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의 미소를 위하여

[새책] 『네그리의 제국 강의』(네그리, 갈무리, 2010)

한국에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제 낯선 이름이 아니다. 특히 2008년에 일어난 ‘촛불’은 네그리의 ‘다중’ 개념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된 바 있다. 네그리가 마이클 하트와 함께 쓴 『다중』 한국어판이 2008년 2월에 출간(원저는 2004년 출간)되었다는 것을 보면, 흥미롭게도 책의 출간 직후 그 책에서 논의된 ‘다중’의 존재가 한국에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다중』은 네그리가 역시 하트와 함께 쓴 『제국』(원저는 2000년, 한국어판은 2001년 출간)의 후속편이다. 『제국』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도래한 세계 질서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저작이다. 새롭게 구축되어가는 지구적 세계질서에 대해 네그리와 하트는 기존의 ‘제국주의’ 이론을 기각하면서 ‘제국’이라고 개념화했다. 그리고 이 제국에 대항하는 주체를 ‘다중’이라고 명명했다.(한국어판 『제국』에서는 ‘대중’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제국주의 이후 변신한 주권권력의 성격을 주로 파헤치고 있는 『제국』에서도, 제국에 저항하는 주체인 ‘다중’이라는 개념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제국』에 대한 비판자인 조반니 아리기도 「제국의 계보」(『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3), 73쪽)라는 글의 서두에서, 그 책에 대해 “이른바 지구화의 도래에 대한 급진 좌파의 지배적인 반응인 암울함과 의혹, 그리고 적개심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라고 말한 바 있다. ‘투사’ 네그리가 『제국』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제국’의 네트워크 권력 내에서 코뮤니즘을 구축해가는 저항 주체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성격을 해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국』에서는 다중의 존재가 주로 철학적으로 논의되고 있어서 그 개념이 좀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제국』에 대한 많은 논평가들이 ‘다중’ 개념의 모호성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띠고 있는 『다중』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실제의 여러 저항 운동을 광범위하게 조명하면서 ‘다중’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사실 『제국』이 『다중』보다 국제적인 논쟁을 더 광범위하게 불러일으켰으며 한국에서도 ‘제국’ 개념을 둘러싸고 진보 운동 진영과 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한국인에게 실감 있게 읽힐 수 있는 책은 『다중』이 아니었을까 한다. 『제국』이 지구적 주권질서의 새로운 경향을 고도의 이론을 통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이 ‘제국’론에 접근하기가 ‘다중’론보다는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에 의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다중’ 개념의 대중화도, 『다중』에서 전개된 ‘다중’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뒷받침해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중’ 개념의 대중적인 전파는 ‘다중’과 연결되어 있는 ‘제국’ 개념에 대한 이해를 소홀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얼마 전에 출간된 『네그리의 제국 강의』(갈무리, 2010)는 이러한 수용 상황 아래서 유용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국’ 개념과 ‘다중’ 개념을 한 자리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로 2003년에서 2004년에 걸쳐 전 세계를 순회하며 행한 네그리의 강연-36회에 이른다-을 싣고 있다. 그러니까 그 강연들은 『제국』 출간과 『다중』 출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들로, 『제국』과 『다중』의 논의를 아우르면서 ‘제국’론과 ‘다중’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강연들에서 네그리 특유의 개념들이 반복되어 설명되기 때문에 이 책을 통독하면 반복 학습 효과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한편으로, 한국어판으로 각각 500페이지가 넘는 『제국』과 『다중』의 광범위한 논의를 간결하게 간추리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사실 기존의 여러 개념에 익숙한 사람들은 네그리가 전개하는 ‘제국’과 ‘다중’과 같은 개념들이 낯설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두꺼운 『제국』과 『다중』에 직접 들어가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네그리 자신이 자신의 사상을 직접 정리해 보여주기 때문에, 좀 더 그 사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래서 『제국』과 『다중』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책이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만만찮은 면도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짧은 강연 속에 광범위하고 복잡한 논의를 압축해서 설명하다 보니 난해한 부분도 적지 않고, 『제국』과 『다중』에서 논의되지 않은 예술이나 철학, 유럽 연합에 대한 강연문도 읽기에 쉽지 않다.

