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는 어떻게 재벌이 되었나

[낡은책] 총수의 결단(한운사, 동광출판사, 1984.11, 338쪽)

LG와 GS그룹의 모태

저자가 한운사로 돼 있는 이 책 <총수의 결단>은 지금의 LG그룹이 된 럭키금성의 창업자 구인회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문이다. 한운사는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당대 최고의 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이가 재벌의 전기나 쓰는 대필작가였다. 재벌 자서전이나 전기는 한결같이 고래의 집안 내력부터 나온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재벌은 어찌 한결같이 윗대 어른들은 모조리 학식 있는 선비집안인지.

이 책을 보면 왜 LG 재벌은 모두가 ‘구’씨 성을 가졌는지, GS그룹의 재벌들은 모두가 ‘허’씨 성을 사용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책의 주인공 구인회가 한 마을의 여성 허을수와 결혼하면서 두 그룹의 모태가 됐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구인회와 인근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삼성 이병철의 인연까지 엿볼 수 있다.

한운사는 구인회를 일개 공장 직원의 신상까지도 신경을 쓰며 도와 줬던 자애로운 경영인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왜 지금도 LG 그룹엔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노동조합 같은 노조도 없을까. 경영자가 워낙 훌륭해서 그럴까?

중일전쟁과 옷감 사재기

1937년 식민지 조선 백성은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중일전쟁을 뒤치다꺼리 하느라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구인회는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 얘기를 미리 듣고 옷감을 사재기했다가 떼돈을 버는 것으로 초기 재화를 축적한다.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전쟁 덕에 부자가 됐던 구 씨는 해방 직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좌익 공산당 특유의 모함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고 만다.

포목상을 모든 돈을 무역업에 손을 댔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허가권을 쥔 경남도청 공무원이 고향 사람이란 지극히 단순한 이유로 화장품 제조 허가를 받아 다시 떼돈을 번다. 그것이 럭키크림의 시초다.

권력과 손잡은 라디오 생산

이승만 시절에 손을 낸 전자산업은 5.16 직후 위기를 맞는다. 구인회도 부정축재자 명단에 끼었다. 3주일이나 피신해야 했던 재벌은 흉내만 냈던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고 나와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인다. 박 정권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럭키금성은 활기를 되찾았다. 박정희가 왜 그토록 라디오 열광했는지는 다 아는 사실이다.

언론사업 특히 방송사업을 놓고 사돈인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벌인 불편한 관계도 LG의 입장에서 소상히 서술돼 있다. 박정희 시절 국가 기간산업이었던 정유사업까지 손을 댔지만 권력과 재벌은 이마저도 허가를 내준다. 구인회 사장이 세상을 떠난 1969년 12월에서 시작한 이 책은 되돌아 와 큰 아들 구자경에게로 장자 상속하는 모양으로 끝난다. 한운사의 미문(美文)이 압권이다. 아래는 한운사의 책을 요약했다.



프롤로그 : 연암이 가던 날

1969년 12월 30일 밤. 럭키표 화장품을 만들어 한때 한국 아가씨들의 볼에 크림을 제공해주던 구인회. 치약과 칫솔과 빗과 비누를 만들어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편리한 일상생활을 마련해 주던 구인회. 이 나라에 최초로 플라스틱 산업을 도입해 한국의 가정과 농업과 공업에 혁명을 일으켜 준 구인회. 우리나라 산업사상 처음으로 전자공업을 끌어들여 만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켜 준 금성사의 창시자 구인회.

인간 구인회는 푼돈을 아끼면서 큰 돈을 모아 쓸 때는 쓸 줄을 알았다. 그는 도도한 자세를 보이거나 오만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일개 공원의 신상문제에까지도 신경을 쓰며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구씨와 허씨 집성촌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난 구정득은 뒤에 <럭키 그룹>을 형성해 그 총수가 된 구인회다. 승내리에 먼저 자리잡은 것은 허씨 문중이다. 마을에 구씨네가 끼어든 건 정득으로부터 따지면 8대조인 구반공 때부터의 일이다. 구씨네는 대대로 허씨네 문중과 인연을 맺어다. 정득의 조부 만회 구연호 공은 홍문관 시독이었다.

독자 재서는 엄한 가풍 아래서 정득을 장남으로 많은 아이들을 얻었다. 정득은 여섯 살 때 교리인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정득은 꾀가 많고 장난이 심했다.

