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개헌 논쟁이 오늘 진보정치에 말하는 것

[낡은책] 개헌과 민주화운동 (기사연 편, 민중사, 1986.7)

이 책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이 1986년 7월에 펴낸 조사연구총서 10번째 책이다. 서문은 1986년 7월 당시 기사연 원장 손학규가 썼다.

신민당이 던진 과제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당당히 발돋움했다.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에선 신민당의 개헌 투쟁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논쟁은 86년 가을 ‘개헌국면’을 맞아 다른 ‘개헌운동론’으로 옮겨가 더 깊은 문제로까지 진척돼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풍부하고 다양한 각 세력의 주장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통일전선 구축을 고민하는 2011년 오늘, 이 책은 25년 전 역사의 교훈 또는 반면교사로 적절하다. 2.12 총선에서 신민당과 일시 제휴했던 민중민주화운동 세력은 신민당의 압승에 상당한 충격과 고민에 휩싸인다. 총선에서 드러난 민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와 총선 뒤 여야의 개헌 공방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의 문제였다.

그런 고민이 개헌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87년 대투쟁의 기반을 형성했다. 지금 생각하면 쉬운 일이지만 살육의 정권 전두환이 버젓이 살아있던 1985년, 최고 권력인 대통령 뽑는 방식을 바꾸자는 헌법개정투쟁은 아무리 원-포인트 개정이라도 쉽지 않은 과제였다. 이들은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이 투쟁에서 결국 승리했다. 물론 민중의 혁명적 열기를 부르주와 법제도라는 낮은 틀로 제한해 결국 노태우 집권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비판도 맞는 말이다. 다만 진보대통합이 판치는 지금, 85년의 고민과 경험은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노동운동의 맹아기였던 당시 지금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앞선 대안을 제출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개헌을 둘러싼 제세력의 입장

이 책은 1985년 하반기를 ‘개헌운동의 방향 모색기’로, 86년 상반기를 ‘개헌운동의 대중투쟁기’로 나눠 분석한다. 신민당 등 부르주와 민주주의 세력과 민중운동세력의 입장 차이도 보여준다. 민민투, 반제직투론, 자민투 등 학생운동과 서노련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재야의 한 축인 민통련 등 각 민중운동세력들의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민민투는 민중의 열기를 혁명적 고양기로 인식하고 ‘헌법제정 민중의회’를 내세운다. 반제직투론은 신민당을 민중의 혁명의식을 오도하는 친미 세력으로 보고 ‘개헌투쟁 무용론’을 개진했다. 자민투는 개헌투쟁을 반미자주화 투쟁의 테두리 안에 배치하고자 했다.

서노련은 85년 8월 창립대회 결의문부터 ‘직선제를 포함한 전국민적 민주개헌투쟁에 총력을 다한다’고 선언하고 부르주와 정당을 뛰어넘는 ‘삼민헌법 쟁취투쟁론’을 구사한다. 당시 서노련은 인천, 안양 등 4개 노동운동단체가 연합해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론과 분명한 선을 긋는 다름의 개헌투쟁론을 명확히 했다.

이 보고서는 스스로 밝힌대로 연구원 나름의 가치판단과 평가를 최대한 자제했다. 이 책의 서술대로 본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서론 : 85년 2.12 총선과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 제안

84년 가을 이후 서울대 등 학생운동세력은 ‘조직과 투쟁노선’ 논쟁이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주체형성’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른바 CNP 논쟁이다.

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은 102석을 확보해 수권야당으로 발돋움했다. 신민당은 8월 전당대회에서 리더십을 실세화하고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를 바탕으로 ‘직선제 개헌’을 공식 당론으로 확인했다. 신민당은 85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개헌특위’ 구성 결의안을 내고 ‘개헌운동’에 들어갔다.

2.12 총선에서 신민당과 일시 제휴했던 민중민주화운동 세력은 신민당의 압승에 상당한 충격과 고민에 휩싸였다. 총선에서 드러난 민중의 민주화 열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문제와 총선 뒤 여야의 개헌 공방에 어떤 입장과 자세를 취할지의 문제였다.

개헌운동의 방향 모색기 (1985년 9~12월)

민중민주화운동 세력이 개헌운동론을 개진하는 데 쟁점은 정치권의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대응문제였다. 이 쟁점은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로 인식된 신민당 등 재야 정치세력과 민중민주화운동세력 간의 관계설정의 문제였다.

