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과 함께 혁명의 격정에 휩싸여보자

[명숙의 무비,무브](12) 진실하게 타올랐던 <폭스 파이어>

시간이 지나면 바래는 것들이 있다. 사랑, 우정, 열정, 꿈...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바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혁명, 다른 세상에 대한 열정, 다른 사람에 대한 충성과 신뢰. 사실 시간에 따라 옅어지는 건, 정해진 게 아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처럼.


정말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본 엽서 사이즈의 영화 <폭스 파이어>(원제 Foxfire-Confessions of A Girl Gang, 감독-로랑 캉테 ) 포스터가 나를 단번에 끌어당겼다. 포스터 속의 10대 소녀들은 강렬하면서도 삐딱한 포즈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보 문구처럼 ‘눈부시게 위험한 소녀들’에게 이끌려 극장에 갔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각했을 한국 영화 <써니>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써니>와 같은 그냥 성장영화도 회고 영화도 아니다. 매우 정치적인 영화다. 감독이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이 영화는 여성억압에 유쾌하게 맞서는 소녀들의 아프고 뜨거운 이야기다. 그녀들은 부자들의 우아한 위선에 맞서고 나이에 맞선다. 그녀들은 함께 기존 사람들과는 다른 삶, 그런 의미에서 혁명적인 삶을 살려고 했고, 살았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서로 헤어지기는 했지만... 게다가 그녀들에게 혁명 이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재와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신뢰하는 친구이자 리더인 렉스가 있었을 뿐.

사회는 왜 소녀를 무서워했나?

매카시즘(빨갱이 사냥) 열풍에 휩싸인 1950년대 미국의 조그만 마을에서 주인공 렉스는 영화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화자인 매디와 함께 ‘폭스 파이어’라는 비밀조직을 만든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여성, 특히 나이어린 여성인 소녀들은 성폭력의 대상이거나 조롱의 대상일 뿐이어서 선생님에게, 남학생에게, 삼촌에게 당하고 산다. ‘폭스 파이어’는 여성들은 억울하다고 징징 짜며 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지켜야하며 자매애로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유쾌한 복수에 나선다. 리타를 괴롭히는 선생님에게는 차에 소녀를 성추행하는 사람이라는 낙서로 망신을 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보니 학교와 동네에서는 그녀들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고 멤버들도 늘어난다. 그러던 중 멤버 한명이 남학생에게 폭력을 당할 위협에 처하자 렉스가 싸우다가 구속된다. 법정에서 렉스는 부당한 법적용에 대해 항의하지만 법복을 입은 나이 많은 남성은 그건 자기가 정한다며 구속을 결정한다.

화자인 매디는 말한다. “왜 어린 소녀 한 명을 무서워했을까?”라고. 아마 사회는 어린 소녀 한 명이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흔드는 것도 불쾌한데, 그런 소녀가 더 나타날까 무섭지 않았을까.

돈과 인종을 뛰어넘지 못하고

렉스가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 그녀들은 집을 얻어 공동체생활을 한다. 공동체 생활을 운영하는데 경비는 많이 들고 구성원간의 돈 벌이 능력 차이로 다툴 때도 많아진다. 게다가 렉스가 교도소에서 만난 흑인 친구를 멤버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하지만 백인 멤버들은 ‘어떻게 검둥이와 어울려 사냐’며 거부한다. 그녀는 친구들의 자매애에 기반하지 않은 위선적 태도에 화를 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는 마치 여성주의 운동에서 인종문제가 대두되기 이전의 모습을 그리는 듯하다. 동일자로 간주되었던 여성 내의 차이와 차별이 드러난다.

그녀들의 갈등은 그것만이 아니다. 몇 명이 돈을 버는 것으로는 모자라서 ‘성-섹슈얼리티’를 자원으로 해서 남성들을 꼬셔 지갑을 털 때도, 능력이 부족한 매디는 다른 멤버들의 무시를 받는다. 공동체의 평등이란 모두에게 1/n의 의무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소위 능력이 같지 않은 사람(메디)과 기분 좋게 어울릴 만큼 그녀들은 내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칙을 강조하는 새로 들어온 성원들과 기존 성원들 간의 차이는 또 다른 골을 만든다.

혹자는 성을 자원으로 한 이른바 꽃뱀사업에 대해서 불편했던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그것을 남성의 취향과 의도대로 사용할 것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건 충분히 활용가능한 자원과 전술이지 않을까? 물론 그건 근본적 해법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상상가능하고 못된 남성의 성욕과 폭력에 한방을 먹이기도 하고 자금도 마련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70년대 한국의 혁명조직 남민전에서 부자들의 집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디 그녀들의 활동을 가출한 소녀들의 비행으로만 읽지 않기를..)

실패했지만 혁명을 찬양하는

재정적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한 렉스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백인 부르주아의 확신에 찬 태도로 난관에 부딪치고 도피하게 됨으로써 폭스 파이어는 해체된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그녀들의 삶을 후회하거나 비웃지 않는다. 어쩌면 실패한 혁명일지라도 찬양하는 마음이리라.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을 비판하고 렉스에게 가르침을 준 신부할아버지는 말한다. ‘1789, 1848, 1917...’ 혁명의 연대기를 읊으며 러시아 혁명기에 자신이 어떤 영적 충만함을 느꼈는지 소녀들에게 전하며, 언제나 행복은 당시에는 행복인지 모를 수 있다고.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과거형으로 존재한다”고.

혁명을 시도했던 그때처럼 누군가 다시 불꽃을 일으켜주기 바라는 듯, 영화의 첫 부분이자 렉스의 삶을 보여주는 렉스의 대사가 반복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영혼불멸 따위도 믿지 않아. 난 그저 불꽃처럼 살아갈 거야. 불꽃은 영원히 타오를 필요는 없어. 타오르는 동안에만 진실하면 돼. 때가 되면 꺼진다고 해도”

다른 세상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닌 다른 세상에 대한 속마음을 아직도 펼치지 못한 사람들도 영화를 함께 보면서, 환희와 패배감을 안은 격정의 시기로 떠나보면 좋겠다. 덤으로 로랑 캉테 감독의 빈곤지역 학생들의 계급갈등을 다룬 영화 <클래스>도 보기를 추천한다.

끝으로 한국에서 불꽃처럼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부정의에 맞서 타오르는 촛불들의 마음과, 대한문에서 타오르는 정리해고된 쌍용차노동자들이 피우는 향, 그리고 8월 31일 있을 울산 현대차 2차 희망버스로 모인 비정규직 철폐에 대한 열정들이 끊이지 않고 타오르기를 바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한 번쯤은 여러 방식으로 위 불꽃들에 함께 한다면 더 좋을 일이다.

추신.
아쉬운 것은 렉스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가 여성주의영화라기보다는 성· 계급· 인종 문제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이더라도 아쉽다. 렉스에게 혁명을 알려주고 “뜨겁게 행동하고 간절히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준 사람을 굳이 신부로 설정했는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읽어낼 수 있는 페미니즘의 역사나 쟁점들도 조금 무색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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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 폭스파이어 , 로랑캉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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