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불행해도 질긴 희망을

[최인기의 사진세상](30) 마지막회: 성북구 석관동 고래심길


사진세상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1972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곳이 사진 속의 석관동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동네에 이삿짐을 풀고 나서야 고향을 떠나온 걸 알았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집을 기웃거리며 “너 어디서 왔니?” 하는 질문에 제일 먼저 당황했던 것은 말씨가 왠지 다르고 서울아이들의 세련된 표정과 옷차림이 나를 주눅 들게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얼마간 반 아이들은 도대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나도 아이들의 말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네를 조금 벗어나 육교로 향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육교는 커다란 볼거리였습니다. 육교 위에 서면 멀리 시장 갔다 돌아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고, 퇴근길의 아버지와 그리고 하얀 한복 차림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훠이훠이 걸어오시는 할머니의 모습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같은 반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육교 밑 문방구와 알록달록한 인형이 유리 상자에 놓여 있던 선물가게, 그리고 여름이면 수박과 함께 커다란 박스에서 차가운 얼음을 꺼내 팔던 얼음가게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석관동 근처의 천장산을 통틀어 ‘중앙정보부 산(‘의릉’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근처에 있다)’이라 불렀습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 산’은 신나고 유쾌한 놀이터였습니다. 비가 온 후 단 하루 동안만 생기던 작은 개울물에는 여름이 채 오기도 전 동네아이들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놀이에 한창이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아카시아 꽃, 뿔 바가지가 걸려 있었던 아주 작은 약수터가 있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학교를 파하고 산에만 가면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산 아래 작은 공터에서 축구를 하거나 군부대 놀이를 했습니다. 그 밑에 조금 평평한 곳에서는 늘 어른들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무에 등을 쿵쿵 부딪치는 등치기를 하거나, 시멘트로 둥그렇게 만든 역기를 들고, 몸에서 김이 펄펄 나게 들어 올리며 운동을 했습니다.


산 중턱에는 독수리 바위라고도 하고 거북바위라고도 하던 바위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어 동네 사람들을 이곳까지 오르게 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오를 수 없었던 거죠. 왜냐하면 그 위로는 군부대가 독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정보부’라는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던 건물이 산속 안에 있었던 겁니다. 거북바위까지 헉헉거리며 달음박질로 뛰어올라 걸터앉아 바라보던 가을 하늘의 해질녘 붉은 노을은 작은 새가슴들을 콩당콩당 들뜨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는 무뚝뚝한 군인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철조망 안에서 총을 들고 철통같이 산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산 위에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철조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그곳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고 들어가다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잡혀간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앙정보부 산에서는 수많은 불빛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습니다. 비행기를 잡는다는 서치라이트가 메마른 하늘을 샅샅이 훑어댔고, 웽- 웽 사이렌 소리가 온 동네를 감싸 돌았습니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은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형과 나는 일을 나가시던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숨을 죽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불속에서 형은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바보야 울지마 국군아저씨들이 우리 마을을 지켜준단 말이야.” 민방위 야간 훈련을 하던 날 밤이었습니다.


지금의 석관동 ‘성북정보도서관’ 근처로 언젠가 할머니를 따라 나물을 캐러 갔습니다. 넝마주이들이 모여 살아, 우리 형제들이 말을 안 듣고 서로 다투면 할머니께서는 “니들 거기다 내버린다”고 윽박지르시곤 하셨던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부러 피어나는 것 마냥 봄이면 양지바른 언덕에 쑥이며 나물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석관초등학교 우리 반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냥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던 아이, 입가에 버짐이 허옇게 아카시아 꽃 마냥 피어올라 있던 아이, 지독히도 말이 없던 아이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새처럼 자유롭게 깡충깡충 고무줄놀이를 하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비닐하우스 안으로 총총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넝마주이 가족들이 폐지며 고물들을 산처럼 쌓아 놓고 옹색하게 모여 사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훔쳐봤습니다.

따뜻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날 날 학교에서 천장산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저학년은 학교근처의 산으로 소풍을 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매일 뛰어 놀던 뒷산으로 소풍을 가다니…….” 어머니께서는 궁시렁대는 나에게 환타 한 병과 달걀 그리고 과자 몇 개를 싸 주시면서 김밥 대신 “집에 와 밥 먹어라” 하셨습니다.

넝마마을에 사는 여자아이와 나는 다른 애들보다 그 산에서 어떻게 놀아야 재미있게 노는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와 난 반 아이들을 데리고 거북바위 근처까지 올랐습니다. 한눈에 온 동네가 펼쳐 보이고 멀리 우리학교도 보였습니다. 한 아이가 “저기 빨간 기와집 보이지 거기가 우리 집이다” 그러자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자기 집을 찾느라 바빴습니다. 잠잠해질 무렵 또 한 아이가 언덕 쪽을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너희들 저기 누가 사는 줄 아니?”
“저기는 아이들 간 빼 먹는 넝마주이들이 산다.”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에 꿰어놓은 것 같아 돌곶이 마을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로 석관(石串)동이 되었다는 곳, 그곳의 유년시절의 풍경입니다


석관동에서는 몇 년을 더 살고 종암동, 청계천 그리고 다시 안암동, 월곡동으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어렸을 적 살던 ‘성북구 석관동’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되어서 돌아왔을 때가 2003년 즈음입니다.

