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최인기의 사진세상](25) 동묘에 터 잡은 벼룩시장


청계천을 따라 황학동을 걷노라면 그 무지막지한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입니다. 개발로 인해 사람들 삶이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정말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청계천입니다. 다행인 것은 비록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 황학동이 33층 롯데캐슬에 가려있지만 ‘장안레코드사’ ‘돌 레코드사’의 간판은 수십 년 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버티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한때 청계천 황학동은 구제 옷과 길거리 약장수의 만담 그리고 가판대에 조잡하게 걸려있는 포르노 책들이 넘쳐났습니다. 헌책방 만화책 사이사이로 펼쳐 있는 주간지 ‘선데이서울’의 화보에 실린 아슬아슬한 수영복 차림의 영화배우 사진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습니다. 특히 당대의 트로이카 여배우인 정윤희의 도톰한 입술과 장미희의 살인미소 유지인의 육감어린 사진들은 기회가 포착되는 대로 슬그머니 찢겨져 책가방 사이로 몰래 들어왔고, 그렇게 쌓인 야한 사진들은 또다시 차곡차곡 스크랩 되어 학교 아이들 사이에 최고의 상품으로 밀거래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야한 비밀들을 이곳 황학동은 속 시원히 풀어주었습니다. 게다가 부수적인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던 셈입니다. 80년대 청계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의 기억입니다.


황학동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은 동묘주변에 새롭게 터전을 확보했습니다. 지하철 6호선 동묘역 5번 출구와 1호선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그곳부터 장이 펼쳐집니다. 매일 장이 서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평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제 옛날 청계천 황학동 ‘벼룩시장’의 명성을 인근 ‘동묘’에서 다시 만나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숭신초등학교 앞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텔레비전이 층층이 쌓여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옆에 수리중인 냉장고와 고장 난 난로와 유행이 지난 전자제품 들이 속살을 드러내 놓고 마치 수술대 위의 환자처럼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앞을 천천히 구경을 하면서 걷고 있노라니 몇몇 노점상들이 먼저 눈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잘 지내냐고 요즘 단체는 잘 돌아가냐고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날씨가 풀리니까 나왔네?” 하며 번데기 아줌마가 아는 체를 합니다. 번데기 천 원어치를 시키자 작은 종이컵에 가득 담아주십니다. 짭쪼름하고 고소한 번데기 맛이 입안에 확 퍼집니다. 작은 트럭 위에는 잡다구리한 물건들을 모아 놓고 다다구리(물건을 한꺼번에 모아 덤핑으로 파는 일)를 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트럭을 둘러싸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물건 속에서 뭔가 쓸 만한 물건을 고르느라 분주합니다. 현금이 오고가고 고함소리도 간간이 들립니다. 이번에는 삼삼오오 어르신들이 몰려 계시는 곳을 비집고 들어가니 삐까번쩍 광을 내는 약을 파는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열심히 입담을 펼치십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해 구경꾼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봤습니다.


어? 그런데 이게 누구입니까? 지난번 사진세상 ‘가든파이브라는 텅 빈 신화’ 편에 실린 유산화 씨의 어머니십니다. 청계천에서 구제 옷을 팔고 계시네요. 안부를 묻자 오늘도 따님은 서울시에 들어가 ‘가든파이브’ 문제로 공무원을 만나고 계신다고 귀띔해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고 삶에 현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오래된 명함첩을 뒤져 마침내 연락처를 찾아냈습니다. 청계천 삼일아파트 철거민 대책위 위원장을 맡았던 최용규 씨(58세)입니다. 약 6년만의 만남입니다. 최용규 씨는 한때 청계천 상인에 대한 이주대책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고 소위 미 해당자가 되었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강행되기 직전 카메라를 메고 지방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이미 서울시에서는 이곳 주민들에게 이주대책과 보상이 매듭지어진 상태였어요. 한번 지방에 내려가면 몇 달 동안 붙잡아 두는 방랑벽 때문에 당시 실시한 상인들에 대한 실태조사에 응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던 거죠.”