동생 득장(구철회의 아호)이 차종가로 양자 입정했지만 그들의 정의 또한 유난했다. 진주는 철종 말년 1862년 진주민란이 설명하듯 영남에선 대구와 더불어 권력이나 관료구조에 대한 반항의식이 어느 고보다도 강한 고장이다.

정득이 14살 때 허.구 양가는 또다시 인연을 맺었다. 신부는 바로 담 너머에 사는 천석꾼 허만식의 장녀 을수양, 을사생으로 정득보다 두 살 위였다. 신부네 집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옆집이다. 장가가자마자 정득은 아명을 버리고 인회라고 했다.

인회의 처남인 허선구 등은 벌써 외지에 나가 새 바람을 마시고 있었다. 인회는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후에 삼성의 총수 이병철도 한 반에서 잠깐 공부했다. 지수보통학교 허진구 선생은 축구와 테니스를 가르쳐 주었다. 지수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일본 규우슈우에서 온 다까시라 교장은 처자를 데리고 와 관사에 살았다. 학생들은 동맹휴학할 것을 선언했다.

천석꾼인 처가는 학비 대줄 것을 약속했다. 보통학교를 마치자 단신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중앙고보는 인촌 김성수가 인수한 후 중흥의 열매를 거두고 유난히 강한 민족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베푸는 학원이었다. 큰딸 양세(뒤에 구자숙)이 태어났다. 중앙고보 2학년을 마친 구인회는 고향에 정착할 것을 결심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1925년 봄, 장남 자경을 얻었다.

학교에서 배운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협동조합의 전무를 거쳐 이사장이 된 그는 후임인 허남석 전무와 마산 진주 등으로 다니며 석유와 일용품을 사다 놓았다.

중일전쟁의 덕을 본 구인회 상회

진주 사람들도 점차 천종상회 건너편에 구인회상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936년 여름 진주로 나와 토대를 잡고 이제는 해볼 만하다는 기분으로 있는 구인회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준 것이다. 병자년 여름의 장마였다. 비단장수 구인회는 상공업계에서는 진주의 유지가 되었고 일본인 2명 다음가는 득표로 상공회의소 의원으로 뽑혔다. 태회가 진주고보에 합격해 고향에서 나온 그 해 구인회가 30살 때다.

인회는 서울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마산에 들렀더니 일본 군대의 말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전쟁이 난다면 물자가 귀해진다. 그는 광목 1천짝 을 사놓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구인회상점은 재워 놓았던 것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8만원이라는 이득이 나왔다. 진주의 구인회는 이 무렵에 만주에 갔다.

1940년 7월 8일 만회 구교리는 수 80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는 깊이 생각하신 끝에 “딸을 사라. 세상은 변해서 별짓을 다하지만, 땅덩어리는 언제나 진짜 재산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1942년 5월 장남 자경은 단목골 하순봉의 장년 정임과 혼례식을 올렸다. 한문 소양이 깊은 19세의 꽃다운 신부였다.

해방 직후 땅부터 처분

일금 1만원을 은행구좌에서 찾아다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설뫼의 안희제나 승산의 구인회의 인연이다. 해방된 기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크게 소리치지는 않고 앞으로 할 일을 차분히 구상했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땅을 처리하라고 했다.

해방 직후 ‘구인회가 일본인의 고무공장을 인수했다. 그 대가로 구인회는 배를 내주어 일본인의 짐을 옮기게 했다. 구인회의 앞잡이는 경제계에 있던 모 형사다’ 등등 악소문이 돌았다. 39세의 구인회는 팔짱을 끼고 앉아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어느 쪽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주로 좌익 계열에서의 모함인 성 싶다. 공산당 특유의 교란작전의 시작이었다.

서대신동에다 적산 가옥을 한 채 샀다. <조선흥업사>라는 이름으로 제출한 무역업 허가원은 조선인에게 허가해주는 제1호였다. 이 무렵에 아우 철회의 사위가 된 허준구가 그의 부친을 모시고 어느 날 찾아왔다. 준구는 같은 승산의 만석꾼 허만정의 셋째 아들로 잘 생긴 얼굴에다 6척의 늘씬한 키다. 만정은 인회에게 돈을 내놓았다. 허준구의 나이 24세 때 일이다.

