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싫어한 노동운동가의 자서전

[낡은책] 투쟁과 증언 (김태엽, 풀빛, P277, 1981.5)

저자 김태엽은 1902년 경남 기장에서 태어나 14살에 밀항선을 타고 단신 도일해 직공생활을 거치면서 수백 건의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일본 형사로부터 ‘돗빠’(돌파)란 별명을 받는 등 온 생애를 노동투쟁에 헌신하고 1944년 귀국해 이 책을 쓸 때까지 노동운동과 노동자 계몽운동에 주력했다. 이 책은 김태엽의 자서전이다.

김태엽은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로 한국전쟁때 인민군에 납치된 김약수의 조카이면서 해방 이후 북에서 최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두봉의 7촌 조카다. 이런 가족 관계 때문에 김태엽은 반공주의자의 변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김태엽은 해방 직후 전평에도 많은 동료들을 두고 있었지만 남로당의 정치놀음에 이용물 정도로 여기고 절대 기웃거리지 않았다. 대한노총에 들어가 부산지부장을 지냈지만 그 마저도 우익 정치 모리배들의 제물이 되자 뛰쳐나왔다.

어쩌면 김태엽의 이런 정치적 행보가 20년대 일본에서 전성기 시절 그가 보인 전형적인 현장 중심의 경제투쟁 일변도의 활동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태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비타협적 투쟁을 널리 소개하지만 사생활에선 늘 경찰을 붙이고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공산주의도 싫고 자본주의도 싫다고 말한 그의 발언은 진심이다.

그러나 그냥 보수주의자로 매도하고 치부해 버리기엔 노동현장 투쟁을 너무 잘 알고 그 역사도 깊다. 이 책 23절의 표현대로 김태엽은 프랑스식 상디칼리스트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머리말에 김태엽은 “1922년 일본에서 ‘재동경 조선노동동맹’을 같이 창립했던 동지들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며 살아남은 늙은 노동운동가의 회한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남긴 책의 기록을 순서대로 요약해본다.

1. 민란 속에 태어나다

내 고향은 부산시 기장군이다. 1900년을 전후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과 탐관오리가 날뛰었다. 기장 현감 송태관은 울산 출신으로 건달 속에서 주색이나 일삼던 자다. 내 할아버지 김규홍은 고을 이방으로 강직하고 현명했다. 새 현감은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퇴락한 객사를 중수하자고 했다.

고을 사람들은 사발통문을 돌려 민란이 터질 기세였다. 기장 이씨네 퇴락한 제실을 거사의 본거지로 삼았다. 덕망 높고 외무 출중한 양판줄을 장두(狀頭)로 세웠다. 거사 직후 현감은 동현 뒷산 대밭에 몸을 숨겼다가 도망쳤다. 내 아버지 김두한은 문중 어른의 약국에서 의서를 공부했다. 나는 1902년 음력 12월13일 새벽 1시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라하고 외로운 초당에서 태어났다.

2. 집안 몰락의 길

신임 현감 오영석은 24세의 목민관이었다. 그는 내 할아버지 김규홍 전 이방을 다시 이방으로 눌러 앉혔다. 6.25때 부산에 피난왔던 오용석 현감의 손자인 당시 국회의원 오모 씨가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7살 때 어머님이 27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구토와 설사를 일으킨 지 엿새 만에 운명했다.

나는 김덕균씨 집에서 곁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경아 누나가 부산에 사는 윤기만이란 사람에게 16살에 시집갔다. 자형은 나를 부산으로 데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복동의 과자점에 취직시켰다.

3. 밀항선 타고 오사카로

자형의 친구 문정호는 당시 사하면 괴정리에 살았다. 나는 문씨가 가르쳐준 대로 유유병씨를 찾아갔다. 다대포 바닷가에서 백여 명의 장정이 모여 노동자 밀수업자인 유씨의 알선으로 밀항선을 탔다. 오사카에 도착해 나는 유씨가 경영하는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인 함바에서 자고 먹으며 길비조선소에서 일했다.

4. 오사카 길비조선소의 소년 견습공

길비조선소에서 내 일당은 85전이었다. 하루 식대는 50전. 유씨에게 짊어진 빚과 의복비, 목욕비, 이발비, 약값 등을 계산하면 빚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났다. 길비조선소에는 하루 평균 한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의 대도시 오사카엔 아무런 법적 제재도 없었다.

