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 시대의 서글픈 단면은 진보 지식인 사이에도 풍미했다

[낡은책] 상황과 희망(최일남, 어문각, 1987.1.15, 294쪽)

“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자유의 함량 부족을 가장 먼저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부르주와 작가였던 게오르규의 말을 인용한 최일남의 글은 절박하다. 이처럼 80년대 한국 지식인 글쟁이는 자유의 함량이 절대 부족했던 전두환 정권을 고발하면서도 서양인의 입을 빌려야 했다.

30년 전 시대상황을 잔잔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책 <상황과 희망>은 소설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최일남이 한땀한땀 써내려간 세평이다. 전교조의 맹아였던 80년대 중반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선언’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미국 것이라면 똥이라도 주워 먹을 친미주의 시대의 서글픈 단면은 당시 집권세력 뿐만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도 풍미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 KBS 사장을 지낸 박권상의 영국제 크리스탈 술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 이상의 유언을 둘러싼 새로운 환기, 막걸리 보안법의 단상, 월남 이상재의 민족주의 기상에 감동하는 장면 등 많은 한계를 지닌 글이지만 소설가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묻어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의 칼럼들은 ‘시점’이 없다. 저자가 서문을 ‘86년 가을’로 언급했으니 대체로 85-86년에 동아일보에 쓴 칼럼 같다. 나는 모두 86년으로 상정하고 글을 읽지만, 추후에 확인해야 한다.

당대 최고의 소설가 최일남 스스로가 밝히는 소설 뒷얘기와 함께 각각의 소설에서 자신이 그리려고 했던 바를 엿듣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오랜 시간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를 지냈고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강제해직될 때의 개인사를 담은 점이 특이하다. 같은 신문사 김중배도 그러했고 최일남 역시 해직 과정이 참 이상하다. 한국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국내를 비우고 미국, 일본, 멕시코 등지로 나가 있었다. 그것이 연수든지 취재여행이든지 간에 당시로선 엄청난 특혜임에 틀림없다.

독자의 관심을 끌만한 글을 저자가 단 소제목 그대로 요약해 소개한다.

외국인 외국인 외국인

재작년(84년) 가을 미국 청년 한명이 한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명목은 불법 취업. 서울 처녀들 그것도 돈 많은 걸프렌드를 사귀는 과정에서 저지른 엽색 행각이 말썽이었다. 먼저 이 청년도 영어 강사노릇을 했다. 학력과 자격은 없고 미국서 고등학교쯤만 나온 뜨내기였다. 그는 방콕으로 추방될 때도 “1년 뒤 그리운 서울에 다시 날아오겠다”고 말했다.

86년엔 프랑스 청년이다. 프랑스 시골의 음식점에서 부엌일을 했다. 이 청년은 뉴델리에서 만난 또래의 경험자에게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 소식을 듣고 김포공항에 착륙해 당장 프랑스 말 강사로 일했다. 한국 여자의 호기심과 썩어빠진 동경심을 이용해 땡전 한푼 안 들이고 재미 볼 수 있다. 위안부(양공주) 강모 양은 어느 신문에서 “제 돈 쓰며 따라 다니는 애들 탓에 우리들의 몸값이 십년 전과 같은 일이십 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상식과 명분의 회복
한국에도 두어 번 왔다 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했다. 토끼가 인간보다 먼저 배 안의 산소 결핍량을 감지하듯 시인은 그가 소속한 사회의 산소량, 자유의 함량 부족을 맨 먼저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걸핏하면 밥줄을 끊겠다니

당국이 ‘교육민주화 선언’을 한 중등교사들 중 주동자를 징계하겠다고 한다. 그들이 일종의 정치 활동을 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미성년자인 학생들의 사고와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징계해야 한다는 것인데, 교사들의 선언은 오히려 ‘교육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통해 아이들을 더 훌륭히 가르쳐야 한다는 자각에 다름 아니었다.

스승다운 스승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그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일 수 없다. 문교부야 말로 그런 선언을 했어야 합니다.

한국 여자와 ‘미즈’ 세상
<뉴욕 타임즈>가 지난달 20일부터 여성 호칭을 ‘미즈’로 쓰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즈가 일부러 사고까지 내면서 ‘미즈’라는 용어를 표준어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그 전에 맥그로힐이란 유명출판사는 체어맨을 체어퍼슨, 하우스와이프를 홍메이커로 고쳤다.

여성에 대한 우리의 호칭은 이광수나 김동인이 고안해낸 ‘그녀’가 있고, 이태준이 써는 ‘궐녀’도 있다. 한때 일본어 직역인 ‘피녀’와 박영준이 애용한 ‘그미’도 있다. 어떤 분은 ‘그니’라고 했다.