지연(地緣) 때문에 성공한 화장품 장사

조선흥업사의 일이 잘 안 되고 보니 신이 날 일이 없었다. 구정회는 회사에 붙어 있는 것도 심심했다. 정회는 헛일삼아 도청에 들러보았더니 그 담당자가 바로 고향 사람 아닌가. 원한다면 손쉽게 허가를 해 주마고 했다. 아우의 이야기를 들은 형은 깊이 생각했다. 아마스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 크림이 다 팔렸으니 더 달라고 요청이 쇄도했다. 70만원어치를 가지고 가서 1백만원 현금을 받아 즉각 부산으로 돌아왔다.

우리도 한 번 외국 여자 사진을 써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양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이목구비가 균형이 잡히고 영리해 보이고 예뻐 보인다. 생각 끝에 레테르의 여인은 유명한 미국 여배우 디아나 다빈을 택하기로 했다. 상표도 서양적인 것으로 갑시다. 럭키는 럭키한 스타트를 끊었다.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 없나. 플라스틱 산업에 손댔다.

플라스틱 시대

일본에 주문했던 플라스틱 관계 서적 6권을 샅샅이 읽었다. 럭키크림이 서대신동 구씨네 집에 갖다 준 돈은 불과 4, 5년 동안에 3억원을 넘었다. 3백만원을 가지고 화장품 제조업을 시작할 때의 백배가 된 셈이다.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2억원을 낼 터이니 원당 수입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나는 공업을 할 테니 당신은 무역을 하시오”라고 구 사장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점잖게 거절했다. 대망의 기계가 부두에 도착했다. 버클레이측 대표 월컥스는 술을 하도 즐겨 빨개진 코를 벌름거렸다.

예쁘고 아름다운 빗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마크를 ORIENTAL 이라고 영어로 넣었다. 비누갑과 칫솔을 만들라고 구 사장은 명령했다. 당시 피난수도 부산에는 김광식이라는 일본 출생의 이학박사가 있었다. <럭키>는 그가 국방부를 위한 과학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고문이 되어 달라고 청탁했다.

1952년 11월 부산진구 부전동에 새 공장을 세웠다. 같은 와트슨 스틸만 회사 제품으로 1만6천달러 가까이 가는 6온스짜리 기계를 주문했다. 치약도 만들어야 된다. 밤낮으로 공장을 지키고 관리하는 장남 자경은 교사를 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또 하나는 허준구의 형이고 정구의 동생인 허학구였다.

빗과 칫솔, 그리고 치약까지

“회사를 아는 사람이 숙직을 해야 회사가 크는 법이다.” 자경은 이때의 훈련 때문에 플라스틱 공장 내막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없이 환하게 알게 된 것이다. 구 사장이 미제 기계를 들여와 빗과 칫솔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같은 ICA 달러를 배당받아 일제 기계를 들여온 허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상고를 나온 머리 좋은 사람으로 세계를 내다보는 눈이 있어 플라스틱 시대의 막을 그의 손으로 올리고자 소망했다. 그런데 그 기계가 형편없는 것이었다. 고치면 고장나고, 좋을 만하면 주저앉게 하고, 사람 간장 다 태운 끝에 부도를 내 급기야 주인은 자살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출발해 한쪽은 흥했는데 다른 쪽은 망했다. 만약 이때 처지가 바뀌었다면 <럭키>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찔한 얘기다. 운이 좋은 면에선 칫솔도 마찬가지였다.

6.25 동란 전 삼용 토닉의 총본산 유한양행도 부산 오류동 공장에 칫솔 만드는 기계 너댓 대를 사다놓고 있었다. 대나무 대궁에 돼지털을 꽂아 만든 칫솔 시대를 청산하고, 나일론 털에다 날씬한 플라스틱 대궁을 마난천하에 공개해 찬탄과 이득을 한꺼번에 얻을 뻔한 그들의 행운은 6.25 동란이라는 공산군의 장난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서울 진출 교두보 마련

서울 선착의 두 주역. 태회를 선발대로 서울에 보냈다. 허준구의 동생 허신구가 다음 주역이다. 허신구는 승산의 만석꾼 허만정의 4남으로 태어나 동래중학을 거쳐 부산대를 나와 조선통운에 다녔다. 구인회 사장은 허신구를 불러 서울로 올라가 태회를 도우라고 했다.

