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현대화'인가

[최인기의 사진세상](19) 부산 자갈치시장


비릿한 바닷가의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그리고 멀리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아저씨 어서 오이소” 억센 목소리와 싱싱한 해산물을 손에 쥔 자갈치 아지매의 모습에서 이곳이 부산의 자갈치시장임을 실감합니다. 부산하면 자갈치. 자갈치하면 아지매 아니겠습니까? 자갈치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과 서구 충무동에 있습니다. 원래는 현재 부산시청이 있는 용미산 동남쪽 해안과 남포동 건어물시장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1930년대 남항이 매립된 뒤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습니다. 자갈치란 이름도, 저는 이곳에서 생선갈치를 팔아 자갈치로 알고 있었는데 충무동 로터리까지 뻗어 있던 자갈밭을 자갈처(處)라 불렀던 데서 유래했답니다. 부산역에서 자갈치시장을 가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자갈치시장역에서 내리거나 부산역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27번을 타면 한번에 갑니다. 자갈치시장 맞은 편은 남포동이고, 부산 국제영화제가 이곳에서 개최됩니다. 근처에 용두산공원과 국제시장이 있습니다.


자갈치시장에 대해 자료를 더 찾아보니 1889년 일제강점기 부산수산주식회사를 세우면서부터 출발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1922년에 이르러 부산 어업협동조합이 남포동에 건물을 짓고 위탁판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자갈치시장 상인들이 구심점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부산의 어시장은 북항의 부산수산주식회사와 남항의 부산어협 위탁판매장으로 양분되었는데, 그 뒤 부산수산주식회사는 국내 최대의 어시장인 현재의 부산 공동어시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남항에 출어하는 영세어선들의 어획물을 다루는 영세 상인들이 부산어협 위탁판매장 주변에 모여 지금의 자갈치시장을 이루었답니다. 현재는 전용면적 7,243㎡에 부산어업협동조합·어패류조합 등 근대화된 어시장이 480여 개의 점포를 형성해 주로 연안이나 남해에서 잡히는 대구·청어·갈치·조개·해조류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곳과의 인연은 2005년 자갈치시장 현대화사업 추진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자갈치시장 노점상 단속을 둘러싼 기사가 한참 흘러나올 즈음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이 명함과 유인물을 잔뜩 싸들고 자갈치시장을 방문했습니다. 자갈치시장 앞으로 도로가 뚫려 노점상이 없어질 운명이라는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 나선 길이었지만 막상 자갈치시장 노점상들은 천하태평이었습니다. 단속의 현실을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갈치시장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계기는 오래전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무렵 한 월간지에 실린 최민식 작가의 사진을 통해서입니다. ‘단속 반원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가는 노점상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쿵! 하고 머리와 가슴을 쳤습니다. 사진이란 게 집안의 대소사나 여행지에서 풍경을 담는 것으로 인식했던 저에게 최민식 작가의 사진은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저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책과 선배 그리고 동료 못지않게 이 한 장의 사진은 아직까지 가슴 속 깊이 잔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자갈치시장에 가보면 최민식 작가를 기억하는 노점상분들이 계십니다. 아래 사진 속의 붕어빵 할머니십니다.


붕어빵을 파시는 할머니께서는 호적나이로 39년생으로 8.15 광복이 되고 내려오셨답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5살 때부터 자갈치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성함을 여쭙자 잊어버렸다며 말씀을 안 해주십니다. 전에는 재봉틀 하나 갖다 놓고 남자 바지며 잠바, 작업복을 고쳐주면서 옷을 팔다가 IMF 이후부터 붕어빵을 팔기 시작하셨답니다. 붕어빵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붕어빵 반죽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뭐라도 한두 가지 더 들어가 아주 맛있답니다. 단골들도 많은데 어떤 일본교포는 붕어빵 먹고 싶다고 며칠 전에도 찾아왔다며 자랑이십니다. 그리고 붕어빵 할머니는 딸 둘에 아들 하나 모두 시장에서 벌어 키웠답니다. 많이는 못 벌어도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도 아이들을 키워냈다고 하십니다. 이제 자녀분들이 쉬라 해도 쉬면 뭐하냐며 길거리 나앉아 있어도 남한테 욕 안 먹고 손가락질 안 받으면 그만이시랍니다. 지난여름 할머니를 취재하고 가을에 사진을 뽑아 다시 찾아갔는데 이날은 붕어빵 틀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할머니는 뵙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자갈치시장 노점상들을 조직하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찾지만 자갈치 노점상은 점차 줄어들고 조직은 안 되고 있습니다.