최근 20여 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여성단체연합 생존권 대책위가 부천서 성폭행 사건과 여성의 전화원장 김희선 씨 구속을 규탄하고 항의했다. 최근 미국서는 여성 저널리스트인 홀레트콜 다우링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책이 대단히 인기를 모았다. 현대의 미국 여성들이 자립을 희망하면서도 남성에 기대는 의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심리적 갈등을 그린 것이다.

레몬과 멜론과 죽을 때의 말

최근 문단에서 천재 시인 이상이 숨을 거두기 직전 레몬을 먹고 싶다고 했느냐를 놓고 가벼운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레몬이 정설이었다. 약 50년 전 1937년 동경의 동경대 병원에서 27살로 병사한 이상. 이상의 세계를 다룬 논문은 <레몬에 도달한 길 - 이상 연구> <레몬과 실존의 발견> <이상의 죽음 - 레몬이 있는 종생극> 등이 있다. 이상의 레몬은 불우한 도형수의 사치한 마지막 의지였다.

그런데 이상의 아내였다가 작고한 화가 김환기와 재혼한 수필가 김향안 여사가 ‘레몬설’을 뒤엎고 나왔다. 김향안은 잡지 <문학사상> (86년) 5월호의 연재 2회분에서 “센끼비야의 메롱”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메론을 사 와서 깎아 주었으나 이상은 받아넘기지 못하고 향기가 좋다며 미소 짓듯 표정이 한번 더 변했을 뿐 눈은 감겨진 채였다.

미국의 여피와 뉴컬러세대

미국 주류를 주름잡는 <와스프(WASP)> 계층의 W 는 화이트, A S 는 앵글로색슨, P 는 프로테스탄트다. 요즘 유행어로 <여피>도 있다. 작년말인가 <뉴스위크>는 ‘더 이어 오브 여피’라는 특집을 냈다. 여피는 ‘전문직을 가진 도시의 청년들’로 변호사 의사 애널리스트 등 고도의 사무직이다. 여피는 고급 샐러리맨을 지향하는 세대의 대명사다.

최근엔 여피도 퇴조하면서 <뉴컬러세대>가 등장했다. 뉴컬러세대는 20대에서 40대 초반에 들어선 사람으로, 블루와 화이트컬러의 구분을 거부한다. 경제적으론 중산층이고 직업은 교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회사원 등 다양하다. 구매력은 높고 기성제도와 연대감도 희박하다. 여피처럼 출세 지향은 아니고 혼전 성교나 낙태 마리화나에도 너그럽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보수적이다.

꿩 먹고 알 먹는 ‘어글리 코메리칸’

60년대 초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된 ‘어글리 아메리칸’이란 책이 있다. 해외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못된 짓을 해 미국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킨 ‘추악한 미국인’들을 신랄하게 고발한 책이다. 한국에 번역도 됐다. 자기 치부까지 여지없이 까발리는 미국 언론의 건강한 풍토 때문이다.

‘어글리 코메리칸’도 있다.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갖고 있으면서 돈은 한국서 벌어가는 이중국적의 ‘박쥐인생’이다. 예비군과 민방위훈련 면제는 물론이고 주민세도 내지 않는데 그런 족속들이 법무부 집계로만 줄잡아 5천명은 된다. 좋은 일에는 한국인 행세하고 궂은 일 생기면 외국인으로 빠져버리는 뻔뻔스러움이다. 캐나다는 다중국적을 허용하는 나라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 부담이 뒤따른다.

남아공화국이라는 나라

남아공의 ‘보어’인은 네덜란드 말로 ‘농부’라는 뜻이다. 백인들은 남에 땅에서 서로 주인이 되고자 보어전쟁을 티격태격하다가 남아공을 세운 건 1961년이다. 원주민의 땅을 약탈, 주인 행세를 해왔다. 흑백 인종차별정책에 대항해 싸우는 흑인주교 데스먼드 투투가 있다. 일부에선 투투 주교가 남아공 흑인들에겐 큰 영향이 없다고도 한다. 투투 주교는 재작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남아공은 인구 2할에 불과한 백인이 국토의 9할을 소유하고 통치한다. 흑인들을 거주지에만 묶어두는 패스법이 있다. 유색인종이 백인과 연애는 물론 성관계를 갖는 것도 처벌한다. 16살 넘는 흑인은 항상 신분증을 갖고 다녀야 하고 흑인 지역을 72시간 이상 떠날 수 없다.