다까하시라는 한 숙련공과 친해졌다. 다까하시는 나를 무사하게 이 공장에서 빼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다까하시의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고베에 있다는 재종형 김지엽을 찾아갔다. 다까하시는 떠날 때 내게 깨끗한 노동복과 약간의 여비를 주었다.

5. 전전하는 직공생활 속에 만난 여인들

부산에서 문정호가 만나보라던 김명수와 김건오는 오사카의 제모공장에 있었다. 이 제모공장은 한국인 신기현씨가 경영했는데 신기현은 나의 외삼촌 박자현씨와 한국에서 사업도 같이 했다. 제모공장 석 달 만에 나는 숙련공이 되어 하루 2원의 일당을 받았다. 당시 일본엔 ‘우애회’라는 노동단체가 있었다. 일본 동경제국대 학생이던 스스끼 분찌가 중심이 돼 1910년 동경에서 시작한 노조운동의 요람이었다. 이 우애회가 후일 일본노동총동맹이 되고 그것이 현재의 사회당으로 발전했다.

노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1899년 영국에서 창설한 러스킨 대학이었다. 러스킨 대학은 유능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었는데 기숙사까지 갖춘 대학다운 대학이었다. 일부 마르크스 학도들은 러스킨 대학에 불만을 품고 분리해 1909년 런던 노동대학을 따로 세웠다.

나는 총액 60원의 예금통장을 가지게 됐다. 제모공장의 주인 신기현은 복금이와 쟁금이라는 두 딸이 있었다. 나와 큰 딸 복금이를 결혼시키려 했다. 일본의 방직공장이 한국의 소녀들에게 일급 35전에 12시간 장시간 노동시켜 생산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췄기에 비싼 관세를 물고도 수지를 맞췄다. 영국의 방직공 일급은 1원 50전에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유럽의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야만이 문명을 정복했다”고 꼬집었다.

김명수 김건오 두 청년이 먼저 직장을 옮겨간 동양펠트공장으로 나를 끌어갔다. 거기서 만난 선이라는 여자의 아버지 이정수는 오사카에서도 이름난 소매치기 두목이고 우리 민족의 명예를 거들 떠 보지도 않는 불량배였다. 이정수의 딸 선이와 혼담문제는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나의 인격형성에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 뒤 나는 테니스를 치던 어느 서양 아가씨의 공을 집어 준 덕에 나는 그녀의 집 하우스보이가 됐다. 무슨 상사를 경영하는 남자 주인과 그 부인 그리고 그 외동딸 지나가 살았다.

6. 잊지 못할 여인 다께꼬와 사랑

1919년 6월 신가이찌의 여인숙을 나온 나는 근처 직업소개를 찾았다. 노다야라는 이름의 정육점 배달원으로 들어갔다. 주인 처녀 이름은 노다 다께코였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2년간 누워있고 아버지는 후꾸시마껭의 탄광에 있는 목재소를 경영하면서 소실과 함께 살았다.

다께꼬는 우에노 음악학교를 중퇴한 뒤 집안 일과 가게를 꾸려나갔다. 나는 보람 속에서 열심히 일했다. 이규팔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이 왔다. 동경으로 가서 노동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학교에 갈 결심을 했다. 나는 이 노다야 정육점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1920년 3월 다께꼬에게 “수십 만을 헤아리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취업장에서 혹사당하고 있고. 나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소. 당신을 사랑하는 태엽”이라고 편지를 쓰고 나왔다.

7. 투쟁의 서막 : 1922년 재동경 조선노동동맹 결성

동경에 도착한 나는 이규팔씨의 하숙집에서 함께 살았다. 이규팔은 청도 사람으로 나보다 3살 위였고 동양펠트공장부터 같이 일했다. 나는 동경 역전의 해상빌딩 신축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면서 정치영어학원에 들어갔다. 1920년 6월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동양척식회사에서 일하는 일본인 마쓰우라 슈꾸오는 톨스토이를 사모해 인도주의자의 소신을 굳히고 방 한칸을 계림장이란 이름으로 조선인에게 내놓았다. 김기풍, 이규팔, 김태엽, 양주동, 안막, 김우진(윤심덕의 애인) 등도 있었다. 나는 그 집을 드나들며 한국인 노동자들의 규합과 조직에 힘썼다. 정태성이란 무정부주의자는 1921년 서울서 발간되는 ‘신천지’라는 잡지에 무정부주의 논문을 발표했다. 동경에는 아리시마 다께오라는 유명한 인도주의 문학가도 있어 소작인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