사진은 올해 일흔이 넘으신 연지 아줌마(사실은 할머니)이십니다. 자갈치시장 공판장 내 상인들은 사진 찍는 것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카메라를 들이댔다가는 크게 혼쭐이 납니다. 연지 아줌마도 처음에는 "뭐에 쓰려고 사진을 찍어?"라며 화를 내셨습니다. "자갈치아지매들 장사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어요"라며 "인터넷에 올리면 홍보도 되고 좋지 않아요?" 하며 아양을 떨었더니 "그럼 예쁘게 찍으라" 하십니다. 연지 아줌마에게 하루에 몇 마리나 생선 배를 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큰둥하게 생선 사가면 가르쳐 주시겠답니다. 커다란 생선을 검정 비닐에 넣고 하루 종일 다닐 수 없어 곤란하다 그러자 “내 찍은 사진 다음에 꼭 돌려줘” 하십니다. 그렇게 수다를 떠는데 지나가던 외국인 여러 명도 끼어들어 신기하다는 듯 작은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어 댑니다. 이후로 자갈치시장 공판장에 들러 연지 아줌마에게 찍은 사진을 드리면서 조금씩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연지 아줌마의 능숙한 칼솜씨는 하루 이틀 단련된 솜씨가 아닐 것입니다. 한겨울의 뼛속을 스미는 바람과 여름의 무더위를 싹둑싹둑 자르고 지금까지 피 튀기게 달려왔을 것입니다. 깊게 팬 검은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하긴 가족의 운명이 저 칼끝에 달려 있다면 뭔들 못 베겠습니까?




그런데 자갈치시장의 현대화 사업은 과연 성공했을까요? 아직 신통치 않은 거 같습니다. 2012년 11월 29일 대선을 앞두고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이명박 정부는 바다를 포기했다"면서 "바다를 포기한 이명박 정부로 인해 어민과 서민 생존의 터전인 바다를 빼앗으면서 수산업과 자갈치시장을 위기로 내몰았다"고 관련 대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사실상 국내의 어시장 현대화 사업은 부진을 면치 못하거나 오히려 현대화 사업 이후 상권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산의 ‘다대표 씨랜드, 인천종합어시장, 속초의 씨푸드 랜드’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상가에서 영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기보다 결과적으로 높은 임대료 수익만을 챙기기 위해 점포를 분양하는 마인드가 시장 활성화를 저해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무리한 현대화 사업에 따른 결과물인 듯합니다.


자갈치 시장을 끼고 영도대교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오래된 건어물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한 모습이 나옵니다. 상점이 뜸해지는 곳에 이르자 작은 사거리가 나오고 바다 방향 우측으로 꺾어지는 좁은 길 하나가 또 나타납니다. 얼핏 보면 바다와 함께 다리 공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텐데요. 이곳이 바로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잇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인 영도다리입니다. 1934년 11월23일 오전 10시30분 폭죽을 신호로 영도다리는 개통되었는데요. 당시 부산인구가 16만 명이었다는데 그날 이 다리를 건넌 사람은 무려 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물론 일제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지만 한국전쟁 피난시절 가족을 잃게 되면 이곳 영도다리에서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남겼을 만큼 부산에서는 상징적인 곳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가수 현인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는 영도다리는 2013년 7월에 새롭게 건설될 예정입니다. 영도다리 밑에는 오래된 점집들이 남아있습니다. 1970년에 찍은 주명덕 사진작가의 사진에서도 영도다리 부근에 작은 점집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침 미닫이문이 반쯤 열린 점집 사이로 카메라를 꺼내 "할머니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그러자 빨간 홍시를 맛나게 자시던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십니다. 어? 잠시 당황했습니다. 점집 할머니는 앞을 못 보시는 시각장애인이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적일 텐데요. 점쟁이 할머니는 자신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절망하고 슬픔을 안고 사는 불투명한 사람들의 미래를 점으로 달래며 아픈 상처를 다독였을 거라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2012년 3차 희망버스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여름철 휴가도 반납하고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오른 김진숙 부산 민주노총 지도 위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버스는 부산대교 입구에서 경찰에 의해 막혀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항의시위를 하고 밀고 당기면서 경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삼삼오오 저지선을 뚫고 영도다리를 유유히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라는 걸 곧잘 무지개에 비유합니다. 눈앞에서 분명히 보이지만 허망하게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저 멀리 떠있는 무지개처럼, 어쩌면 희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도다리 위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면, 우리가 중간에 주저앉았다면 그리고 가봐야 별것 없을지 모른다고 포기했다면, 그날의 희망버스는 아니 그 후에도 희망버스는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주저앉을 수 있나요? 저기 저렇게 보이는데요. 저 다리만 건너면 동지를 만날 수 있는데요.


자갈치시장과 그 옆의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자국 어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거나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 만큼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그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시화는 새로운 계급관계와 근대사회체제 형성과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는 압축적이었던 만큼 단순히 이농현상으로 국한되는 인구집중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는 사람을 위해 건설되기보다 이윤 확장을 위한 방편이 되어 전통적인 인간관계의 단절을 불러왔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영도다리 근처에는 부산의 제2롯데월드가 들어섭니다. 영도다리 주변의 환경은 물론 다리 밑 점집의 운명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게 분명합니다. 자갈치시장도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근대적인 소비관계의 확산과 유통관계로 빠르게 재편되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자갈치시장 노점상은 단속보다도 더 무서운 경쟁력을 잃게 되어 점차 사라져 갈 것입니다. 영도다리 밑 계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 봅니다.


다음 이야기는 무문별한 현대화사업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고 다시 예전의 활기찬 재래시장으로 돌아간 부산의 기장시장을 방문할 차례입니다.

* 두산백과 ‘영도다리와 자갈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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