박승찬은 인쇄소와 출판사를 한다고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동광동에 있는 평화실업으로 구인회를 찾아가 한 번에 일금 2억원을 수표로 받았다. 혈연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외부인사는 처음으로 <럭키>의 중역이 된 박승찬은 1954년 2월 럭키에 첫 발을 내디뎠다. 럭키 안엔 문리대 트리오가 생겼다. 정치과 출신인 태회와 평회 형제, 그리고 영문과의 박승찬이 굳게 손을 잡았다. 구 사장은 넷째 동생 평회에게 “콜게이트 치약의 처방을 알아내야 한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알아내라”고 했다.

1955년 1월 부산 연지동 골짜기에 새 공장이 섰다. 합성수지 가공시설을 대폭 증설하고 대망의 럭키치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구 사장은 “다음은 비누”라고 외쳤다. 구 사장은 글리세린을 대량 확보하기 위해 애경유지와 특수계약을 맺었다. 서울대 공과대 화공학과 출신의 조형제, 남상빈과 법대 최영용을 뽑았다. 럭키폴리케미칼의 박상호 부사장, 희성제지의 임종염 사장, 럭키카본의 홍종우 전무, 럭키석유화확의 한성갑 부사장, 금성알프스의 양한모 전무 등이 뒤를 이었다.

부정축재자에서 전자시대를 연 주역으로

윤옥현 상무와 이야기 하다가 귀를 번뜩 세웠다. LP레코드였다. “전자공업이 다음”이라고 외쳤다. ‘라디오’부터 생산하려고 했다. 만 10개월 동안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최초의 진공관식 국산 라디오를 조립했다. 표본은 미도파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럭키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5.16 직후엔 부정축재자 명단에 럭키가 끼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제계의 거물급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린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구사장은 사돈인 홍재선의 주선으로 사직동 어느 집 행랑방에 3주일 동안 은신했다. 교도소에 들어간 건 아우 구평회였다.

긴장은 차츰 풀렸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사업가들은 빨리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평회는 풀려나오고 구 사장도 자유로이 회사에 나갔다. 형제들과 자신들을 모아놓고 시국을 검토한 결과 혁명정부는 각종 산업의 왕성한 성장과 활동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럭키는 조심스레 새 기운을 얻었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혁명정부의 공보부장관 이원우는 평회, 박승찬과 문리대 동기동창으로 평소에도 구사장을 친형처럼 따랐다. 하루는 구사장이 이 장관을 만났다. 이 장관은 “럭키 쪽에서 농어촌에 라디오 몇 대쯤 주실랍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문 닫을 시기를 내달로 보느냐, 그 후 달로 보느냐던 금성사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로 용케 기운을 차리고 일어선 금성사는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힘입어 종합 전기기기 생산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 유수의 메이커인 히타치와 적산전력계 기술제휴도 성공했다.

1959년부터 시험 제작한 전화기는 이제 한국의 실정에 알맞게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확인한 체신부는 연말까지 약 40일 동안 7천2백대를 납품해 달라고 발주해왔다. 정부는 금성사의 실력을 바탕으로 케이블 공업에 착수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1962년 5월 발족한 게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다. 전선과 케이블 공장 건설을 1962년 10월부터 착수했다. 적산전력계를 생산한 건 1963년 11월. 독일 지멘스와 EMD(전전자)자동식교환기 기술제휴를 1963년 12월에 하고, 1964년 9월 제품을 생산할 정도로 빨랐다.
1963년 9월 13일 추석, 부산 공설운동장은 터져 나가라고 부산 시민들이 모였다. 흥겨운 잔치가 진행되는 사이 하늘에선 삐라가 날고 축제 무드는 무르익어, 상품 추첨에 들어갔을 때는 시민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얽히고 엮인 재벌 혼맥도

구 사장은 보신탕을 좋아했다. 차남 구 자승의 연분을 찾았다. 상대는 금성방직 전무였던 홍재선의 딸이었다. 다음은 3남 구자학의 차례였다. 이병철 사장의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미국 갈 생각하던 구자학은 어른들의 결론에 순순히 따랐다. 경기고를 나와 연세대로 진학한 아들 구자두는 미국으로 가 공부하고 있었다. 그 아래 구두회도 있었다. 럭키 구인회 회장은 제일은행 이보형 행장의 아들 이재원을 사위로 맞았다. 이들의 중매는 당시 제일은행 박노성 전무였다.

