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사민주의’ 열풍에서 경계해야할 것들

[주례토론회] ‘사민주의’의 몰락과 위기에 기생하는 유럽사민당

[토론문-편집자주]
유럽통합의 위기와 득세하는 극우파

2010년 유럽 채무위기 이후 유럽통합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회자되었다. 그리스의 유로존 퇴출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유럽 내 갈등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각종 긴축조치가 진행 중인 유럽각국에선 삶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수 백 만 명의 노동자들은 계속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2012년 11월엔 유럽 23개국 40개 노총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행동을 벌였는데, 여기여 천 만 명의 참여했다. 지금의 유럽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기존 집권세력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렇지만 흔히들 상상하는 것처럼 이런 경제 위기 정세가 체제의 구조적 변혁을 지향하는 좌파세력들이나 전통적으로 복지 정책에 아젠더를 가지고 있었던 사민당의 영향력 확대로 나가진 못하고 있다. 오히려 통합유럽에 반대하는 ‘반유럽’ 정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극우파들의 득세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유럽 상황에서 2012년 5월 그동안 존재감이 줄고 있던 유럽사민당의 시험대가 세워졌었다. 유럽의 양대 두 축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대선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우파 정부는 경제위기와 긴축에 지친 민중들로 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정세는 사회당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고, 사회당 올랑드 후보는 긴축노선을 고수하는 독일의 메르켈과 유럽성장을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웠다. 금융자본을 자신의 주된 적으로 설정하였고, 유럽 협약 재협상, 일자리 15만개 창출, 강력한 부유세 도입 등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2년도 안된 지금, 올랑드의 모든 공약들은 휴지조각이 되거나 후퇴되었고, 지지율은 20%라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리고 올랑드의 이런 자멸적 상황은 반대로 극우파 르펜의 지지율 확대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결국 지금 당장 프랑스에서 대선을 다시 치른다면 르펜이 당선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상황으로까지 내몰렸다.

그런데 이런 극우파의 득세는 최근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르펜의 지지는 빈민층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상승해왔다.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도 17%를 넘는 득표율을 확인한 바 있다. 비단 이런 분위기는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 전체적으로 사민당을 비롯한 중도파의 영향력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고, 그 틈을 극우파가 메워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심지어 메르켈의 대연정 체제가 재구축된 작년 독일총선에서도 중도좌파 뿐만 아니라 중도우파연합(기민당 CDU, 자유민주당 FDP)도 약화되었는데, 이 틈을 빠르게 성장한 극우정당 ‘독일대안 AfD’이 메웠다.

프랑스와 독일 이외에도 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극우파의 부상은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좌우 블록’의 대결과 협력에 기초한 기존의 지배적인 정치-정당 시스템의 지배력 감소를 극우세력들이 파고 들어오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영국을 필두로, 독일과 서유럽 전역에서 전개된 사회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성 때문이다. 그것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중간층 이하 대중들이 ‘복지국가의 민족주의적 재구성’을 외치는 극우파의 선동에 설득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 선동이 구체적으론 ‘이민자 추방’이나 ‘복지혜택의 순혈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경제위기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극우파의 부상과 유럽사민당의 침체가 어떻게 유럽 사회통합의 위기를 가속시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럽의 사민주의를 직간접적으로 표방하거나 그 정책들을 지지하는 정치세력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유럽사민당이 현재 보여주는 침체와 몰락은 우리에게 반면교사로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사민주의 정당의 흥망성쇠

먼저 한 시대를 장식했던 유럽사민주의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짚어보자. 2차 대전 직후 50년대까지 사민주의 모델 속에서 국가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소련 공산주의를 절충하여 경제일반과 사회 안정을 책임졌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기간산업을 국영화하고 케인스주의에 기반을 둔 완전고용 정책을 추진했고, 국가주도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런 국영화와 경제개혁이 사회주의적 변혁 과정으로 간주되진 않았다. 이는 전후 질서 재건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도출된 합의였다.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좌우연합 정부가 수립되었고 주요 기업의 국영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47년 이후 좌파가 정부에서 배제되었고 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가 신속하게 복원되었다. 요약하자면 시장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된 개혁이면서 동시에 사민주의 정부가 관리경제를 실험했다는 의미가 있다.