『제국』의 핵심 논지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는 강의는 제1강이다. 이 강의에서 네그리는 현재가 제국주의 시대에서 ‘제국’ 시대로,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역사적 이행기라고 말한다. 이 ‘제국’으로의 이행은 “열린 경향성”인데, 그 경향이란 맑스가 영국에서 자본주의의 경향성을 도출했을 때의 경향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영국 자본주의를 분석하여 집필된 『자본』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독일 독자들에게, 맑스가 『자본』 서문에서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요!”라고 말했을 때의 그 경향 말이다. 19세기 중엽 독일이 완전히 자본주의화가 되지 않았지만 결국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야했던 것처럼, 네그리는 지금은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결국 흘러가게 될 ‘경향’-제국으로의 경향-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향성이 ‘열린’ 것이라고 할 때, 그 개념은 필연성이 아님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네그리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하면, “경향 개념은, 맑스에게서 이미 나타나는 바와 같이, 파열, 분할, 불연속성의 개념”(380쪽)인 것이다. 이를 지적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네그리의 『제국』이 저항하는 주체들의 능동성을 분석에서 중시하지 않고 일종의 ‘객관적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다(존 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거나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자본 축적의 상보적이고도 모순적인 두 가지 문화 논리로 보는 대신, 연속적 계열로 보는 일종의 연대기적 가상에 굴복”(다니엘 벤사이드, 『저항』(김은주 옮김, 이후), 205쪽)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경향이 “계급투쟁의 주체적인 배치들로 조합하고 직조하는 발전의 객관적인 모순들을 드러”(380쪽)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생각한 경향은 주체들의 계급투쟁을 통해 벌어지는 파열로서 현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네그리는 경향을 필연성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맑스의 경향 개념이 그렇듯이(맑스도 한 사회에 근대와 전근대가 모순적으로 착종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제국’에 대한 사유가 연대기적 가상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는 없다. 네그리의 그 경향은 벤사이드도 말하듯이 ‘모순’ 속에서,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자본에 대한 투쟁에 의해 발전되는 객관적인 모순 속에서 “파열, 분할, 불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네그리는 1강에서 제국 시대의 이행 현상이 세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1) 지구화 현상. 강한 국민국가가 약한 국민국가를 종속시키는 제국주의 시대와는 달리 식민지적 질서가 붕괴하고 전 세계 시장이 재분할된다. 그리고 이주 현상이 활발하게 된다. 이른바 지구화가 일어난다. 2) 국민 국가의 근대적인 구성 자체가 동요에 빠진다. 국민국가의 군사적, 화폐적, 문화적 주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3) 자본주의 축적의 특질이 전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변경된다. 비물질노동(지적, 정동적, 관계적, 언어적 노동)이 산업노동의 헤게모니를 대체하고, 이에 적응하여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탈산업적인 축적 체제가 등장한다. 이 축적 체제 아래에서는 사회 전체가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삶 자체가 착취된다. 착취를 수행하는 자본과 국가는 삶 권력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2강에서 네그리는, 제국은 거대한 주권 국가가 아니며 ‘혼합된 구성’으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그 구성은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 구조화는 권력의 세 수준들의 분절에 의해 작동한다. 첫째 수준은 군주적 수준으로서의 미국. 이 수준에서 군사적, 화폐적, 문화적 헤게모니가 유지된다. 둘째 수준은 귀족정. 어떠한 국민적 색깔도 띠지 않는 금융 체계들에 기초하고 있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셋째 수준은 “명령 기관들의 재구조화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동맹들을 창출하려고 애쓰는 여타의 거대한 국민국가들”(30쪽)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국으로의 이행은 자본과 주권의 자기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네그리의 관점에 따르면, 지배 체제의 변화는 언제나 피지배 계급의 투쟁에 의해 강제된다. 그러한 관점은 구조주의를 기각한다. 제국은 1968년 혁명에 따라 주권이 훈육 통치에서 통제 통치로의 이행이 강제되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주권 체제다. 이에 대해서는 3강에서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1968년의 투쟁들은 기성의 테일러주의와 같은 노동 및 사회의 조직화를 깨트린다. 그리고 공장의 자동화와 사회의 정보화를 통해 처음엔 사회적 노동자가, 다음엔 비물질노동자가 출현한다. “이러한 국면에서 계급은 다중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오히려 다중으로 변형”(39쪽)된다. 그래서 주권의 명령은 전 사회적으로 확장되어야 했고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대한 근대성의 규제의 위기가 나타난다.