1957년쯤 셋째 동생 구태회는 형 구인회에게 ‘국회 진출’의 뜻을 알렸다. 자유당 조직은 방대하지만 아직 다져지지 않은 부문도 많았다. 1958년 5월 구태회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구 사장의 막내 구자극의 서울중학 합격과 동생 태회의 당선이 겹쳤다.

1966년 11월 12일 구인회의 막내딸 구순자는 대전지법 유헌열 판사의 아들로 서울지검 검사인 유지민과 결혼했다. 유지민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둘째아들 자승은 경제계 중진인 홍재선의 딸과 짝을 짓고, 셋째 구자학은 이병철의 딸과 결혼시키고, 넷째 구자두는 이홍배의 딸과 혼인시켰다. 둘째 딸 구자혜는 대림산업 창설자 이규덕의 며느리고 주었고 셋째 딸 구자영은 은행가인 이보형의 며느리로 보냈다. 막내 구자극은 해방둥이였다.

1959년 가을, 삼남에 사라호 태풍이 강타했다. 구 회장은 건강에 신경을 썼다. 친구로부터 홍콩에서 들어오는 좋은 약 얘기를 듣고 먹었다. 업존 뎁포라는 회춘약도 맞았다. 회춘 욕구는 구 회장 뿐만 아니라 당시 재계 인사들에게 유행처럼 번졌다. 골프야말로 가장 좋아하던 건강법의 하나였다. 구회장은 박승찬 전무와 아우 태회에게 골프를 배우라고 권했다.

구 사장은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될 거요. 공원들의 복지, 위락시설, 건강관리, 모두 신경을 세밀하게 써 불만 없도록 잘 하라”고 지시했다.

언론사업과 대한극장 불륜

언론과 기업은 불가근불가원이다. 삼성이 언론사 참여를 서둘렀다. 삼성은 1961년 12월 30일 라디오 서울과 동양방송을 허가받았다. 라디오 서울은 당초 언론사회학자 김규환 박사가 따낸 허가였으나 개설 준비 때 삼성으로 넘어갔다. 삼성의 제안대로 럭키가 50 : 50으로 출자해 운영했다. 동양방송 건설에 집중해 1964년 12월 7일 첫 방송했다. 럭키와 삼성의 공동출자로 설립한 동양방송은 안국화재 소유의 신세계백화점 5층에 설치했다.

TV국 운영은 삼성과 럭키 양측에서 파견 나온 직원의 부조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삼성은 처음엔 TV국을 럭키보고 맡으라고 했다. 구 회장은 사돈인 이병철 회장을 만나 삼성의 제안대로 라디오는 삼성이, TV는 럭키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삼성은 차일피일 미루었다.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던진 제안이었다. 다시 두 회장이 만난 자리에서 구 회장은 “자네가 다하게”하고 일어섰다.

이후 구 회장은 1968년 5월 국제신문을 인수했다. 국제신문에서 반생을 자란 하종배는 구회장과 외가 인척이다. 구 회장은 통영 출신 국회의원으로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에서 재무부 차관을 지낸 서정귀를 국제신문 사장으로 초빙했다.

어느 여자하고 대한극장에 가서 다 끝나고 불이 환해져서 돌아다보니 자기 집 식구들이 말없이 주욱 나가는 게 아닌가. 그만 혼비백산해 며칠 동안 말을 못했다. 하여간에 구회장과 서정귀는 이런 인연으로 맺어졌고 후일 호남정유를 낳게 하는 인연이 됐다.

하이타이로 시작한 화학산업

금성사가 독일 지멘스와 전전자자동식교환기제작기술을 제휴한 것은 1963년 12월이다. 동남아 여행에서 돌아온 허신구는 “방콕에서 빨래는 걸 보니 이상한 가루를 타 거품이 막 일어나 때가 신기하게 잘 빠집디다”고 보고했다. 1966년 3월 안양에 한국 최초의 합성세제 공장을 세워 럭키유지 산하에서 가동했다. 3년 뒤 공장시설을 두 배로 늘였다.

홍성언은 박승찬과 친했다. 동란 전 서울대 문리대에 학적을 두고 다 같이 외국인 기관에서 일했다. 홍은 당시 미8군 구매처장의 보좌역이었다. 구 회장은 1962년 5월15일 박승찬을 한국케이블 상무로 영입했다. 숱한 잡음을 헤치고 한국케이블은 업계의 총아가 됐다.