정태성은 술을 먹더니 내게 유곽 슈사끼에 가자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도주의 문학가 아리시마는 반년 후 자기 소유의 가루이자와 별장에서 여기자 하다노 아끼꼬와 동반자살했다. 경남의 이경순 시인은 “1970년대 중반까지 정태성은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동경에 생존해 있다”고 했다.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인 흑우회원 중 정태성외 박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박열은 나와 동갑이었다. 박열은 사창가가 있는 슈사끼에서 인력거를 끌면서 입교대학에 다녔다. 식사는 사회주의자 이와다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박열은 식당에서 일하는 여종업원 가네꼬 후미꼬라는 여자와 사귀어 열렬히 사랑했다. 박열은 내성적이 얌전하고 조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전에 박열과 가네꼬 후미꼬는 경찰에 검거돼 사나운 고문을 받았다.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 받았다. 박열은 간수에게 청해 자기의 건강한 모습과 안부를 담은 사진을 부인과 같이 한 장 찍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일본 형사로 감방에 함께 있던 자가 그 사진을 보자 슬쩍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와 신문에 대서특필했다. 이 사건으로 여당 정우회 내각이 붕괴했다. 박열은 일본 형무소 감방에서 옥중생활하는 동안 다소 불미스런 면도 있었으나 민족에 대한 애착은 높았다.

최선명은 동양대 철학과를 나와 나를 동생처럼 아껴주는 민족주의자였는데 노동운동에는 비판적이었다. 동경의 사회주의 모임인 북성회가 조직된 건 1922년 2월이었다. 대표는 나의 당숙 어른인 김약수였고 주세죽(박헌영의 처), 조명희, 나 김태엽도 함께 들어갔다. 조금 뒤늦게 흑우회라는 한국인 단체가 한국인 무정부주의자 정태성 중심으로 조직됐다. 흑우회 본거지는 죠시가야꾸에 있었다. 회원은 홍진유, 이육사, 이기영, 박열 등이었다.

1922년 3월 중순 동경의 요도하시꾸 쓰노하스에서 ‘재동경 조선노동동맹’을 조직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효시였다. 여기엔 강대원, 이헌, 이규팔, 김태엽 등 참가했다. 조선노동동맹은 친일파 괴수 박춘금의 상애회와 갈등했다. 상애회는 일본 관권의 비호와 원조 아래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착취와 구박을 일삼았다. 상애회는 사사건건 우리와 충돌했다.

이 시기에 다까오 헤이베이의 피살사건이 났다. 동경을 중심으로 한 노동단체인 전선동맹은 사상적 차이나 민족적 차이를 초월한 순수한 연합체였다. 1922년 4월 초 다까오는 전선동맹 간사로 미쓰이 광산의 노동상황을 정찰했다. 광산 회사 고문변호사인 요네무라가 권총을 꺼내 다까오를 쏴 죽였다. 다까오의 장례는 당시 일본에서 무산자 변호사로 이름높던 후세 다쓰찌의 사회로 엄숙히 집행했다. 장례에 참석한 사람은 박열 등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후세 다쓰찌와 일본 사회주의 원로 사까이 도시히꼬, 사회주의 원로 야마가와 히도시, 사회주의자 아라바다께 간손, 사회주의자 다까쓰 세이또 등 중진급이 있었고, 한국인은 김약수, 김중한, 이헌, 박열, 가네꼬 후미꼬, 변희용(사회주의자, 박순천의 남편), 이규팔과 김태엽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의 노동운동계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쪼개졌다.

1922년 초여름 니이가다껭의 수력발전소 건설공사장에선 한국인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장상준과 이규팔은 이들의 빈소를 지키다가 납치돼 폭행당했는데 괴한들이 바로 상애회 놈들이었다.