그 결과 사회적 구조는 혼란에 빠집니다. 첫째, 생산의 형상, 이것은 고립될 수도 없으며, 생산적 주체를 개별화할 수도 없습니다. 둘째, 착취의 현상, 이것은 사회 전체를 가로질러 확대되며, 모든 곳에, 그리고 사회적인 것들의 모든 삶 정치적 차원에 자본주의적 전유專有의 새로운 기술들 및 지속 불가능한 기술들을 설치합니다. 적대는 대규모적․범우주적으로 됩니다.(40-41쪽)

이렇게 대두된 ‘공위기’에 대응하는 주권 체제가 제국이며, 제국은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전쟁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위기와 제국으로의 이행 경향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비판한 바 있다. 특히 비판자들은 미국의 2차 이라크 침공은 제국주의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네그리의 입장은 미국의 네오콘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은 귀족과의 연합에 의해 유지될 수 있는 제국으로의 경향에 대해 반발을 품고 감행한 군주의 반동적 쿠데타라는 것이었다. 허나 그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는데, 제국은 현재의 모순적인 과정에 의해 관철되는 경향이기에 그렇다. 그 경향으로부터의 후퇴는 현재 노동 및 사회의 조직화 체제에 적응하려고 하고 있는 자본과 이를 뒷받침하고자 하는 다른 국민국가들(귀족)의 반대에 부딪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반동에 대한 다중의 극렬한 저항에도 부딪칠 것이다.

사실, 1968년 다중의 투쟁으로 이루어낸 미국의 월남전 패전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코소보와 1차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귀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라크를 쳐들어간 미국 네오콘은 월남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를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대착오라는 것은 이후의 과정이 잘 보여주었다. 네오콘은 치욕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의 미군 역시 금의환향은커녕, 상처만 안고 자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태의 전개는, 즉 제국으로의 이행 경향을 되돌려놓으려는 네오콘의 제국주의적 반동이 실패할 것이라는 네그리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네그리의 핵심 개념 중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비물질노동’과 ‘다중’이다. 비물질노동과 관련된 다중을 변혁 주체로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프로그래머들을 변혁의 전위로 보는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허나 이는 오해임을 이 책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비물질노동에 대해서는 마이클 하트와 같이 쓴 21강 「제국 내에서의 포스트사회주의적 정치」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서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을 두 가지 형태들 속에서 사유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형태는 지적이거나 언어적인 노동을 포함한다. 두 번째 형태는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르는데, 법률 보조원들,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노동 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비물질노동이 생산에서의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이때 그 헤게모니를 산업 노동이나 농업 노동이 사라지고 이 비물질노동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농업노동에서 벌어지는 생물학적이고 생화학적인 혁신이나 제조업 생산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노동을 유쾌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도 않으며, 더 큰 보수를 가져오지도 않을뿐더러, 작업장에서의 위계와 명령을 감소시키지 않는”(215쪽)다고 말한다. 첫 번째 형태의 비물질노동자인 영화 제작 스텝들의 노동과 저임금을 생각해보라. 친절하지 않으면 해고한다는 사측의 위협 속에서 저임금을 받고 ‘정동적 노동’을 행하는 비정규직 계산원들 역시 비물질노동자다. 사실, 이 ‘정동적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알다시피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강고한 투쟁을 벌여왔다.

물론 ‘정동적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만이 그러한 투쟁을 벌였다고는 할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측에 의해 ‘자유롭게’ 해고되고 존재의 존엄성을 짓밟힌 자들이 강고한 투쟁을 벌여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정규직에서 해고된 이들 역시 격렬하게 투쟁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투쟁 대부분은 ‘해고’의 문제, ‘비정규직’ 문제, 삶의 ‘존엄’ 문제가 촉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비물질노동자가 투쟁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네그리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이야기할 때, 비물질노동자가 투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비물질노동 헤게모니가 투쟁에서 가지는 의미는, 자본과의 투쟁 양상이 대공장 산업 노동자가 ‘전위’가 되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존 ‘전통 이론’과는 달리, 농업 노동자든 산업 노동자들 비물질노동자든 이들의 투쟁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해가면서 이루어지는 비물질노동의 경향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일 테다.

