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새책]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2012.03)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비극은 희극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재앙이면서 동시에 ‘혁명과 전환의 계기’이다. 이 원전사고를 지역적 사건으로 특수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반자본주의, 환경 문제, 비정규직 철폐, 여성주의 운동 등과 함께 연결되어야 한다. 이제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할 때다.

원자력은 나무나 석탄, 석유와 달리 고갈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 만년 이상 에너지 확보가 가능하다고 한다. 원자력은 온실가스도 배출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리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위험성을 은폐해 왔다. 원자력 발전소는 ‘핵무기 생산의 잠재기지’이며 그것은 ‘이윤 생산을 위한 에너지’라는 점이 철처히 은폐된 것이다.

원자력 발전이 저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가정하여 주민들이 피난 훈련을 한다고 해보자. 피난 구역 범위는 100km로 하고 매년 한 번씩 이런 훈련을 한다면 비용이 막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귀찮은 일’이다. 이 비용은 그동안 사회적 비용으로 돌려졌다. 그 사회적 비용은 주민들,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들의 신체로 부담해 온 것이다. 이 비용을 원자력 발전에 부여한다면 비용은 폭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은폐되고 원전에 대한 환상, 원전이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는 신화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자력은 단순히 하나의 에너지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형태의 자본 축적이자 사회적 통제이며 헤게모니’이다.

일본 정부와 이웃 나라 한국은 후쿠시마 재앙을 ‘원전 수출 확대의 기회’로 활용할 뿐이다. 일본 정부는 사태를 은폐하기 바쁘다. 괜찮다. 먹어도 된다. 하지만 다른 정보에 의하면 이미 방사능 오염은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아우슈비츠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로 사람들을 ‘간편하게’ 혹은 ‘클린하게’ 죽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방사능은 손대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 둘 죽이고 있다. 물론 그 대상은 대부분 가난하고 궁핍한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주부, 아이, 농민들(보이지 않거나 셈해지지 않는 사람들이다)이다. 원전 사고 작업반에 투입된 것은 군대가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죽어 가는데 가스나 방사능처럼 책임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의 재앙에 가깝다. 사람들은 날마다 일자리를 잃고 날마다 서바이벌 게임에 내몰린다. 불안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다면 현대인이 아니다. 과거 산업자본주의는 노동을 착취했지만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아예 ‘배제’하고 있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내게는 더 이상 임금 노동도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이번 원전 사고는 대기 중에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곧 핵 안보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고 한다. (주요)핵 권력 국가들이 모여 ‘핵 권력이 붕괴하지 않도록 사고 수습과 핵 테러 위험 방지’라는 명목 아래 진행되는 국제적 행사이다.

자본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도모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대안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중단시킬 대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보다 먼저 (자본주의적)사적 주체의 해체가 필요하다. 자본화된 주체는 자본의 체제 아래서 윤리나 선과 같은 가치는 팽개치고 이익, 성공, 부 만을 쫓는다.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한 주체는 자본과 혼연일체가 되어 도시를 농촌을, 지구를 끊임없이 개발, 재개발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재개발)은 일상이다.

이 주체는 지구를 억압해왔다. 그리고 지구를 사유화해 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무의식의 지구가 이런 인간의 오만에 상처를 낸 사건이었다. 지금, 세계와 이 지구의 ‘충돌’은 우리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무의식의 지구에 근거해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 인간의 오만은 주체 중심주의에 빠져 자연(지구)을 한낱 ‘인식되는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지구가 흔들리면 서있을 곳도 없으면서.

오늘, 일본 정부는 우왕좌왕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괜찮다고 애써 무마해보려 하지만 문제는 여기저기서 붉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팔리지 않는 야채들을 보며 벌써 몇 명이 자살했다. 가난해서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체념하고 있다. 방사능은 계급을 가리지 않았지만 사고의 피해는 계급적 성격을 띠고 나타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계급을 넘어, 지역을 넘어, 자본과 자본의 주체를 넘어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 또한 이대로라면 후쿠시마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또 다른 사고(재앙)를 기획하고 있을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화폐 지배의 폐지를 이야기하는 존 홀러웨이 부터 후쿠시마 이후에 선교(교회와 토건 국가의 결탁에 반대하여)는 가능하지 않다는 김진호까지 후쿠시마 사태를 바로 보고 그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보편화하자는 것이다. 이에 동참하며 일독 권하고 싶다.
태그

원전 , 후쿠시마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엄진희(다중지성의정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