8.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1923년 8월30일 저녁 7시 동경대지진이 났다. 동경 경시청 앞과 쓰루마끼죠 곳곳에 <불령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약을 풀어 넣고, 살인방화를 하니 경계하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죽창을 깎아 든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관동지방에서 6천여 명의 죄없는 한국인들이 도살됐다. 무정부주의 지도자 오스기 사까에 일가를 몰살한 것도 국수주의의 앞잡이 아마가스 마사히꼬 대위였다. 그는 도죠 히데끼 만주 관동군 참모장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협화회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상애회의 박춘금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복구작업을 시키고는 동경시청으로부터 받은 노임을 몽땅 가로챘다. 2300명의 하루 일당 2원씩 5600원을 가로채는 짓을 3개월이나 해먹었다. 그 돈으로 긴자에 댄스홀, 요정, 바 등을 차려 한국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다. 나는 긴자에 있는 다방을 부수기도 하고 청루에 가서 공짜로 여자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시기 다께꼬가 이규팔 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9. 24년 오사카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

나는 1923년 12월 중순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다. 관서지방에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다께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모친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숨졌다. 다께꼬는 이후 비명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성적인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감싸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은 나의 아내, 나는 당신의 남편이오>라고 말했다.

오사카에서 내가 먼저 만난 사람은 송장복과 지건홍 두 동지였다. 그들은 에비에 조선노동동맹의 간부였다. 나는 1924년 3월10일 오사카 나까노시마 공회당에서 <조선인 학살 규탄대회>을 열었다. 약 7천여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나는 “대창으로 국부를 찔려 죽은 조선 여자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었고, 철사로 손발과 몸뚱이를 전신주에 묶인 5, 6세 가량의 어린 아이들이 머리끝 정수리에 긴 쇠못이 박힌 채 죽어있었다”고 연설했다.

10. 신정회 사건

기시와다 방직공장의 쟁의사건은 약 200명의 제주 출신 한국 소녀들이 주동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맹렬히 쟁의했다. 우리는 공장을 상대로 교섭해 문제를 해결했다. 이 시기 사까이 노동동맹지부의 책임자는 김경선, 황보윤이었다.

1924년 4월 말 나는 경도 노동동맹이 준비하는 메이데이 강연을 요청 받았다. 1924년 5월1일 마루야마 공원에서 일본 노동총동맹 경도연합회가 메이데이 행사를 열었다. 여배우 하나이 아사꼬가 먼저 등단해 연설했다. 고향 청년인 박세건과 박휘일이 함께 했다. 뒤풀이에서 우리 셋이 얘기하다가 동포를 착취하는 신정회 얘기가 나왔다. 두 청년 가운데 박세건은 지금도 부산 기장군에 생존해 있다.

11. 선우회 창립대회 사건

1924년 11월 중순 오사카에서 친일파 거두인 이선홍은 선우회라는 친일단체 결성을 준비했다. 고영환 동지와 나는 이선홍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아 약 4개월 동안 다께꼬의 집에서 치료 받았다. 다께꼬는 쇠고기를 요리해 자기 입에 넣고 잘게 씹어서 내 입 속에 넣어 주었다. 그녀의 숭고한 사랑을 잊을 수 없다.

12. 중국 총공회 대회 참가

나는 1925년 3월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중국 총공회가 1925년 5월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나를 지명, 초청했다. 나는 거기서 모택동, 주은래, 주덕, 유소기를 만났다.

13. 에가미 자살 사건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때 레닌군은 반레닌파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반레닌파엔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레닌군은 살륙하고 탄압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 “어쩌자고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살육만 계속하느냐”고 비판했다.

1925년 6월 5일 나는 무정부주의자 에가미와 히데하라 유끼꼬의 결혼식장에 갔다. 결혼식 직후 두 사람은 자살했다. 이것이 당시 일본 무정부주의의 한 풍조였다.

14. 백의노동 신우회

나는 북륙지방에 가기 전 먼저 동경으로 가 쓰노하스에 있는 노동동맹 사무실에 들렀다. 당시 우리 조직은 상당히 침체돼 있었다. 다께꼬는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나와 함께 가겠다고 해 같이 고베를 떠났다.

1925년 12월 초 다께꼬와 나는 내 노동운동의 본거지를 도야마에 정하고 살림집은 인근의 다까오까에 따로 잡았다. 전철로 약 30분 거리였다. 나는 1926년 6월 중순 도야마 시내에 ‘백의노동 신우회’를 창립했다. 나는 오사카로 편지를 띄워 김업이라는 소년을 불러왔다. 김업은 당시 17살로 매우 민첩했다.

15. 구로베 발전소 공사장 사건

나는 진정서 형식으로 구로베 발전소 건설현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의 진상을 상세히 폭로하고 요구조건을 기록한 서류를 작성했다. 도야마 시내에 있는 사도구미 사무실로 찾아갔다. 구로베 발전소 건설공사를 청부맡아 시공하는 사또 건설회사의 사무실이었다.

