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죽은 마르크스주의가 되어 버렸다

[낡은책] 다섯 개의 공산주의 (질 마르티네, 서동만 역, 종로서적, 1983.2)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경향신문에 소개된 기사
질 마르티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역사학을 전공했다. 1948년까지 프랑스 통신사 AFP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튀르>를 창간해 1964년까지 편집장을 지냈고 이 책을 쓸 때엔 <누벨 옵세르바튀르> 대표였다.

번역가 서동만은 노무현 정부때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박탈되면서 정치인을 변모했지만, 80년대 내내 공산주의를, 특히 북한을 해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 씨는 2009년 폐암으로 숨졌다. 1986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일본 동경대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와다 교수는 지금도 비정규직 문제 등을 연구하면서 일본에서 활동중이다.

저자 질 마르티네는 역시 프랑스 사람이다. 자유롭고 복잡한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답게 마르티네는 이 책에서 현실 공산주의에 대한 다양하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해석의 결과로 다양한 발전전망을 예견한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해석을 위해 실천과 직접행동을 자주 포기하곤 한다. 마르티네의 이 책이 딱 그렇다.

질 마르티네는 “사회주의 사회를 연구하는 데는 귀찮은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회주의는 실험에 앞서서 사상이 먼저 나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먼저 나온 사상에 비춰 실험을 살펴보고 해석한다. 누가 마르크스에 충실하고 누가 거역하는지? 누가 마르크스에 접근하고 누가 마르크스에서 이탈하는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다양하게 대답한다. 이들은 마르크스 교의에서 이탈했다는 대답보다는 현실을 왜곡하는 길을 택한다.


현실을 선험에 맞춘 분석과 해설

1939년 3월 사회주의 소련이 수백만의 소련 시민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할 때 그 속에는 수십만명의 공산당원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태연하게 “착취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억압해야 할 인간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런 ‘편향’은 역사적 환경에서 나왔다. 마르크스에게도, 레닌에게도 그 책임은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에는 19세기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어, 이것으로만 현대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 모델의 변종 4개

질 마르티네는 오늘날 사회주의에는 소련 모델 외에 4가지의 커다란 ‘변종’이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 대륙에 변종 2개가 있고 제3세계에 나머지 변종 2개가 있다는 거다.

유럽의 변종 2개는 자주관리와 시장 사회주의의 유고슬라비아와 1968년 민주화가 고조되었던 시기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들었고, 제3세계의 변종 2개는 대약진·문화혁명의 중국과 ‘상업 관계’의 배제를 목표로 하는 쿠바가 있다고 소개한다. 소련에 복종을 거부했던 사람은 티토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티토는 소련에 의연히 저항했던 최초의 인간이었다.

닮아가는 두 세계

질 마르티네는 역시 프랑스 사람답게 현실 공산주의를 분석해 독특한 방식의 해석을 내놓는다. 예로 마르티네는 아래 자신의 표현대로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는 태생적 한계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현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냈다. 이 계급은 구사회 안에서 잉태해 거기서 성장, 발전해 마침내는 혁명적 위기를 계기로 해 뛰쳐나왔다. 공산당 관료가 그들이다. 공산당 관료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을 “일시적으로” 떠맡는 것은 일정 정도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후 25년 동안 노동자 계급이 강해지고 경제도 이미 발전했고 “사회주의” 제국의 전부를 자기편으로 할 수 있는 나라에서도 이전과 같은 관료 대행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과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스스로 지배계급으로 전화시킬 능력이 있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유제 자본주의 없이 지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부르주아가 권력에서 추방된 현실 공산주의 나라에선 “새로운 계급”인 공산당 관료가, 부르주아가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남아있는 자본주의 나라에선 “테크노크라시”(기술관료) 구조가 생겼다.

제임스 버냄은 “소련의 관료 계층과 서구 제국의 경영자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말한다. 테크노크러트는 자본주의의 가장 진화한 형태다. 그런데 현실 공산주의 제국의 관료들의 출신 배경은 기술자가 아니라 정치가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주관적이고 동시에 군사행정적이다.

실천과 직접행동을 발목잡는 난해한 해석

질 마르티네는 앞서 노동자 계급이 지배계급이 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장래에 언젠가는 노동자계급이 행해야 할 결정적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계급은 고용, 해고, 노동의 리듬,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에 개입력을 높인다. 노동자 계급의 요구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새로운 계급인 관료를 포함한 사회의 전 세력의 동맹을 기대할 수도 있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 거기에 테크노크러트를 더한 ‘프라하의 봄’ 시대에 결성된 동맹을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도 자본주의가 보여준 적응 능력에는 놀라고 말았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는 프랑스에서는 레이몽 아롱이다. 그는 좌익 지식인들을 공격했다. 그는 “노동자주의의 신화에서 나온 기성의 관념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합리적 선택’을 주요 관심사로 했다.

유럽, 미국의 지식인 청년들이 테크노크러트적 이데올로기에 극도의 적의를 드러내면서 6.8 혁명을 일으켰다. 생산 수단을 국유화하거나 노동자 자주관리를 일반화한다고 지배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 미국의 ‘반문화’ 운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는 신루소주의가 지배적이고, 노동운동의 비중이 큰 유럽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한 새로운 인민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아롱과 갈브레이드는 스스로 ‘자본론’의 저자인 마르크스-레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공산당의 현실 마르크스주의도, 기존의 체제 반대파의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죽은 마르크스주의가 되어 버렸다.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 개량주의 운동의 기반이 보인다. 모든 문명은 폭력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결국은 어떤 문명도 폭력만을 기준으로 평가된 적은 없었다. 사회주의 사회만이 따로 취급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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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미옥


    오랬만에 레닌의 이름을 보니 반갑고
    레닌이 다시 복원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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