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바위가 낳은 민족 지도자 이관술

기념비 세웠지만 보수단체 반발로 땅에 묻혀...국가에 손해배상청구소송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관술 [출처: 안재성]

1950년 7월 3일 대전시 동구 산내면 낭월동 골령골.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관술(李觀述)은 다른 정치범 1,800여명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나와 가장 먼저 총살 당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당시 처형된 1,800여명 가운데는 제주 4.3사건 수형자 300여명도 포함돼 있었다. 다른 형무소에서 이감 온 재소자들과 충남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수천명도 미군 방첩대(CIC)와 헌병대,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워닝턴 기자는 이곳에서 7월 중순까지 모두 7,000여명이 학살됐다고 증언했다.

이관술은 죽기 4년 전인 1946년 7월 6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듬해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해방된 조국에서 맞은 생애 세 번째 감옥살이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의 중앙검열위원이자 안살림을 총괄하는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는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은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 5인'에 선정됐다. 우익 성향 단체인 '선구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은 13%를 얻어 여운형 33%, 이승만 20%, 김구 17%, 박헌영 15%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지지율로만 보면 김구, 박헌영과 큰 차이가 없었다. 김일성, 김규식 등은 2%밖에 얻지 못했다. 좌우를 떠나 울산 출신 정치인 가운데 해방 직후의 이관술 만큼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은 이는 없다.

이관술은 1902년 4월 26일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아버지 이종락과 어머니 덕산 이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관술이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 이석도는 아들 이종락 부부와 맏손자를 데리고 고향인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로 돌아왔다. 가까운 곳에 보통학교가 없던 탓에 소년 이관술은 할아버지 이석도가 연 입신학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세 되던 1921년 이관술은 경주시 외동면 출신 박가야와 결혼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23년 이관술은 경성(서울)의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이관술은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25년 이관술은 당시 최고 명문인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다. 1929년 동경사범을 졸업한 이관술은 조선에 돌아와 경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1929~1930년 학생시위를 계기로 이관술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1933년 1월 반제국주의동맹 사건으로 구속된 이관술은 모진 고문에 폐병이 생겨 1934년 4월 가석방됐다. 울산에 넉 달을 머물던 이관술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 그해 9월 동덕여고 제자 박진홍을 통해 이재유를 만났다. 이재유는 당시 항일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최대 조직인 경성트로이카의 지도자였다. 경성트로이카에는 훗날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이현상, 하룻밤에 소조 하나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던 김삼룡, 이관술의 이복동생으로 동덕여고를 나와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순금 등 뛰어난 활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재유는 그해 4월 경찰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 도피 중이었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경찰의 검거를 피해 경성 인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에 정착해 18개월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재유보다 세 살이 많은 이관술이 김대성, 이재유는 김소성이라는 가명을 쓰며 수재민 형제로 가장했다. 이관술은 농사를 지으면서 각종 팜플릿과 기관지 <적기> 제작을 책임졌다.

주재소 순사들의 호구조사 때문에 두 사람은 1936년 12월 공덕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재유는 창동역 근처 야산에서 일본인 고등계 형사 60여명에게 체포됐고, 이관술은 도주해 장돌뱅이 행색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몸을 피했다.

1937년 6월 말, 경성에 돌아와 조직 재건에 착수한 이관술은 활동을 시작한지 2주일만에 불신검문에 걸려 또 다시 도망길에 올랐다. 거지 행색으로 대전으로 도주한 이관술은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1년여를 머물렀다.

1939년 1월 경성에 다시 돌아간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기관지 <코뮤니스트>의 발행을 책임졌다. 이관술은 한 달에 한 번 발행된 <코뮤니스트>의 기사를 직접 쓰는 한편 배포망을 조직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고물장수로 변장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경성콤그룹은 경인지역과 남부지방, 함경남도까지 조직을 확대했다.

그해 12월 이관술은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 오르는 박헌영을 영입했다. 1941년 이관술은 김태준의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수배된 지 6년만이었다. 이관술은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같은 울산 출신인 노덕술이 특히 지독하고 악랄했다. 노덕술은 해방 뒤 이승만 정권에 특채돼 경찰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했고, 울산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이관술은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심해져 구속 3년만인 1943년 12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 범서로 돌아왔다. 이관술은 병보석 기간이 만료되는 1944년 3월 감쪽같이 사라져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았다.

  범서 선바위 주유소 안쪽 이관술 기념비가 서 있던 자리. 잡초만 무성한 비석 자리엔 테두리 돌만 남아 있다 [출처: 이종호 기자]

1992년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과 사촌동생 이수은 등 유족들은 선바위 주유소 안쪽에 이관술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울산매일신문 장성운 편집국장이 썼다. 하지만 울산광복회 등 보수단체들이 들고일어나 유족들은 비석을 뽑아내고 생가 앞 밭 한가운데 깊이 묻어야만 했다. 선바위 주유소 나무 그늘 밑 비석이 서 있던 자리는 잡초만 무성하지만 테두리 돌은그대로 남아 있다. 이관술의 흔적은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마당에 서 있는 공적비에도 남아 있다. 학교 부지를 기증한 기부자 명부(희사방명)에 범서 이관술이 542평을 희사했다고 새겨져 있다.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2006)을 쓴 소설가 안재성 씨는 14일 <월간좌파> 울산지국이 주최한 이관술 생가 탐방 자리에서 “땅에 묻힌 비석을 다시 세우고, 생가도 기념관처럼 꾸몄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안재성 씨는 “일제시대 때 항일운동가와 사회주의운동가들은 학습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대중적인 운동가였다”며 “이관술 선생은 소박함, 견결함은 말할 것도 없고 너그러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 박식함을 갖췄고, 대중 속에서 대중을 설득할 줄 알았던 조직가였다”고 평가했다.

영남알프스 지킴이 배성동 작가는 “이관술 선생의 막내 딸 이경환 여사, 손옥희 씨의 어머니는 아버지 이관술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땅에 묻힌 비석을 복원하는 것이 살아생전 소원”이라며 “이관술 연구회를 결성해서 따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데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월간좌파> 김화정 울산지국장은 “해마다 7월 첫째 주 이관술 선생 기일에 맞춰 모임을 정례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탐방에 함께한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씨는 “무기징역 형을 살고 있던 외할아버지가 1950년 7월 3일 아무런 판결 없이 사형이 집행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고 밝혔다. 첫 재판은 7월 26일 오후 2시 경주지원에서 열린다. (기사제휴=울산저널)

  울주군 구영리 범서읍 입암리 이관술 생가 [출처: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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