60년대부터 70년대 초중반까지는 사민주의 정부의 전성기로서 실질적인 성장을 이끄는 데 성공했다. 재집권한 이탈리아(63년), 영국(64년), 서독(66년) 사민주의 정당과 이미 집권하고 있었던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사민당은 새로운 개입주의 노선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를 제시했다.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을 개발했다. 경제성장은 사민주의 지속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성장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재분배 문제가 발생했으나, 경제적 인프라와 사회질서의 현대화를 통해 이를 해소하려 하였다. 경제성장의 지속을 통해 실업률을 관리했고, 대중교통, 교육, 건강 등의 공공 인프라를 확장했다. 오늘날 서유럽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공공부문의 높은 고용비중은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사민주의자들의 개입정책은 이른바 계급타협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금은 폐기되었지만 당시 스웨덴의 ‘연대임금전략’이 그러했다. 이것은 전국 차원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을 통해 경제문제에 대해 실용적으로 접근했던 제도이다.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정부와 민영부문의 거래가 이뤄졌고 노동부가 경제정책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O)도 스웨덴 모델과 유사한 정책을 취했다. 이들 모두 사민주의 이념과 현실주의를 결합시켜 전례 없는 성장과 고용증대를 현실화했다. 서독의 경우도 1970년대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전후 기민당 정권에 의해 추진되었던 사회복지정책을 더욱 확장시켰다. 특히 지방 중앙 동시 집권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다 70년대 초중반부터 몰아닥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앞에서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마저도 무력해지자 사민주의 정부도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스태그플레이션, 실업률 증가, 국가부채증가, 무역 불균형 등의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국가 개입을 통해 더 이상 자본 수익성, 임금인상, 완전고용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는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대량실업사태는 사민당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때문에 사민주의 주류 이론가들 내부에서 국가개입을 통한 완전고용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영국의 윌슨 및 캘러헌 정부(76-79년)가 그러했고, 오스트리아의 크라이스키 정부도 83년 이후 케인스주의 정책을 마침내 폐기하기에 이른다. 스웨덴 사민당의 경우도 80년대를 지나면서 전통적인 스웨덴 모델의 한계가 드러나자 신자유주의적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1년 우파연정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독일의 슈미트 정부(74-82년)도 위기관리에 실패하면서 우파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프랑스에선 81년 집권한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가 뒤늦게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의 사회주의적이고 사민주의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당시 국제적으로 부상하던 신자유주의적 변화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83-84년부터 프랑스의 실험은 중단된다. 이런 실패는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의 수준에 비해 과도한 의욕이 낳은 의회 사회주의 또는 유로꼬뮤니즘의 교훈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프랑스 사회당은 86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우파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가 88년 사회당이 다시 집권하는데, 이때 사회당은 이미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상태였다. 이러한 미테랑 정권의 실용주의적 선회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제적인 경제분업 구조를 더욱더 수직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체적으로 보면 45년부터 73년까지 전후 자본주의의 호황국면에서 사민주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70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 이후 사민주의 정당들은 대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경제위기에 대한 기존의 케인스주의적 사민주의 프로젝트가 설득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사회적으로 다양한 수준의 위기들이 함께 결합했다. 일례로 영국의 경우 대처주의에 패배했고 독일의 경우 녹색당 창당과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들의 요구들이 터져 나왔으나, 각국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변화된 정치경제에 대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부재했다.

이렇게 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몰락했던 사민주의 정당들은 90년대 들어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3의 길’을 들고서 다시 집권했던 것이다. 97년 영국의 토니블레어가 이끄는 신 노동당이 18년 만에 집권하였고, 98년 독일에서 사민당이 16년 만에 다시 집권하였다. 네덜란드, 스웨덴 역시도 이 노선을 공유했다. 97년 집권한 프랑스 사회당(PS)은 공개적으론 블레어의 노선을 비판했으나 현실적 차별화에는 실패했다.