럭키재벌은 수위부터 사장까지 구씨 아니면 허씨라고 비난받는다. 외부인사는 김주홍 전무, 금성사 박승찬 전무, 럭키유지 이연두 전무가 고작이다. 재벌의 모체인 럭키화학은 아직도 구인회 회장이 몸소 맡는다. 럭키유지와 반도상사는 바로 아래 동생 구철회가, 금성사는 구정회씨가 사장이고, 구태회는 국회의원이다. 구평회는 럭키화학의 전무로, 구두희는 금성사 상무다.

1962년 8월 구회장의 큰 아들 구자경은 럭키화학 전무로, 둘째아들 구자승은 반도상사 상무로, 3남 구자학과 4남 구자두는 금성사 상무로 있다. 구자일과 구자극(대학재학중)이 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를 나온 구평회는 미국에서 3년을 공부한 브레인이고 플라스틱 제품 개발은 그의 착상이었다.

정유사업까지 확장

국제신보 사장을 하면서 서울에다 흥국상사를 세워 벙커C유를 취급하던 서정귀는 자주 구 회장을 찾아 상담했다. 서정귀는 흥국상사를 시작할 때 구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 서정귀와 구인회는 ‘정유’사업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정부는 “동력은 국영이라고 절대 안된다”고 했다. 구 회장은 “선진국에서 어느 정부가 정유사업을 하는 데가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가계약을 진행했다. 1996년 5월 7일자 정부는 신문에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공모>를 공고했다. 1966년 6월 10일 경제기획원에 모두 6건이 접수했다. 한양대 재단이 미국 에소스탠다드와 제휴한 한양석유공업과 럭키가 일본 미쓰이와 미국 소코니 모빌과 제휴한 호남정유가 각축해, 결국 호남정유로 정해졌다. 1966년 11월 17일 장기영 기획원장관은 내외 기자들을 모아 놓고 럭키화학계의 호남정유로 발표했다. 1967년 2월 20일 여수 시민들은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에 몰렸다. 대통령도 왔다.

1967년 3월 5일 독일 뤼프케 대통령이 금성사 부산 연지동 공장을 방문했다. 1966년 8월 금성사는 TV 수상기를 시장에 출시했다. 1967년 5월 구자경은 은혼식을 치렀다. 태회가 또다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69년 6월 3일 호남정유가 준공했다. 역시 대통령이 와서 축사했다. 미 칼텍스 본사의 릴리 회장도 인사말했다. 서정귀 이사 내외와 구회장 내외는 함께 미국으로 여행했다. 막내딸 구순자와 그녀의 남편 유지민도 미국서 만났다.

삼성 이병철과 불화 : 전자산업

하루는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금성사에 기술자 7, 8명이 빠져나갔습니다.” “섬성에서 전자에 손을 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돈 들여서 외국까지 파견해 기술을 익히게 한 사람들입니다”라고 했다. 삼성의 이병철은 어릴 때부터 우정으로 사귀고 끝내 자식을 혼인시켜 인연을 맺은 사돈지간인데.

낙조(落照)

원서동 마당에 서 있던 백 년 묵은 고목이 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대통령은 조화가 담긴 칠보화병을 보내왔다. 1970년 연초 시무식에서 구철회 사장은 회의실 중앙에 놓여있는 회장석을 가리키며 “자경이 자네가 회장 자리에 앉아서 취임 인사하게”라고 했다. 구철회는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년 후반기 럭키화학과 금성사가 호남정유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을 때 반도상사의 가발은 화려한 핀치히터 구실을 해냈다. 아들 자경은 연암문화재단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1971년 6월 럭키는 서정귀 사장과 함께 범한해상화재보험을 인수했다. 사장엔 작고한 회장과 사돈인 이보형 전 제일은행장이 취임했다. 1972년 동을 캐내는 구룡광산이 국내 수위의 실적을 올렸고 1973년엔 럭키 수퍼체인을 출발시켰다. 학교법인 연암학원도 설립해 청원군 성환에서 출발했다. 국제증권도 설립해 김주홍 사장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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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조선괴뢰패당

    결국 식민의역사가 만들어낸

    부끄러운 재벌사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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