현재 한국에서의 투쟁 역시 대공장의 정규직 육체노동자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반면 비물질노동자든 제조업 노동자이든 같은 평면에서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투쟁들은 사업장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다. 이들 노동자들의 각각 특이한 투쟁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해나가는 방향으로 소통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생산할 수 있을 때, 네그리는 이들 노동자들을 ‘다중’이라고 부를 것이고 또 ‘삶 권력’에 대한 이들의 저항을 ‘삶 정치’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노동계급’ 개념을 파기하는 듯한 ‘다중’ 개념 역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에서 다중에 대한 비교적 명료한 상을 보여주고 있는 글은 10강 「괴물스러운 다중」이다. 다중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아래 새로운 형상을 가지고 현실화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다. 네그리는, 다중이 산업의 중심성에 기초한 노동계급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 다중 역시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사회에서 착취 받는 노동력이기에 노동계급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기존의) 노동계급보다 더 광범위하다고 말한다. 가령 돈을 빌려 대학 등록금을 내는 대학생 역시 미리 착취 받는 노동력이기 때문에 그러한 다중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또한 다중은 특이성들의 네트워트이기 때문에 대중이 아니나 그 네트워크가 대량화된 공통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대중이기도 하다. ‘대량화된 공통으로서의 네트워크’는 비물질노동의 ‘괴물스러운’ 성격, “그것이 더 이상 개별적 노동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이며, 특이성의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조직되고 연합”(88쪽)된다는 성격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네그리는, 노동자들은 이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착취의 공통적 형태에 의해, 노동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양식들과 형태들의 실제 현실에 의해 통일”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과 빈민들, 여성들과 남성들, 서비스 노동자들과 산업 노동자들, 그들 모두는 노동 조직화의 동일화 양상들 속에서, 전지구적이 된 고용 및 착취의 공통적 체계 속에서 노동”(90-91쪽)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네그리의 ‘다중’은 비물질노동자들만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다중’은 사회학적 개념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이어서 이론적으로 사유해야 하며, 그래서 추상도가 높다. 하지만 그 개념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직접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네그리가 제국과 다중의 적대에 따라 벌어지는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는가는, 네그리와의 대담록인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2009, 그린비. 유감스럽게도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원저는 2006년에 출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 책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하고 구체적인 투쟁들에 대한 네그리의 세심하고 유연한 사고를 잘 보여준다. 『제국 강의』와 이 책을 동시에 읽으면 다소 추상적인 정치 철학과 정세 분석이 네그리에게서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허나 『제국 강의』에서도, 유럽 연합 논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재의 정세에 민감한 네그리의 사유를 볼 수 있다. 이 책의 2부에는 좌파 대다수와 극우파에 의해 결국 부결(2005년)될 유럽연합 헌법에 네그리가 찬성표를 던졌던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제국으로 향하는 세계질서 경향을 생각한다면, 미국 일방주의를 견제하는 유럽연합의 성립이 국민국가의 탈구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네그리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네그리는 유럽 연합의 성립에서 코뮤니즘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 2부는, 절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네그리의 입장이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원리주의적인 무정부주의에 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네그리가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원칙주의에 기대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코뮤니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살피는 마키아벨리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민감한 네그리의 사유는, 22강인 「제국의 새로운 국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그 사유는 언제나 다중이 자신의 뽀뗀짜(potenza-활력)를 표현하는 양상과 정세를 연결하면서 이루어진다. 가령 이라크 전쟁에서 유럽이 미국과 동맹을 맺지 않은 것은 다중의 압력 때문이라고 네그리는 생각한다. 이는 “정부들이 또한 대항권력 세력들의 역동성을, 대항권력 내부의 운동들의 역동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들이 발전의 특정한 지점에서 그들 나라의 규범적이고 규제적인 체계들을, 그리고 사회조직화의 일반적인 메커니즘들을 계획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240면)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들은 그 대항권력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나 아르헨티나의 커쉬너 정부가 그러하다. 또한 스페인의 대항권력은 대중적 봉기를 통해 정부를 전복시켰고 이에 따라 집권한 스페인 정부는 이라크에 주둔하던 군대를 즉각 철수시켰다.