나는 건설노동자들의 비참한 영양 상태와 낮은 임금, 악독한 함바주, 굴속의 열악한 작업환경, 청원경찰 철수, 노조결성 등을 요구했다. 동경에 가서 사또구미의 총수, 사또 스께구로를 만나 사태를 해결했다.

16. 모스미 발전소 공사장 대쟁의

1926년 11월말 모스미 발전소 건설공사장 쟁의사건이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다. 1천여 노동자 가운데 조선인이 700여명이었다. 낙반사고가 일어나 6명이 굴속에 묻혔다. 그 중 5명이 한국인이었다. 도야마 백의노동 신우회 내에서 분열과 거점을 획책하던 좌익계 건달 일파가 주도권을 잡겠다고 설쳤다.

나는 뜻밖에도 이 쟁의 때 이정수의 딸 선이를 만났다. 6명의 함몰 사망자 가운데 선이의 남편이 들어 있었다. 선이 부모는 개과천선하고 새 인생을 살겠다고 한국으로 가고 선이는 일본 땅에 남아 부모의 주선으로 오사카 소매치기 출신인 청년과 결혼했다. 나는 30원의 돈을 선이에게 쥐어주었다.

17. 모스미 쟁의 과정에서 죽은 다께꼬

내가 모스미 대쟁의에 빠져 있을 때 다께꼬는 눈속을 걸어 나를 찾아 쟁의현장에 왔다가 못 만나고 되돌아갔다. 그 뒤 다께꼬는 몸져 누워 집에서 홀로 죽었다.

뒤늦게 병원을 찾은 주치의였던 오노 박사는 “왜 이제 오나? 다께꼬는 죽었어”라고 말했다. 다께꼬가 죽자 나는 연일 술로 지샜다. 구레하 공원 까치 우리 앞에서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다께꼬가 죽자 가정부였던 오도꾸는 내가 모스미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나의 딸 막애를 업고 어디론지 도망가 버렸다. 오도꾸는 내가 처음 다께꼬의 정육점 배달부로 취직했을 때 나에게 애정을 품었으나 주인인 다께꼬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 그 그늘에서 자기감정을 숨기고 살아온 여자다.

18. 여관 여주인 노가미과 그 딸 아야꼬

자살 미수 끝에 경찰의 도움으로 투숙한 사사쓰강 여관의 여주인 노가미 부인의 딸 아야꼬는 미인이었다. 1927년 12월 말 아야꼬는 방학으로 동경에서 집에 와 있었다.

노가미 부인은 의도적으로 아야꼬와 나의 친교를 도왔다. 노가미 부인은 자기의 숨은 정을 실현하지 못하자 딸 아야꼬가 실현하기를 바랬다. 1928년 봄 아야꼬와 나는 결혼했다. 결혼 1년만에 아들 김규선을 얻었다. 그러나 규선은 1973년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야꼬는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고집했고 나를 찾아온 노동자들의 발 구린내를 참지 못했다.

나는 아야꼬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의 성격이나 취미나 생활이 서로 너무 달라 결국 불행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름 뒤 나는 정식으로 아야꼬와 이혼했다.

19. 후꾸다 검사와 투쟁

1931년 늦은 가을 나는 도야마 검철청 후꾸다 검사의 취조를 받았다. 후꾸다 검사는 일본 국수주의 골수였다. 나는 재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나는 3년 8개월을 징역 살았다. 1935년 나는 34살에 출옥했다. 형사들이 출옥 직후인 나를 부산으로 강제로 보냈다.

20. 2차 추방령 시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나와 노동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일본 노동총동맹과 전국노동평의회의 양대 노동단체와 조선인 노동총동맹도 완전히 지하로 들어갔다. 일본정부는 노동단체를 모조리 해체하고 산업보국연맹이란 어용단체를 만들어 노동자를 속박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의 아내와 결혼하고 아내의 고향인 김해군 대저면으로 이사했다. 여기서 딸 구화를 낳았다. 그러나 남바라는 순사가 내 집 앞에서 살았다. 1939년 11월 30일 나는 경남 경찰국의 도항증을 받아 부산부두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다시 갔다.

