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지 않는 카카오 농민의 삶

[인권오름]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 오를라 라이언 저, 최재훈 역, 경계, 2012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초콜릿을 다루려던 건 아니었다. 이제 막 발을 내디딘 얼치기 초보 출판쟁이로서 원래 염두에 뒀던 첫 책의 소재는 아프리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서아프리카였다. 그 계기는 지난 2010년 말 치러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선거 불복사태와 그로 인한 내전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던 단체에서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을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데 제대로 된 국내자료는 아예 전무하다시피 했고, 언론 기사도 단순히 사건의 나열에만 그칠 뿐이었다. 그때 속으로 마음먹었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치, 사회를 소개하는 책들을 꼭 내고야 말리라!

그러나 의욕과 열정만으로 당장의 현실을 훌쩍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 당최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가난하고 불쌍하고 항상 내전과 학살에 시달리는 ‘검은 대륙’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와 제한된 정보밖에 제공받지 못한 대다수 독자들에게 당장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치를 정면으로 깊게 파고드는 책을 내놓는다는 건 아무래도 거쳐야 할 단계를 대폭 건너 뛰어버린 비약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간략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동시에 오늘날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의 단면을 쉽게 전달해줄 수 있는 책을 고르고 고른 끝에 번역하기로 선택한 책이 바로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달콤함에 관한 잔혹 리포트>였다.

이 책의 저자 오를라 라이언은 로이터 통신 특파원 자격으로 3년간 서아프리카의 가나에 머물면서 이웃한 코트디부아르를 오가며 이 책을 썼다. 이는 스스로 이야기하듯이 “보통의 기자들이 다루는 수준을 넘어” 두 나라의 “정치와 종교, 문화, 그리고 생활 전반에 대한” 폭넓은 대화와 취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초콜릿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초국적 거대 자본과 두 나라 정부, 그리고 농민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간 기록의 결과물이었다. 저자의 그런 노력 덕분에 애초 출판사가 바라던 대로 가나와 코트디부아르의 근현대사를 간략하게나마 훑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미덕 또한 갖추고 있는 책이다.

물론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나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 부아니처럼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역사적 평가만으로도 족히 책 몇 권 분량은 나올법한 논쟁적 인물들에 대한 평면적인 접근 방식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또한, 출판사 입장에서 보자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초콜릿 산업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전체를 지탱해온 건 결국 한 알 한 알 카카오를 일궈온 농민들의 땀과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고질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한 해답 찾기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크게 두 가지, 바로 ‘시장을 통한 공정성 회복’과 ‘민주주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공정무역운동에 대해서, 그 운동을 이끌어나가고 동참하는 사람들의 선한 의도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 자체로 대안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이 아닐까 하는데, 공정무역의 창시자이자 막스 하벨라르 커피의 설립자인 니코 로전의 말을 인용해 공정무역은 어디까지나 “다양한 윤리적 운동(rainbow of ethical initiatives)”의 일환일 뿐 공정무역이 전체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거나 유일한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카카오 공급이 바닥날까봐 우려하는 기업들이 농민들로 하여금 카카오를 계속 재배하도록 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돌려줄 방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끔 시장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냉정한 진단이다.

민주주의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는 1992년 이래로 다섯 차례의 민주적인 선거와 두 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경험한 가나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최근 들어 가나 농민들의 삶을 미약하나마 개선시킨 건 공정무역 초콜릿을 집어 드는 부자 나라 소비자들의 찰나의 선택이 아니라, “투표용지에 찍는 붓두껍, 공정한 개표,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 그리고 농민들은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유권자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한다. 즉, 문제 해결의 열쇠는 결국 그 나라 국민들이 세계시장에서 자국 농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정부를 세울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글쎄, 독자들이 이 책에 제시된 내용에 대해 과연 얼마나 공감하고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측은지심과 연민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켜 놓고는 정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도덕적인 설교만 늘어놓는 책보다는, 현실의 변화로 이끌 해답을 찾기 위해 원점에서부터 하나하나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재료를 던져주는 책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 애초 2005년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선거는 로랑 그바그보 당시 대통령에 의해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한 끝에 2010년 11월 28일에야 겨우 결선투표가 진행됐다. 그리고 나흘 뒤 선거관리위원회는 야당후보인 알라싼 와타라가 54.1%의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그바그보는 와타라의 지지층이 밀집된 북부지방에서 광범위한 선거부정이 저질러졌다며 선거결과에 불복했다. 그때부터 양측 지지자들 간에 빚어진 유혈 충돌은 끝내 내전으로까지 이어졌고, 유엔평화유지군과 프랑스군이 파병된 끝에 그바그보는 2011년 4월 11일에 부인과 함께 체포, 현재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을 받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구금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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