사민당의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한 ‘제3의 길’은 여러 가지 분야의 새로운 사회운동과 중산층을 적극 대변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수용했는데, 단순히 이미지 쇄신을 위한 차용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경쟁 우위 이념을 사회 구성 원리로 받아들였고, 평등에 기초한 사회 정의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복지국가의 개혁방향도 사후적인 재분배정책 중심에서 공격적인 ‘예방국가’로의 강령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그 핵심은 노동시장의 공격적인 재구성에 있었고, 완전고용, 재분배 정책 등을 부차적인 문제로 내렸다.

한편에서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사민주의 초기에서부터 이들이 가졌던 관점 자체가 자본주의에 대한 변혁이 아닌 관리를 지향한다는 점에 비춰 본다면 ‘타락한 의지’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민당과 노동당이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자기 대안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변용시킨 과정은 이들을 둘러싼 내외부의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인 계급투쟁들을 통해 재구성된 결과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90년대 다시 풀었던 사민주의의 바람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관리정책에 의존했던 이들에 의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하층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포괄했었던 하위 계층을 포기하고 배제하는 정책을 공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독일과 영국에서 공히 존재하는데, 특히 독일의 하르쯔 노동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독일의 경우 사민당 왼쪽에 새로운 좌파정당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블레어 집권을 거치면서 400만 표가 이탈하였다. 이런 지지층 이탈은 유럽 전역에서 전반적으로 벌어졌다. 사민주의 정당이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타 정당과 차별화된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관리정책을 수행하는 파트너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민주의’ 없는 유럽사민당의 몰락

결국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90년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유럽사민당의 시대적 역할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관리정책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했다. 이를 위해 시대적 변화에 조응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쌓아놓았던 ‘사민주의’의 주요 핵심정책들마저 모두 내다버렸다. 이것은 독일 슈뢰더 정권 초기 핵심 브레인이었던 ‘볼프강 슈트렉’과 ‘포스트 민주주의’의 저자이면서 블레어 정권 초기 핵심 브레인이었던 영국의 ‘콜린 크라우치’ 등에 의해 이미 인정된 사실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변화는 현재 유럽사민당을 위기에 기생하는 정당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파정부의 실패를 비판하면서 표를 모아 당선이 되지만 주요한 정책 기조엔 변화가 없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우파에게 정권을 내주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보수세력의 위기관리정책에 거수기 역할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재 유럽의 사민주의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성장했던 고전적인 형태의 정파적 조직으로서의 사민주의는 70년대 이후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Moschonas 2002). 그리고 전후 30년 동안 자본주의 생산의 효율성과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을 조화시켰던 관점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임으로서 폐기되었다(Lavelle 2008). 그래서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을 사민주의로 간주하는 입장만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지배 아래에 있으나, 여전히 정당 질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으므로 정치적 대안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Delwit 2004).

그러나 그 현실적인 대안마저 이번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실패하고 있다. 2010년 유럽 재정위기에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그 책임이 당시 집권중인 사민당에게 돌아갔다. 그리스 사회당(PASOK), 포르투갈 사회당(PS),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모두 위기가 터지자 오히려 신자유주의적인 충격요법을 들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특히 그리스 사회당(PASOK)의 경우는 그리스 재정위기의 책임세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 내에서 영향력이 일찌감치 쇠락했다. 그래서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노동운동의 영역들이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로 빠르게 재조직됐다.