그때만 해도 석관동은 유년기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대로였습니다. 바뀐 게 있다면 간 빼 먹는 넝마주이가 산다는 작은 언덕에는 ‘성북정보도서관’이 들어섰다는 거, 석관동 전통시장은 폐쇄되었다는 거, 높은 담벼락이 야트막한 산을 뱀처럼 감싸고돌던, 날카로운 이빨과도 같은 녹슨 철조망이 동네사람들의 줄기찬 민원으로 서서히 걷히고 군부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한쪽에서는 재건축조합이 결성되어 홍보 플래카드가 나붙기 시작했고,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유년기의 온갖 기억과 추억이 남아있는 곳은 포클레인 공사의 소음이 넘쳐나는 곳으로 뒤바뀌고, 석관동은 수많은 흉터자국을 남긴 채, 아름답게 펼쳐지던 한옥들은 사라져갔습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무당이 살던 도당길 빈집에는 붉은 페인트로 철거라는 표시가 아무렇게 쓰이자, 아내는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동네 부동산 중개소를 뒤지고 다녔습니다. 당시 강북지역의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뛰었고, 전세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철거용역깡패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고, 학교 갔다 돌아온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우리 언제 이사가? 학원 선생님이 우리 동네 다 없어지고 새로 아파트 들어선대. 그래서 학원도 곧 문을 닫는대”하고 이야기 할 때는 아내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정작 원주민 20% 미만이 재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서울주민들의 심정, 한때 대한민국 최대의 집 부자가 무려 1,083채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씁쓸함을 넘어 분노마저 일게 합니다. 하루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과 건물이 아니 도시전체가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찾은 석관동입니다. 삶은 골목이라는 밖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우리네 삶을 이끌었지만, 세상은 우리의 모습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렸습니다. 서울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1970년엔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비율이 88.4% 대 4.1%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010년엔 단독주택 27.9%에 그친 반면 아파트는 57.3% 나 됩니다. 단독주택과 아파트비율의 변화를 알 수 있는 통계는 우리의 현주소를 바라보게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높이 치솟던 아파트의 비율이 최근 들어 미분양사태로 이어지면서 주춤하는 거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최근 서울시를 중심으로 주택 유형의 다양화를 통해 서울의 자연 경관을 보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도록 정책방향이 선회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2013년 3월 기준으로 서울시는 571개 뉴타운 구역중 약 절반 정도가 실태조사에 들어갔으며, 이 가운데 추진주체가 있는 13개 구역과 추진 주체가 없는 31개 구역 중 44개 구역이 구역해제를 결정했으며 조합인가 등을 취소한 구역은 12개 구역. 사업추진 구역은 68개 구역입니다. 투자한 외지 사람들의 반대도 여전하지만, 주민의 50% 이상이 사업해제를 원할 때 조합해산 신청을 할 수 있고, 조합이나 추진위가 없을 시 30% 이상이 동의하면 구역해제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년기의 석관동은 없습니다. 사진 속의 건물만 한때 번성했던 새 석관시장 자리라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고래심줄처럼 ‘질기게 살라’해서 붙여진 석관동 고래심길, 겨울이면 하얗게 내리던 눈이 기왓장위로 소복이 쌓이던 석관동 한옥의 지붕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골목안 평상마루에서 펼쳐지는 수다들은 크고 작은 관심사로 이어지고, 누구네 집 아들이 취직을 했다는 등의 대소사의 이야기는 옛말이 된지 오래입니다. 한때 우리는 골목에서 아이들을 집단으로 키워냈고 모두가 가족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씨줄과 날줄로 얽힌 삶의 모습이 공간에 투영된 것입니다. 석관동을 끝으로 사진세상의 연재를 마칠까 합니다.


그동안 상인과 노점상, 철거민, 노숙인, 구멍가게 주인, 이발소 아저씨, 쪽방주민, 눈먼 점쟁이까지 다양한 삶에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누구는 이들을 이질적인 타자와 주변인으로 치부하며 아주 쉽게 ‘세상에 가난과 불행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가난하다고 모두 다 불행한 것은 아니라며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입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인해 끊임없는 변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곳이 도시입니다. 자본은 도시공간을 배외하며 이윤을 낳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투를 벌이고, 개발이라는 욕망의 늪으로 사람들을 마구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부유하며 떠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불안한 도시의 미래를 드러냄으로써 문제를 환기시키고 도시공간을 둘러싼 집단적 저항을 통해 질기게 이어지는 사람간의 관계와 연대의 끈을 이어 가도록 하는 게 그 목적입니다. 연재를 마치며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기대와 공동체의 희망을 다시 한 번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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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 , 석관동 , 고래심길 , 석관시장 , 천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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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우

    연재하느라 애썼소, 발품 팔아서 글쓴 흔적이 역력하오. 고생많았소 언제한번 봅시다.

  • 묵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문래동

    좋은 글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 조형석

    항상 잘보고 갑니다.

  • 신희철

    성북구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런 생생한 비화를 들을 때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호기심에 부르르...^^ 성북정보도서관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삼태기마을은 개발구역으로 지벙된 바 없이 건강마을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얼마 전 장수마을과 같이 주거환경관리사업구역으로 되어 보존 및 개량이 가능하게 됐어요. 맞은편부터 아파트 개발된 곳과 새석관시장 옆까지는 아직 석관1재건축규역이지만 주민들과 해제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 분들께도 살아오신 추억을 들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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