그의 이름 석 자보다 미 해당자라는 단어가 그를 설명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와 같은 이들이 청계천변에는 당시 수십 명 아니 백 여 명에 육박했습니다. ‘된다 안 된다’ 말만 풍성하게 나돌 때 최용규 씨는 이곳에서 장사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비롯해 당시 물품을 거래했던 세금계산서까지 들이 밀며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2007년 여름 청계천 8가 삼일 아파트에는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청계천 삼일아파트 철거민대책위 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곧 닥칠 철거의 위협에 속수무책 방치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복원공사로 파헤쳐진 청계천 때문에 상권마저 위축되어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싸움에 목을 맬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막바지까지 남아 싸웠던 사람들은 성동기계 공고 근처 13동과 14동에 임시상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임시상가를 만든 첫 번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구청과 서울시 공무원의 묵인 아래 진행된 사업이었기에 서울시장이 바뀌고 담당자와 해당 공무원이 떠나자 곧바로 또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청계천변의 노점상의 대책마련으로 만들어진 숭인동 근처 ‘서울풍물시장’ 안에는 공식적으로 894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송파구 문정동의 가든파이브가 청계천 상인들의 이주대책 마련으로 추진되었다면 ‘서울풍물시장’은 노점상의 이주대책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이 두 곳의 공통점은 모두 장사가 안 되거나 시원치 않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풍물벼룩시장’은 서울시 공유재산관리법에 의해 임대형식으로 상인들에게 분양을 한 상황입니다. 처음 5년 계약에 3년 재계약 조건으로 현재 풍물시장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약 3년 정도의 기간이 남았지만 앞으로 서울시에서 재계약을 다시 할지는 결과는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기에 함부로 쫓아내지 못할 거라는 기대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어린 시절 카메라를 가지고 놀 정도로 집안이 가난하지만 않았어요. 그러다 집 안이 어려워지자 막내 놈이 중학교 시절부터 저는 이곳에 나와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학교 담벼락을 넘어 땡땡이칠 때면 중앙 시장 안에 리어카보관소에 자장면집이 두 집이 있었어요. 가격이 10원인가 20원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게 불과 70년인가 그랬으니까. 좌우지간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메이커 선풍기가 없었어요. 금성에서 조립한 거 있었고, 그때 소위 유행하는 노래가 인천의 성냥공장이 유행했을 때니까. 지금 이 자리도 봉제공장 자리에요. 작은 다락방이 있고 재단 판이 있고요. 이곳에서 먹고 자고 그 안에 여공들이 다닥다닥 앉아서 일을 했어요. 그만큼 열악했지요.”

한결같다는 이야기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여전히 최용규 씨의 창고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좁은 가게 예전 그대로 입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낯설어 보일지라도 카메라와 전축 그리고 오랜 가전제품까지 꼭 필요한 사람의 손을 기다리며 차곡차곡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최용규 씨의 창고는 지금도 영화소품을 대여해주거나 오래된 카메라를 구입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청계천에 대해 알고 싶거나 배우려는 사람들로 복작거립니다. 최용규 씨는 서울 토박이입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오래된 청계천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들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혹시 그때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알죠. 그 당시만 해도 평화시장에서 선풍기하고 재봉틀 고쳐주는 일을 했어요. 신설동에서 중부시장까지 다 다녔죠. 전태일 씨... 그 당시 물론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평화시장 , 중부시장 마찌꼬바(작은 공장)안에 다이마루(의류원단을 짜는 기계)같은 것을 고쳐주면서 그분들이 먼지 속에서 사는 것을 봤죠.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돌을 던진 사람과 돌에 맞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우리나라 발전에 앞장선 사람들은 돌을 맞은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민중이지요. 가장 중요한 사람들 바로 전태일 같은 사람 말입니다. 그분들이 우리나라 발전의 중심에 있던 사람 아니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났지만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퇴색돼 버린 오랜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청계천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황학동은 정말 유명한 벼룩시장이었어요. 그걸 없애는 나라가 우리나라에요. 다른 나라는 벼룩시장을 잘 보존해서 세계적인 관광 상품으로 만들잖아요. 우리나라도 그래야 합니다. 청계천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에요. 이런 것을 인위적으로 함부로 없애 버릴 수만 없는 것입니다. 예전 황학동벼룩시장의 중심이었던 청계천 6가와 7가 사이에 ‘롯데캐슬’이 들어섰잖아요. 무조건 부수고 높이만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높이 올라갈수록 그림자만 짙어지기 마련이에요. 그 그림자 안에 누가 사는지 몰라... 지금 그곳은 유동인구가 동묘 쪽에 절반도 안 돼요. 귀신 나올 정도로 찾지 않는 곳이 되었어요. 저는 지난번 서울시를 방문해서 청계천 황학동을 중심으로 커다란 벼룩시장을 건설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청계천 벼룩시장 올레 길을 만들자’ 라는 제안을 했지만 빠꾸 맞았죠. 다시 할 거예요. 다시 서울시에 제안할까 합니다. 노점상도 살고, 상인도 살고, 그리고 근처에 롯데캐슬 안에 대형마트도 덩달아 살 수 있는 거에요.”


오랜 세월 그의 사진 속 변하지 않는 장면처럼 그의 삶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찍어 올릴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봄 햇살이 잦아들고 저녁이 찾아오니 삼일 아파트 주변은 한낮의 왁자지껄 장터의 모습은 사라지고 을씨년스럽게 변했습니다. 드문드문 모여 하루의 장사를 마감하고 한잔 술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낡은 아파트 사이로 몇몇 사람들의 그림자만이 밤바람에 실려 가로등에 기댑니다. 이곳이 한국 최고의 벼룩시장을 자랑하던 곳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날이 어두워지면 청계천은 쓸쓸해집니다. 그래도 막다른 골목에 몰래 버려진 곰 인형처럼 무기력한 인생이 아닌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는 청계천변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엿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 다음 편에선 60년대 청계천에서 빈민 활동을 벌였던 일본의 ‘노무라 모토유키’님의 청계천 사진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많은 사진을 보내 주셨는데요. 그 중 몇 장의 사진과 최근 소식을 간추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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