이건 이들 세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2012년 프랑스 사회당 정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지만 현실정치에서 보인 이들의 무능은 혹시나 했던 기대마저 가볍게 꺾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무능은 독일의 사민당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우파 정부의 메르켈이 이끄는 신자유주의적 유럽관리정책에 대해 커다란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 독일 사민당에 거는 기대가 유럽 대중게 있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3선 연임과 대연정을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심지어 지금은 위기의 유럽을 평정한 여성 지도자로 추대되고 있다. 여기서 대연정에 참여한 독일 사민당의 주된 관심은 연정협상에서 각료인선과 몇 가지 정책들을 관철시키는 것에만 있었다. 오히려 메르켈이 보수파들로부터 욕을 먹으면서까지 연정구성을 위해 사민당의 요구사항을 적극 수용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로서 메르켈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관리정책에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런 유럽사민주의 정치세력들의 침체와 무능은 유럽사회당 그룹(PES)의 유럽의회선거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회선거는 5년에 한번 씩 치러지는데 대체로 국내집권여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선거결과에 소수정당들이 과대 대표되기도 하고, 영국의 독립당의 경우처럼 극우 포퓰리즘의 주요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올해 2014년 선거에도 이 같은 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5년 전 2009년 선거에서 그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2009년 경제위기 국면에서 진행된 선거에서 사민당은 의석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오히려 우파 집권여당에 대한 반대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이례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사민주의 집권정당들이 심판받게 되는 결과마저 나왔다. 2004년 결성된 중도우파 성향의 유럽인민당 그룹(EPP)이 2009년 선거에서도 최대의석을 차지했다. 이와 함께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 정당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영국 보수당 주축의 유럽보수개혁 그룹(ECR)이 55석(전체 785석)을 획득했고, 유럽연합에 더욱 적대적인 입장인 자유민주그룹(EFD)마저도 32석을 차지했다. 반면 좌파의 경우 독일에서 좌파당이 8석을 얻는데 그쳤고, 영국에선 노동당이 독립당(UKIP)과 동수의 의석을 얻어 제2당의 입지가 흔들렸고,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은 녹색당과 동수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유럽통합의 위기와 위기에 기생하는 사민당

하지만 최근 들어 더욱 부상하고 있는 극우파들의 기세는 사민주의 정치세력들에게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안겨주고 있다. 이들은 유럽통합에 대한 대중적 불신을 등에 업고 득세하고 있는데, 아래 그림에서 보듯 유럽의 주요국들에서 일어나는 대중들의 ‘반유럽정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07년과 2012년에 조사한 유럽연합에 대한 신뢰도에서 대중들의 불신은 5년 사이에 크게 역전되었는데, 평균 60%를 넘고 있다.

  The Europe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출처: 우리금융경영연구소]

특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72%)이나 구제금융에 가장 많은 재정 부담을 하고 있는 독일(69%)의 대중들이 불신이 높다는 건, 유럽통합의 위기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음을 시사한다. 스페인과 같은 위기국가들에 대한 ‘채찍’과 독일과 같은 중심부 국가들의 ‘양보’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유권자들에게 표를 호소해야만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제도권 정당들에게 있어서, 국내 유권자들의 불만에 먼저 귀를 기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러한 불만을 가장 잘 조직하고 있는 세력들이 바로 각국의 극우파들인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과 압박은 사민주의 세력들에게 똑같이 작용된다. 위기에 빠진 유럽의 미래를 이끌어 갈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이 유럽전체의 문제를 사민주의의 아젠더로 만들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나 각국의 사민주의 세력들이 국내정치에만 몰두하게 되어 국제주의적 연대에 획기적인 전략을 세우지 못한다면, 설령 집권하더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기획을 제대로 펼 수 없다. 현재 프랑스 사회당의 올랑드 정부의 실패가 그 본보기다. 올랑드 정부가 애초 공약했던 위기해법과 성장전략은 유럽전체의 공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과의 협력관계가 중요한데, 각국의 통화재정정책의 중요한 지렛대가 되는 유럽중앙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독일이 가장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해법은 처음부터 줄곧 평행선을 달렸고, 현재 정치적 승자는 메르켈이 되었다.

