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지금까지 빛나게 살고 있는 비밀

[새책] 나, 여성노동자(유경순 엮음, 1·2권, 2011.5. 그린비)

칠십 년대부터 현재까지, 40여년이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더욱 밑바닥으로 내려앉고 더욱 처절해졌는지도 모른다. 칠팔십 년대에 ‘노동자’는 핍박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시대인가?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기록을 보면 마치 ‘허공’에다 대고 싸우는 것 같다. 회사도 무반응, 사람들도 무반응, 사회도 무반응이다. 온몸을 내던졌는데 돌아오는 것이 침묵뿐이라면 그것만큼 힘든 것은 없는 것 같다.

<나, 여성노동자>가 1권보다 2권이 더 눈물 나는 것은 그 속에 현재 나의 무반응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간 길거리, 지하철 역, 인터넷에 붙어있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도와주십시오’라는 문구를 무심히 지나쳤다.

“나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이런 행태들을 역사가 반드시 심판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노동자들의 서러움과 분노가 강물이 되어 흐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이 바뀌어 이들을 심판하리라고 믿고 있다. (1권, 334쪽, 박육남)”

한일도루코에서 일했던 박육남 씨는 그녀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그녀의 믿음처럼 40년의 역사가 심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 역시 심판할 역사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나보다고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네들은’ 아직도 심판받지 않았고, 앞으로 심판받을 가능성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슬픈 현실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관심을 가장한 또 다른 무관심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한다고 새 시대, 새 역사가 올까?’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은 식상하고 별 소용도 없는 투쟁뿐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냉소적인 태도, 회의적인 질문에 발목이 잡힌다. 이것들은 진정한 물음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지키기 위한 도피처이자 변화를 피하기 위한 나태함일 가능성이 높다.

<나, 여성노동자>는 그 앞에서 도저히 회의적일 수 없는 그런 역사다. 이 책은 18명의 여성들의 일인칭 시점 혹은 인터뷰 형식을 통해, 칠십 년대부터 이천 년대까지를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책 속에서 역사적 사건을 익히지만, 동시에 그녀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단지 개인적 감정이 투사되었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들의 역사-이야기는 다른 종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것은 거대역사 속의 한 조각 퍼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들은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했다. 18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생계를 위해서 공장에 나갔다. 가족 살림에 한 입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조카와 남동생을 대학 보내려고, 싱글 맘으로 살아가기 위해,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으면서 그녀들은 여러 행보로 나아갔다.

우리의 투쟁이 역사적으로는 의미를 가질지 몰라도, 가리봉전자 노조 사람들에게는 아직 극복해야 하는 일그러진 상처와 분노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우어패럴 친구들의 다른 삶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노동자의식을 잃고 방황하며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해보려고 했던 일들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도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1권, 427쪽, 성훈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녀들의 삶은 평범하다. 그녀들은 블랙리스트로 쫓기면서 노조를 지탱했고 역사적인 대투쟁도 치러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람들끼리 부대끼면서 만들어낸 자질구레한 다툼, 연애, 눈물, 웃음, 친목, 상처, 오해들도 함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거대역사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일면들을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서, 오히려 그 굽이굽이 삶 자체가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8명의 주인공들은 그때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투쟁의 역사적 의미와도, 성공과 실패의 여부와도 상관없다. 게다가 그녀들은 투쟁을 현재진행형으로 전환시킨다. 노조상근자, 학부모, 성교육활동가, 생협활동 등 각기 서 있는 자리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어가고 있다. 그 자체로 빛나는, 이 평범하면서도 치열한 삶을 보면 이렇게 묻게 된다. 무엇이 이 삶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가?

2005년, 기륭전자노조원들은 1년 미만 비정규직을 모두 해고해버린 것에 대해 한국노동역사상 가장 긴 투쟁을 시작했다. 무려 1,895일 동안 투쟁한 것이다. 단식투쟁, 고공투쟁, 밥그릇투쟁 등 그 기간 동안 온갖 투쟁기술(?)이 나온 것 같다. 아무리 악을 써도 회사 측은 대답이 없었고, 경찰은 폭력을 휘둘렀고, 대법원은 비정규직들을 패소시켰다. 허공에다 외치는 고함. 그럼에도 끈질긴 투쟁 끝에 결국은 일부의 조합원들만 복귀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그런데 김소연 씨의 한마디가, 참 찡하면서도 뒤통수를 때린다. “그래도 원 없이 싸워보았다.” 어쩔 수 없이 당하고만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그 과정은 때론 억울하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원 없이 함께 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작 1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그 오랜 기간 동안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연대’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반쪽짜리 합의문을 안고서 그 다음을 꿈꾸는 김소연 씨의 모습은 서글프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2007년, 광주시청 청소용역 아줌마들이 해고에 반대해서 유쾌한(?) 투쟁을 벌였다. 물론 투쟁의 내용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5.18의 전두환과 뭐가 다르냐고 광주시장에게 쏘아붙이고, 전경들에게 ‘나, 니네 엄마들이다, 뭐라고 하지 마라’고 나무라는 모습은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집 안에만 있고 사회문제에는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았던 아줌마들의 저력! 결국 그녀들은 보기 드문 승리를 쟁취하여 현장으로 멋지게 되돌아갔다. 그런데 해고자가 되었다가 다시 청소부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멋있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증식되었다. 그녀들은 더 이상 단순한 아줌마가 아니고, 광주시장이나 전경들에게도 대들 수 있는 힘과 연대를 가진 아줌마들이다. 그래서 이 당당한 아줌마들의 모습은 멋지다.