반제직투론을 주장하는 세력은 신민당을 친미 정치세력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대대적으로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으로 파악했다. 이들은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이 제안한 개헌운동 자체가 민중의 혁명의식을 오도하는 잘못된 운동이라고 비판하며 ‘개헌투쟁 무용론’을 개진했다. 반면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개헌운동에 조건없이 참여해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도 있었다.

신민당과 차별성 견지

그러나 대부분의 민중민주화운동 세력은 야당 정치세력과 차별성을 견지하면서 독자 프로그램으로 개헌운동 국면을 활용해야 한다는 대략의 합의점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직선제의 현재적 운동성을 인정하지만 다만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이 직선제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기본권) 획득을 개헌투쟁의 주요 내용으로 설정해 차별성을 견지한 연대를 구성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동운동 세력이 주도한 ‘삼민헌법 쟁취투쟁론’이다. 이는 ‘노동운동 세력의 대다수’와 학생운동 세력의 일부가 개헌투쟁에서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과 소위 삼민세력의 차별성을 증폭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전개한 투쟁론이다.
개헌투쟁 무용론을 주창한 학생운동 세력 중 ‘반제직투론’은 개헌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세력들의 권력투쟁을 위한 정치놀음으로 보고 반미 직접투쟁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

신민당과 서노련의 개헌투쟁 시각차이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은 민추협을 중심으로 85년 가을까지 여야간 개헌합의 -> 86년 봄까지 정부의 민주화 일정공개 -> 86년 말까지 개헌이행이라는 민주화 청사진을 갖고 개헌투쟁에 임했다. 1단계는 원내투쟁이었고, 2단계는 원내외 투쟁을 적절히 병행해 범국민운동으로서 개헌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집권 민정당은 85년 12월 신민당의 국회 내 개헌특위 설치안을 거부해 원내 정치협상은 실패했다.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서노련은 85년 8월 25일 창립대회 결의문에서 “우리는 직선제를 포함한 전국민적 민주개헌투쟁에 총력을 다한다”고 선언해 당시 민중민주운동 세력들 사이에서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상황을 타개하고 민주제개헌론을 공식 제기했다. 서노련은 85년 9월 19일자 <서노련신문>에서 “대통령직선에 그치는 개헌투쟁이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헌법제정 민중의회’의 소집과 거기서 새 민주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민중민주개헌 투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노련 등 노동운동세력은 “개헌이야말로 단지 대통령 바꾸기가 아닌 고통받는 민중들의 밝은 앞날을 기약하는 새로운 희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민중민주개헌론은 85년 10월 5일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안양지역 노동3권 쟁취위원회, 서노련 등 4개 노동운동단체가 연합해 ‘전국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를 결성하면서부터 다시금 ‘삼민헌법쟁취론’을 천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론은 서노련 등 노동계의 개헌투쟁 목표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서노련의 ‘삼민헌법쟁취론’은 이후 변함없는 일관된 하나의 개헌투쟁론으로 노동운동권에서 자리 잡았다.

제세력의 초기 고민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 달리 논리적 정합성을 둘러싼 내부논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서울대 <민주선언> 창간호(85년 9월13일)는 개헌운동을 “단순한 법적 개폐운동이 아니라 독재정권퇴진과 삼민이념과 병행하는 민중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하고 야권 정치세력의 개헌운동과는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 서울대 <민주선언> 제5호(85년 11월 1일)는 노동계의 삼민헌법쟁취투쟁론을 받아들여 삼민정부의 수립에 동의했다.

재야의 한 축인 민통련은 신민당 등 정치권의 개헌운동이 갖는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전두환 정권 퇴진이라는 전제하의 민주제개헌을 개헌운동의 기본노선으로 설정했다.

개헌운동 논쟁을 진행하면서 노동운동세력과 ‘반제론’을 주장하는 학생운동 일부는 개헌운동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전학련, 삼민투 등 당시 공식 학생운동 대표세력은 ‘현행 파쇼헌법철폐투쟁’을 행동으로까지 감행했다. 종교계와 민통련 등 재야 민주화세력은 개헌투쟁의 단초적 실천활동에 들어갔다. 청년운동은 개헌투쟁 무용론과 민주제 개헌론의 논쟁에서 확고히 벗어나지 못한 채 ‘운동의 방향과 의의’에 대한 내부 혼란을 계속했다.