네그리의 ‘실제적인’ 사고는, 22강에서 새로운 주체성에 걸맞은 새로운 강령의 윤곽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를 포스트사회주의적 강령이라고 네그리는 잠정적으로 이름 붙이는데, 그 강령 구축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1) 세계시민주의, 국경들의 분쇄, 유럽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통일 등의 전지구적 논점. 2) 부의 재분배 가능성, 새로운 소득형태들을 창출할 가능성, 사회 전체가 노동하도록 배치되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러한 노동으로부터 소득을 얻을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3) 소통이 명령되는 모든 형태들과 체계적으로 단절하고 소통형태들에 대한 구성적이고 특이한 재전유. 4) 새로운 통치 형태들을 위한 기획. 공통적인 것을 투입할 수도 있고 스스로를 민중의 정치적 활동에 정초할 수 있는 통치형태들을 어떻게 구축하는가의 문제.

이러한 거대한 ‘코뮨주의’ 기획을 섬세하게 따져볼 때 ‘포스트사회주의 강령’은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만만한 과정이 아닐 테지만, 맑스 역시 전 인류사적인 시야 속에서 현재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의미와 방향을 생각했다. 네그리 역시 지금 현 자본주의와 주권의 변화 경향이라는 시야 속에서 ‘코뮨주의’를 기획하고 강령으로 구체화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네그리의 기획은 맑스의 『코뮨주의 선언』을 충실하게 계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기획은 결코 삶의 구체적인 세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 기획은 다중의 뽀뗀짜가 발산되는 삶 정치적 투쟁을 통해 세워지고 또 현실화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소한 듯이 보이는 행위라도 그것이 뽀뗀짜를 표현하는 삶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땐 거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뽀뗀짜는, 1848년 6월 노동계급의 봉기를 걱정하고 있던 토크빌 가 사람들 옆에서 하녀가 몰래 짓고 있던 미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네그리는 말한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자, 토크빌 가족은 그녀를 즉각 해고했다고 한다. 토크빌과 같은 지배계급 지식인은 이 미소가 가지고 있는 혁명성을 즉각 알아보았던 것이다. 32강에 실려 있는 이 일화가, 이 책에서 한국시를 평론하고 있는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대목이었다. 그 미소는 시적인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본 서평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이 책에는 네그리의 예술에 대한 생각-특히 연극에 대한 글인 33강 「배우와 관중」이 주목되는데, 네그리는 이 글에서 그 자신, 작가, 공중을 연기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연극배우야말로 다중의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적잖은 분량 실려 있다. 그 중 현 시기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13강, 「제국 시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카이로스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체들을 변형할 가능성을 구축하는 필연성(그러나 또한 가능성)입니다. 그것은 삶의 요소들을 시적 재구축으로 이끎으로써 정치학을 만들 가능성입니다. 이 제헌적 기획은 ‘삶정치적’이라는 바로 그 용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125쪽)

토크빌 가의 하녀가 노동자의 봉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바로 화살이 발사된 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있게 되었을 터, 그녀의 미소는 그 시간에 변형된 신체를 표현한다. 이 신체적인 변형이 삶을 시적 재구축으로 이끈다. 그 시적 재구축이란 “예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즉 “특이성들의 실존을 향해 새로운 존재를 구축하는 것”(126쪽)이다. 새로운 존재의 구축에 단초가 될 이 미소는, 그래서 삶 권력에 저항하는 삶정치적 행위이자 더 나아가 제헌적 기획의 출발 지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토크빌 가 하녀의 미소는, 극장이라는 장소에서 공중의 웃음을 창출하는 이름 모를 배우와 같이 정치와 예술의 공통적인 장소를 창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중의 잠재성을 표현하는 그녀의 미소는 우리에게도 도래할 것이다. 『네그리의 제국 강의』는 그 미소에 헌정하는 책이다.

태그

제국 , 네그리 , 다중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