 목사님을 끌고나가고 우리는 공포속에 어쩔줄 모르고 목사님만 부르며 따라다니다가 형사들이 강하게 제지하고 가로막아서서 우리를 차단했다. 그래도 목사님 잡혀가면 안된다고 매달리자 죽고싶냐고 협박하면서 강하게 뿌리치고 목사님을 차에 태우고 목사님 머리를 차밑에 처박은채 군인들의 호위 속에 출발하고 우리는 전쟁 속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고만 있었다.

목사님이 그렇게 연행된 새벽 우리는 통행금지를 해제되기를 기다려 수련회 중간에 교회에 와보니 우리나라에 민주인사와 양심수들은 어젯밤에 모조리 잡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행방도 모르고 계엄령은 더욱더 강화 선포되었다. 80년 5월 광주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민주화를 꿈꾸는 시민을 무지막지하게 쓰나미처럼 덮쳤다.

서울에서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채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는 소리만 들리지 모든 매스컴은 차단이 되었고 우리는 공장에서 가슴만 조리며 가끔씩 전해주는 유인물을 통해 광주의 소식을 전해 받을 수 있을뿐 아무런 뉴스도 없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뉴스만 계속되고 우리들은 공장에서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지만 거리는 총맨 해병대들이 활보하고 노동운동하는 남자들은 어느 날 삼청대로 끌려가기만 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그 시간들은 마치 지옥이었다. 절망만 하고 있을 뿐 희망이라고는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를 위해 공부를 해두는 일밖에 없었고 노동단체와 각종단체들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있었던 밤은 너무나 큰 충격이였고 사랑하는 목사님을 빼앗기면서도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그 날 밤은 지금도 목사님께 두고두고 죄송하기 만하다. 지금도 박덕순 선배는 그날 꿈을 꾸곤 한다고 한다. 내가 한나라당에 강하게 적의를 두는 것도 내 마음에 어떠한 피해의식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회사는 산선이 계엄령 때문에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 틈을 이용해 우리를 탄압하려 했다.

5부 새벽 : 오산공장으로

결국 우리 선산 동료들은 오산공장으로 쫓겨났다. 오산공장으로 출근하려면 적어도 5시엔 일어나야 했다. 과장 한사람이 일어나더니 통근차 타는 규칙을 가르쳐 줬다. 앞에서 세번째 자리까지는 간부들 자리라고 했다. 우리는 1980년 11월 2일 오산공장에 첫 출근했다. 구0회가 차장으로 승진해 오산공장에 있었다. 오산공장의 안0옹 부장은 “나는 이래 보여도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이야. 난 00공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고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스카웃돼 왔다. 나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도 갔다 왔어. 고법에서 재판할 때 판사 앞에서 책상을 들어 엎은 사람이야”라고 고함쳤다.

나는 오산에서 해고장을 받아 다음날 서울본사로 와 출근시간에 맞춰 사장을 만났다. 사장은 “너희들이 잘못했으니까 해고가 되었지. 꼴도 보기 싫어”라고 했다. 정월 대보름날 우리들은 서울 회사 앞에서 땅콩장사를 했다. 회사는 두 달 동안 우리를 해고할 계획을 세웠는데 한 달만에 해고를 당했다. 수원의 노동청에 가서 진정을 했으나 우리들의 잘못은 없지만 회사 체면 때문에 복직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우리를 해고시킨 구0회 차장도 회사에서 쫓겨나 식당을 경영했다. 구 차장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사과했다. 노조도 결국 간판을 내렸다. 1981년 나는 산선의 주선으로 대림동 희망의 집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1982년 여름에, 송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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