아프리카민족희의(ANC)가 급진파를 대표한다. 최대 부족인 줄르족들의 인카타당이 온건파다. 경제는 영국계가, 정부는 네덜란드계가 잡고 있다. 영국 해외투자의 1할이 남아공에 나가 있고 현지에서 기업활동하는 영국인이 15만명이다. 백인 중 80만명이 영국 패스포트를 갖고 있다.

거칠고 속된 말은 누구 탓이냐

월남 이상재 선생은 80평생을 집 한 채 없이 지냈다. 시인 변영로가 월남을 회상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변영로의 아버지 변정상과 이상재는 잘 아는 사이였다.

통감부 시절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앉아 모임에 끼었다. “대감들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죠.” “대감들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니까, 두 분이 동경으로 가면 일본이 또 망할 것이 아니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가 명사들을 초대해 놓고는 감기가 들어 몸이 불편하다고 엄살을 떨었다. Y를 대표해 참석했던 월남이 “아니 감기는 대포로 못 고치시오?”

월남의 해학은 세상을 하직하는 자리에서도 남았다. 두 사람의 후배가 마지막 문병을 왔다. “이놈의 자식들, 늬들이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나만 옳은가

“영국을 생각한다”는 책을 써서 우리를 많이 깨우쳐준 기골있는 원로 언론인 박권상의 체험담은 영국이 얼마나 신뢰사회인가 보여준다. 박권상은 어느 날 서울서 온 손님을 모시고 영국제 수정잔 한 벌(12개)를 사는 쇼핑을 안내했다. 물론 <차이나 크래프트>라는 그릇집에서 사서 서울까지 소포로 탁송받았다. 반년 뒤 깨어진 그릇 한 개를 보내왔다. 점원은 “기억이 난다”며 한 개에 10파운드 하는 수정잔을 내주었다.

반면 한국에선 유언비어 단속에 걸린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들의 말 중에는 “지금의 국선변호사 제도는 있으나마나”와 “중공과 경제교류를 하면 유리할 것” “예비군 훈련에 가서 고스톱만 한다”는 것도 있다. 모두 즉결에 넘어갔다.

문화부장이란 자리

신문기자 생활 30여 년 동안 문화부 데스크로만 지낸 세월이 17년쯤이다. 내가 처음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한 건 대학 2학년 때다. 53년인가 54년인가 우연히 조선일보 기자시험을 쳤다. 시험장소는 소공동 치과대 건물이었다. 코리아나호텔 자리의 조선일보 사옥 앞 게시판에 1차 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조선일보에 1차 합격한 뒤 고민 끝에 다동의 백영사 출판사를 찾았다. 내가 전북일보 학생기자 때 같이 기자하던 이경훈 선배가 거기 있었다. 이 선배는 백영사 사장 백남홍과 경성사범 동창이었다. 이 선배는 당장 출판사에 나와 일하자고 했다. 나는 3년 동안 백영사 편집장을 마치고, 종합여성지 <여원>의 편집장을 3년째 했다.

동향의 임방현 김철순 선배가 찾아와 김철순 선배 집안 어른인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김원전이 새로 운영하는 <세계일보> 문화부장으로 와달라고 권했다. 그때 나는 대학원 1년을 마치고 논문만 내면 석사를 따는데도 갔다. 58년 <세계일보> 문화부장으로 들어갔다.

세계일보는 민국일보로 바꿔 천관우 편집국장, 조동건 부국장 아래에 송건호 이혜복 조석찬 임방현 조세형 이목우 남재희 김경환 남욱 서동구 임홍빈 정인량 김중배 계창호 김성우 등이 전면 교체됐다. 계창호는 나와 함께 문화부 데스크(부장대우)로 일했다.

몇 년 뒤 나와 함께 해인사에서 열렸던 전국 신문.통신사 문화부장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이규태가 함께했다. 민국일보 문화부 팀이 구성되자 우리는 우선 기고기사를 지양하고 우리가 직접 취재하고 목격한 일을 우리 손으로 쓰는 작업을 시작하자고 상의했다. 한국일보가 좋은 경쟁 상대였다.

영화평은 민국일보에선 황운헌이 썼는데 <흑인 올훼>의 평은 그의 시인기질이 담뿍 담긴 좋은 평이었다. 서평은 항의도 무수히 받았다. 말로만 하지 말고 반박 글을 주면 얼마든지 신문에 싣겠다고 해도 막상 써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미술 쪽이 그런 항의가 심했다.