대중들은 이미 사민당의 능력과 비전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속된 말로 마치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정서가 사민당에게 투영되어 있다. 그 이유는 90년대 ‘제3의 길’이라는 세련된 전략을 제시했던 유럽사민주의의 변모가 신자유주의와 질적으로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앞마당만 지키기 위해 현재처럼 집권 우파에 대한 대중적 불만에 기생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길이 된다면, 유럽사민주의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때늦은 ‘사민주의’ 열풍에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지난 2012년 대선을 경유하면서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북유럽모델 등등의 담론들이 많이 회자되었다. 이런 담론들의 확대는 국제적 조류와 비교하면 뒤늦은 것이었지만,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와 2000년대 급속하게 퍼진 신자유주의만을 경험했던 우리들에겐 뭔가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 같이 보였다. 사민주의를 흉내조차 내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이런 때늦은 유행은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어딘가’라는 현실주의적인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진보정당들은 사민주의 전성기 시절의 정책과 이념을 다양한 수준에서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유럽사민주의 흥망성쇠를 돌이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성장할 때 사민주의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50-60년대 전후자본주의 황금기 시절이 그러했다. 만약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던 유럽사민당들까지도 사민주의의 역사로 인정한다면, 이들이 90년대 ‘제3의 길’을 표방하면서 다시 부상했던 그 시기도 냉전 종식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던 시기와 동일하다. 그러한 동행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앞서 지적했듯 애초 사민주의의 기획이 자본주의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에서 그 결실이 기대에 못 미쳤든 혹은 지지층이 이탈했든,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민당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관리하고자 했던 자기소임에 충실했던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전성기 시절 사회복지국가는 전후 세계자본주의 축적시대에서 계급타협에 기초한 정치경제적인 지배 체제였다. 동시에 피지배집단들의 광범위한 ‘동의에 기반한 사회화 양식’이었다. 때문에 그 과정은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늘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재구성의 과정에서 지배계급이 제출하는 다양한 헤게모니 프로젝트들이 존재했다.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국가 프로젝트’, ‘작은 정부론’, ‘제3의 길’, ‘새로운 중도’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류화 되는 역사적 과정에 계급갈등과 투쟁이 중첩적으로 투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국면이 신자유주의의 위기국면이고, 그 위기의 책임엔 그것을 관리하고자 했던 사민당도 함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 사민주의의 주술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만으론 지금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기엔 부족하다. 현재 사민주의가 왜 그런 변모과정을 밟아왔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하며, 그런 변화를 단순하게 ‘변절’로만 치부해선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해석해 버리면 순수했던 옛 사민주의의 정수를 뽑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이념을 대신하거나, 혹은 다른 더 순수한 이념적 대안을 찾기 위해 ‘훈고학’에 매몰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발전의 후발주자라고 가정한다면 선행주자로 시행착오를 겪었던 그들을 제대로 모방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와 정세는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적을 선별적으로 모방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정세는 흔들리는 판자위에서 서로가 여러 갈개로 얽혀있는 줄에 묶여 줄다리기를 하는 것과 같다.

2014년의 세계정세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의 현실이라는 것이 정세인식의 출발점이자 문제해결의 종착점이다. 유럽사민주의가 걸어왔던 100년의 역사도 20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의 역사발전,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참화, 40년간 이어진 소련과의 냉전, 그리고 세계화와 유로통합이라는 역사 속에서 지난한 부침과 변화를 겪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부터 북유럽모델에 유행처럼 빠져들었다가, 요즘 소위 잘나가는 독일의 강소기업들을 보면서 재벌개혁을 논하는 현상들을 보면 우리의 정치적, 이념적 수준이 얼마나 얄팍한가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토론문 끝]

* 토론문 정리 : 송명관(참세상 기획위원)

다음은 발제문 전문이다.


유럽통합과 유럽사민당의 정치


오창룡(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Ⅰ. 사민주의를 둘러싼 기본 논의

1. 사회민주주의의 전사

1)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 라쌀(F. Lasslle, 1825=64)의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의회로 진출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정치적 동등권과 자유를 인정받는 것이며, 계급으로의 이해관계를 인간으로서의 이해관계와 동일화시킨 특정 계급의 지배를 이룩하는 길이라는 주장.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기업가가 되기 위한 과도적 수단으로 국가가 지원하는 ‘노동자 생산조합’ 구상. “독일 입법부에 노동자층의 대표를 파견하는 것, 이것만이 노동자층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정치적 관점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선동을 조직하는 것, 이것이 정치적 관점에서 노동자정당의 강령이며 강령이 되어야 한다.”(정병기 2003, 116=7).
- 1863년 사민주의노동자당(SDAP) 창당. 사민주의노동자당 내부에서 라쌀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상호 충돌. ‘국가지원에 의한 생산조합’,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권에 대한 요구’ 등 부르주아 국가관을 둘러싼 갈등. 비스마르크의 노동자 회유정책과 호응함.