개헌운동의 대중투쟁기 (1986년 1~6월)

학생운동 세력 중 하나인 민민투는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개헌 집회에서 나타난 민중의 열기를 ‘혁명적 열기’로 파악, 혁명적 봉기로 조직화하는 ‘헌법제정 민중의회’가 현 개헌국면 하에서의 절박한 과제라고 봤다.

자민투의 개헌운동은 당면투쟁에서 상당히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자민투의 개헌론은 청년학생운동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민주제 개헌론’과 내용적으로는 거의 같았다. 차이는 개헌투쟁을 반미자주화 투쟁이라는 정점의 테두리 안에 비치하는 정도였다. 자민투는 직선제 개헌이 원칙론에서 보면 개량적이지만 그것을 혁명적 관점에서 이용하면 운동발전에 봉사할 수 있고 현 시점에선 이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서노련은 86년 상반기 개헌투쟁을 임금투쟁과 병행해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 서노련은 96년 임투 목표를 “생활임금쟁취,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파업의 자유쟁취, 삼민통일헌법 쟁취”로 내걸었다. (서노련 신문 11호, 86년 2월 23일, 2면)

86년의 실천투쟁들

86년 들어 신민당, 종교계, 민통련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개헌투쟁 그 자체의 실천은 중요시하지 않는 자세로 일관했다.
민민투 중심의 NDR세력은 신민당이 개량화시키고 있는 민중들의 권력의식을 야권 정치세력의 울타리에서 끄집어 내 전면적으로 부각하고 조직하기 위해 ‘헌법제정 민중회의’ 소집을 요구하자는 일종의 ‘제헌투쟁’을 제창했다.

자민투는 개헌투쟁을 대통령 직선제를 강하게 내세워 이원집정부제 반대, 반전반핵 등 일련의 반미운동과 결합시키자는 주장을 했다. 서노련과 인노련 등 노동계는 ‘삼반정권타도 삼민헌법(정부)수립’을 일관하게 천명했다.

총평 : 폐쇄적 논쟁과 혼란

개헌운동론 논쟁은 다소 폐쇄적으로 진행됐다. 각 세력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분열했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직선제 개헌’ 문제를 변혁운동 주체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지가 당면의 해결과제였다.

서노련은 85년 9월 ‘삼민헌법 쟁취’ 투쟁의 슬로건으로 그들의 노선을 구체화했다. 서노련은 신민당과 차별성을 지나치게 의식해 개헌문제에 다소 소극 자세를 취하던 민중민주화 세력 내부에 개헌운동의 필요성을 새롭게 깨닫도록 자극했다.

86년 상반기 학생운동 일부 세력이 반미 투쟁의 기치를 들고 나와 학교는 새 논쟁에 휘말렸다. 자민투의 개헌운동은 신민당과 차별성 유지보다는 반미자주화 투쟁과 결합을 주장했고 신민당과 재야 정치세력의 민주제 개헌론의 의의를 반미운동의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할 것을 요구했다.

서노련은 신민당 개헌집회에서 드러나는 민중들의 열기를 ‘민중권력’ 수립의 의지로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자민투는 신민당과 차별성 유지라는 이유로 부정하던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민주제 개헌론’을 반미운동의 관점에서 새롭게 채택했다.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

86년 신민당의 개헌현판식 집회를 계기로 민중운동 진영은 위 두 가지 노선으로 양분됐다. ‘헌법제정 민중회의’ 입장은 87-88년을 민중봉기를 조직할 전술적 고양기로 파악해 개헌보다 민중권력 수립으로 나가는 투쟁을 강조했다. ‘민주제 개헌론’은 87-88년을 민중봉기 조직에는 아직 이르고 변혁운동의 주체 역량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준비기로 파악했다.

치열하게 논쟁을 전개했으나 개헌운동의 실천면에선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민중진영의 내부 논쟁과 무관하게 일반 대중들은 개헌운동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는 싸움으로 자각하고 신민당의 개헌현판식 집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70만 명에 가까운 대중들의 과감한 진출은 개헌문제를 놓고 혼란을 겪던 운동세력에게 개헌운동의 중요성과 역동성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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