<나, 여성노동자>에는 수많은 투쟁사례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성공한 투쟁은 몇 개 안 된다. 눈물을 삼키고 해산하거나, 반쪽짜리 합의서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투쟁의 이유는 어떤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일까? 칠팔십 년대를 보면 이런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노조의 합법성을 취득하기 위해 투쟁을 하는데, 하도 정부에서 대답하지 않으니까 조합원 모두가 악에 받혀서 3일에 죽을 각오를 결심한다. 헌데 미리 알아챈 정부가 6월 2일에 합법성을 인정하는 증서를 내준다. 그 순간 모든 조합원들이 허탈해져버렸다. 우리가 고작 이 종이 한 장을 얻기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투쟁은 ‘종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6년 동안 싸운 기륭전자노조, 아줌마파워로 승리한 광주시청 청소용역노조, 그 외 수많은 투쟁들이 그 자체로 빛났던 것은 다른 까닭에서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중앙권력과는 ‘다른’ 힘을 가진다는 것, 타자와 부딪히면서 함께 한다는 것, 내 밑에 사람 없지만 내 위에도 사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은 칠팔십 년대나 이천 년대나 똑같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 동지들도 하나둘 지구상에서 떠나가겠지만, 우리 후배들은 우리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배들은 70년대를 조합주의니 경제주의니 하고 평가절하한다. 지금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그들은 그 이상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평가하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는 그 시대에 목숨을 걸고 야합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했다고 본다. 단편적인 면만 보고 단언하거나 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보면 좋겠다. (1권, 287쪽, 유옥순)

우리는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 살아도 무엇이 ‘역사적으로’ 옳은 길인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필연’이란 것은 어쩌면 정말 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칠십 년대, 청계천에서 노동자들이 이를 악물고 청계노조를 결정하여 싸웠던 까닭은 간단했다. 너무 살기 힘들어서,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어서였다. 택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길, 이 ‘절박함’은 ‘함께’와 만났을 때 비로소 환하게 빛난다. 혼자서 싸운다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시야에만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께 하기 때문에 깨지고, 회의하고, 배우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게 맞지 않는 커다란 옷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지금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입은 옷의 어디가 크고 어디를 재단하면 될 것 같은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것을.… 나는 지금 배워가는 중에 있다.” (2권, 519쪽, 심선혜)

부족하지만 함께 한 발짝 나아가겠다는 이 마음 앞에서는 냉소적인 회의도 헛된 희망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개인의 일기를 무작정 ‘역사’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감정적으로만 호소하는 것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나, 여성노동자>는 그녀들의 일기가 아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기울여달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이 왜 힘이 없는가?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책은 생생히 보여준다. 한 사람의 존재는 수많은 인연관계들이 관통하고 있는 교차점이다. 전태일, 경찰관, 노동조합, 동지들, 그 외에 함께 했던 다른 사람들이 그녀들을 교차하고 있다. 그녀들로부터 출발하고 뻗어나가는 어떤 관계망의 다발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이다. 거대한 역사 속 일부로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 외부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진실이다. 18명의 여성들은 ‘역사적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여성노동자>에서 그녀들 존재로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들을 관통하는 수많은 인연관계들이 얽히고설키면서 그리는 그림이다. 그것은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비장하고, 때로는 유쾌하다. 존재의 의미, 존재의 무게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책을 다 읽은 우리는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나를 통과하고 있는 인연관계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회의적’이라는 폼 나는 단어를 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차단하면서 나란 존재를 너무 왜소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들이 지금까지 빛나게 살고 있는 비밀은 함께 했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여성노동자> 앞에서 회의적일 수 없는 까닭은 그녀들의 평범한 삶을 마주해서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보호막으로써 던져놓았던 질문들이 우문(愚問)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회의적일 수 없다. ‘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와 무관하게 우리는 늘 뭔가를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늘 함께이며, 그 속에 역사가 있다.

우리도 우리로부터 역사를 시작하기를, 누군가와 발걸음을 함께하면서 서로의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할 수 있다면 그 인연이 무관심 속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동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 여성노동자>를 읽고 내가 꿈꿨던 희망이다.


* 김해완 님은 <다른 십대의 탄생-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의 저자이며, 현재 1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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