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이겨낸 여공이 말하는 '유신 회귀'의 돌파구

노조만이 노동자의 희망, 노조 활동이 유신을 무너뜨렸다

다시 ‘유신’이 다가온다.

사제 종북몰이, 국정원 대선개입, 노조탄압, 이어지는 노동자의 사망은 ‘유신’의 징후가 돼, 유신을 겪지 못한 이들의 불안마저 자극한다.

유신을 떠올리게 만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11월 60% 내외. 유신의 불안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의 간극이 ‘성장’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믿음이라면, 노동자민중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11월 29일 오후 7시 대구 중구 가톨릭근로자회관 대강당에서 전태일열사 추모 43주년을 기념해 열린 문화제 "전래동화 을들의 당나귀"에는 유신을 무너뜨렸던 증인들이 참여해 화두를 던졌다. YH무역노조, 동일방직노조,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한 권순갑, 이총각, 신순애 씨는 이날 70년대 박정희 유신 통치 시절, 무엇이 유신을 무너뜨렸는지, 힘든 시기에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새시대예술연합의 노래, 극과 어울어져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왼쪽부터 신순애, 권순갑, 이총각 씨

쓰고 버리는 기계처럼 산 여공들
이름 없는 ‘7번 시다’, 일당은 차 한 잔 값


산업화 물결 따라 1965년 시골에서 상경한 신순애 씨는 평화시장에서 시다를 시작했다. 신 씨는 7번 시다였다. 신 씨는 이름이 없었다. “1번 보조, 5번 미싱사, 1번 미싱사” 따위 번호로 불릴 뿐.

하루 일당 50원, 당시 차 한 잔 값이었다. 평화시장 시다들은 종일 일하며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생리라도 시작하면 낭패였다. 급할 때는 잠바 속주머니를 떼어 생리대를 대신했다. 그럴 때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타구니에 통증이 밀려왔다.

평화시장 시다들은 폐렴을 많이 앓았다. 폐렴을 앓자 돌아온 것은 강제 해고였다.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는 기계처럼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경공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한국에서 흔한 일이었다. 동일방직, YH무역의 여공들도 사람대접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YH무역에서 일한 권순갑 씨는 “너무나 암울한 시기였다.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공순이라 불렸다”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마치 그때 이야기가 전래동화나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조를 시작하며 받은 인간 이하의 대접
하지만 노조만이 노동자의 희망, 노조 활동이 유신을 무너뜨렸다


72년 박정희는 헌법을 파괴하고 유신 독재를 시작한다. 그 때문에 노동자가 기댈 곳은 같은 노동자 외에는 없었다. 정권과 회사 관리자들은 노조를 만들지 못하도록 혹독하게 탄압했지만, 그럼에도 노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YH무역노조를 만든 권순갑 씨는 “당시 민주노조는 열 손가락 꼽을 정도였다. 우리도 노조 만들 때 기숙사 이불에서 서류를 만들어 브래지어에 숨겨서 회사 밖으로 빼 왔다”라며 “2,000명 중 900명이 가입하니 회사에서 회유책을 엄청나게 썼다. 하청공장 차려주겠다, 학비 대주겠다, 시집밑천 주겠다 하는걸 다 막아냈다. 노조 하며 노동조건이 나아지니 노조가 생명과 같은 거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 시절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은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신순애 씨는 “나 하나의 위험은 참을 수 있었다. 전태일은 목숨도 내놓았으니. 그런데 가족이 위협당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며 “노조활동 한다고 오빠들도 괴롭힘을 받았고, 집주인도 내가 간첩이라며 어머니를 쫓아 보냈다. 그 이후 어머님이 쓰러져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노조 활동을 하다 인분을 뒤집어쓰는 수치스런 일도 있었다. 78년 2월, 동일방직노조 조합원이던 이총각 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노조 대의원 선거를 하려다 회사 남성 노동자들이 뿌린 인분을 뒤집어썼다.

“우린 참 순진했다. 진솔하고. 무식했고. 그런데 모른다고 노조활동 못 하는 건 아니다. 요즘은 너무 많이 알아서 계산기 두드리며 피해간다. 우리는 우리가 깨지면 다른데도 무너질 거로 생각해서 옷까지 벗고, 똥물도 뒤집어쓰며 투쟁했다. 회사 남성 노동자들 5~6명이 술 냄새 풍기며 똥을 양동이에 퍼 와서 뿌리더라. 요즘 민주노총이 힘든 것 안다. 그런데 힘들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삶이 오나. 단결해야 하고, 내가 주인이라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이총각 씨)

“10원 아끼려고 집까지 걸어가던 시절 노조 간부들끼리 모아 5만 원을 들여 7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때 후배들은 우리가 신이었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줬다. 지금은 아쉽게도 간부들이 조합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민주노총 위원장 뽑는데 네 번에 거쳐 난리 치지 않았나. 대통령만 권력이 아니라, 노조 위원장도 권력이 된 것. 비우는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 (신순애 씨)


79년 8월,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은 신민당 당사에서 회사폐업조치를 항의하며 농성을 벌인다. 경찰의 연행 과정에서 한 여공이 추락해 사망하기도 한 이 농성은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유신을 무너뜨린 증인들은 이날 한입으로 ‘노조’를 이야기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비우는 자세로, 당당하게 노조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박정희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이제 세상이 뒤집어져서 박정희 딸이 박근혜가 대통령 하고 있다. 우리는 다 빨갱이 취급됐다. 두렵지 않았다. 요즘 종북몰이하는데 종북을 무서워하면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성당 신부 한마디로 나라가 뒤집힐 듯이 난리다. 우리가 빨갱이 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처럼 지금 활동가들은 종북이라 불리는 걸 무서워하면 안 된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게 빨갱이고 종북이면, 그렇게 돼야 한다” (이총각 씨)
덧붙이는 말

박중엽 기자는 뉴스민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민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대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

전태일 , 박정희 , 종북몰이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중엽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