기자가 신문사를 떠날 때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떠나는 배를 탄 건 여름이 한창 익어가는 1980년 7월 초순이었다. ‘광주사태’를 정점으로 나라 모양이 폭풍전야의 음산한 ‘반도’를 뒤로 했다. 이런 판국에 남의 나라에 깔려 있는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는 엉뚱한 여유가 내심 미안했다. 오래 전부터 예정된 기획취재여서 사의 출장 명령에 따라 나섰다.

멕시코 국내를 뛰어다니다가 서울의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과 통화 한번 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멕시코시티의 호텔이 2급쯤되는데 한 시간이 걸려 통과가 됐다. 편집국장에게 ‘너도 해직기자 명단에 들어 있다는 대답을 얻는데 성공했다. 출장기간 한 달을 소비하고 한 달이 더 남아 있었다.

본인은 물론이요, 회사의 뜻도 아닌 사표를 내 손으로 그것도 ‘일신상 사정으로 사직코자 하오니’식으로 썼다. 지난 80년 여름의 신문기자에 대한 대량해직조치는 원인불명의 ‘정신적 학살’과 다를 바가 없다. 목을 자른 주체가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도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직된 동아일보 출신끼리 <8.9 동우회>를 만들었다.

퇴직금에다 빚까지 내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설한 동료를 축하하러 가기도 했다. 그는 곧 두손을 털털 털고 물러났다. 우후죽순처럼 도시의 모퉁이마다 생겼던 생맥주집을 벌인 동료, 추탕집을 인수한 동료, 출판사를 차린 동료, 레코드 가게를 시작한 동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소홀히 했던 소설쓰기와 잡문을 부지런히 썼다. 처음엔 띄엄띄엄 들어오던 주문이 나중엔 골라잡아도 될 만큼의 양으로 불어났을 때 잃었던 자신도 서서히 회복됐다.

다 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생소한 공부도 했다. 시간강사 자리를 얻어 일주일에 한 번씩 천안을 오르내리는 일은 3년간이나 계속됐다.

자기 작품을 말할 때

나는 지금까지 일곱 개의 창작집을 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게 <홰치는 소리>다. 주의 깊게 관찰해 온 세태를 해학적으로 접근한 게 <홰치는 소리>다. 도시인들의 고향 회귀를 다룬 게 <세 고향>이다.

내 젊은 시절의 자서전은 <골방> <50년대 안개>가 있다. <홰치는 소리>는 동물적 건강 유지에만 미쳐 돌아가는 한 인물을 희화화했다. <골방>은 6.25 직후 내 고등학교 생활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친구 중엔 장교 계급장을 단 아이도 있고 졸병도 있었다. 계급없이 학도병으로 나갔던 아이도, 전투경찰로 공비토벌에 갔던 아이도 있었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피워댄 담배연기가 교실 안에 자욱한데도 선생님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중편소설 <50년대 안개>는 50년대 초 대학생활을 그렸다.

해방이나 8.15 문제를 집중 추구한 게 <거룩한 응달>이다. 여기서는 친일세력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했던가에 집중했다. 한마디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는 여기서 중대한 차질을 맞았다.

호기의 작가 오상원

오상원 형이 죽었다. 어느 날 명치 끝이 아파 매약으로 며칠 견디다가 동네 병원의 권유와 동료의 주선으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다 병세가 악화돼 보름만에 죽었다.

오상원은 신문기자로 생래적 기질을 타고났다. 처음 문화부에 있다가 젊은 기자시절 대부분을 현장에 뛰는 사회부에서 일했다. 최초의 참치잡이 원양어선에 동승하기도 했다.

오상원의 첫 작품은 희곡 <녹스는 파편>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재학중이던 1953년에 썼다. 2년 뒤 1958년 소설 <모반>이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57년엔 장편소설 <백지의 기록>을 사상계에 연재하기도 했다. 테러리스트의 고민을 담은 <모반>이나 <유예> <백지의 기록>등이 있다. 오상원은 강한 사회적 연대성과 함께 한 사람의 존재를 역사적 흐름속에서 파악하려고 했다. <모반>의 주인공 민은 허무와 회색빛 나른함이 묻어있는 청년이었다. 비애국자를 처단하는 비밀결사에 가담해 정치인 한 사람을 사살하고 자기 대신 누명을 쓰고 잡혀간 젊은이의 누이동생을 찾아가 병석의 어머니를 위해 약값을 주는 참된 휴머니즘에 눈뜬다.

1965년 <담배>라는 작품도 있다. 70년대엔 소설을 덜 쓰고 사회적 부조리를 일련의 우화형식에 담아 책을 냈다. 오상원은 카스트로에서 따온 ‘오스트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38선을 넘어온 실향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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