21. 패망해 가는 일본의 모습

나는 도야마에 가서 장모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야꼬와 사이에서 태어난 내 아들 규선을 데리고 194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22. 민족해방과 가시밭속의 노동운동

8.15 해방과 함께 나는 부산에서 건국노동총연맹(건로)을 조직했다. 전평의 초기엔 일본에서 나와 같이 노동운동을 했던 박광해와 김무룡도 있었다. 그리고 전평의 부산 책임자는 나의 팔촌 아우인 김시엽이었다. 나는 당시 남한 정세로 전평 노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평의 김무룡은 나를 찾아와 설득했다. 결국 남로당과 전평은 나에게 협박장을 보냈다. 당시 나는 내가 만든 건로를 대한노총에 합류시킨 뒤 나도 노총에 가담했다. 나는 대한노총 부산지구 초대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12월 13일 오전 전평 허성택 위원장과 일본서 나의 수하였던 김영택, 나의 팔촌 동생 김시엽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자네들 전평은 지금 노동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남로당의 정치적 이용물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노총은 초기엔 전평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순수한 권익을 위해 조직했으나 내가 건로를 이끌고 노총에 합류한 이후 점점 양상이 달라져 결국은 집권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노조가 보수정당의 이용물이 된다는 것은 비극이다.

1906년 프랑스 노동총연맹 대회는 아미앙 헌장을, 즉 정당이나 의회 기타의 국가기관을 전혀 무시하고 총파업을 최고 수단으로 하는 직접행동에 의해서만 노동자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 상디칼리스트 노조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23. 노동운동의 암흑시대 : 이승만의 노동정책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저지른 과오가 너무나 크다. 민족 주체세력을 확립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는 노총 위원장 전진한을 대한노총 위원장직과 사회부 장관직을 동시에 겸직하게 했다. 사회부 차관 오석천은 나의 친척이었다. 나는 전진한에게 “사회부 장관과 노총 위원장을 겸한다는 건 세계에서 유래가 없다”고 쏘아붙였다.

노동운동 근처에도 못 가보고 노동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노총 위원장을 하겠다고 쟁탈전을 벌였다. 대한노총에는 깡패 김두한과 김억조 등의 암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나는 조선방직회사 부사장인 박상규가 희사한 낙면 4트럭을 노총 사무실 건축비로 쓰려고 부산 대창동 창고업자 김상수의 창고에 보관했다. 그런데 한심스러운 것은 그것을 소위 노동운동을 한다는 자들 몇몇이 짜고 나 몰래 내다가 팔아먹었다. 나는 노총의 그런 꼴이 몹시 싫어졌다. 노총의 하는 일이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폭력과 부정을 일삼았다. 나는 고민끝에 노총을 떠나기로 했다.

1949년 여름 나는 대한노총 부산지부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열심히 공장을 찾아다니며 강의나 선전물을 돌렸다. 구덕동의 김성태 정동희 이기호, 경남도지사 이상룡(도지사 재임기간 1953.10~1957.2), 부산시 초대 민선시장 김종규, 경남경찰국 서무과장 문학동(이후 충북경철국장) 같은 이들이 나를 도왔다.

24. 이승만 독재정권의 마수

1950년 8월 나는 토성동 경남중학교 앞을 지나다가 내가 노총에서 일할 때 알았던 신경철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는 아편중독자였다. 그런 놈이 삼일사라는 육군특무부대의 김창룡 소장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신경철 때문에 삼일사에 잡혀갔다. 거기서 김약수(내 당숙), 김두봉(내 칠촌숙)을 만났는지 물었다. 삼일사에서 뜻하지 않게 문관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김창룡이 나를 빨갱이로 알고 죽이려 했지만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25. 꺼지지 않는 불길

4.19 혁명으로 60의 노장인 나는 다시 노동운동을 하기로 했다. 61년 혁신당에 장건상 권대복 등과 함께 들어갔다. 현대사회에서 정당을 갖지 못한 노동운동은 뿌리없는 나무와 같다고 뻐져리게 느꼈다. 그러나 5.16으로 물거품이 됐다. 나는 수년 이래 통일사회당원으로 근자엔 재건된 사회당원을 남아 있다. “한국의 노동자 여러분,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후기 : 1981년 2월 돗빠 김태엽

협조해주신 김말룡 카톨릭 노동삼당소장과 회사원 이용길, 화학노조 전 위원장 김병균씨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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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 일제강점기 , 김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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