2) 영국 노동당의 결성
- 영국 노동당은 노동조합 주도의 정당이었음. 1868년 결성된 노동조합회의(TUC)와 독립노동자당, 사회민주주의연합, 페이비언협회 등의 합의로 ‘노동대표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6년 29명의 의원을 배출하면서 노동당으로 명칭 개정함.
- 1918년 채택한 당헌 제4조에서 “노동자들이 자기의 노동성과를 공평하게 분배받을 수 있도록, 주요한 기업을 국유화하고 기업의 경영에 노동자를 참여시키는 것”을 노동당의 목표로 규정함. 자본주의 및 임노동 철폐와 거리가 있는 주장. 영국노동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정당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확함(김수행 2003, 9)

2.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1) 사회민주주의 요건(프랑스 사회경제조사 연구소(IRES) 2013)
- 결사와 표현의 자유, 노조의 자유와 독립성을 인정함.
- 정부, 기업, 노동자 간의 정기적인 사회적 협의(concertation)를 추진. 정부는 여타 사회행위자를 존중해야 함.
- 집단협상 절차를 통해 사회 행위자들의 자율성 확보. 전국적, 지방적, 기업 차원에서 협상 진행
- 사회공공질서와 법은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며, 생산관계에서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함.
- 노동자 대표의 직간접적인 경영 참여를 보장해야 함.
=> 사회민주주의를 매우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는 듯 보이나, 이 수준의 조건도 쉽게 만족시키기 힘들다는 설명.

2) 사회민주주의의 원칙(Levesque 2013)
-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대중 정당
- 평등, 자유, 연대, 민주주의의 가치에 근거해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 추진.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에 기댐.
- 갈등 조절의 메커니즘은 협상, 사회적 협약.
- 복지국가와 혼합경제의 틀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우선시 함.
= 경제성장과 완전고용/고용능력 증대를 목표로 함
= 보편적 형태의 사회보장제도
= 시장경제 조절을 위한 제도적 장치(노조, 소비자, 환경 보호)
= 화폐 및 재정, 공공지출 정책으로 경제 조절
= 자유 이민 지지. 정치의 탈종교 원칙. 동성 결혼 지지. 위해성 적은 마약 합법화.

3)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에 접근하는 세 가지 관점(Escalona 2010)
-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성장한 고전적인 형태의, 정파적 조직으로서의 사민주의 => 1970년대 이후 의미를 상실했다는 주장도 제기(Moschonas 2002).
- 사회민주주의를 전후 30년 동안의 사민주의적 기획 혹은 케인즈주의와 동일시하는 관점. 자본주의 생산의 효율성과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을 조화시키는 문제. => 그러나 이와 같은 이념도 현재 사라졌다는 주장(Lavelle 2008).
-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을 사민주의로 간주하는 입장.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지배 아래에 있으나 정치적 대안 세력이 될 수 있음(Delwit 2004). 대중적 지지를 많이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정당 질서의 한 축을 이룸. => 그러나 사민주의 정당 역시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수용한 상황에서, 사회 균열구조를 반영할 수 있는 정당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 회의가 존재함(노동계급/하층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가?).


Ⅱ.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집권 역사

1) 제2차 세계대전 직후
-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소련 공산주의의 절충 모델. 국가가 경제일반과 사회 안정을 책임
- 영국 노동당 정부: 애틀리(Clement Attlee) 수상(1945=51). 1947년 석탄, 철도, 항공, 전기, 가스, 방송, 은행 등을 국영화. 케인즈주의에 기반을 둔 완전고용 추진. 국가 주도의 재정 통제, 경영 관리.1946년 사회 복지 시스템 정비. 그러나 국영화와 경제계획이 사회주의적 변혁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음. 전후 질서 재건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합의 도출.
-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 게르하르드센(Einar Gerhardsen) 수상(1945=51, 55=63, 63=65). 영국과 유사하게 철강, 금속, 전기 분야를 국영화. 케인즈주의 적인 경제 관리 시도. 의회 다수당의 위치에서 정책 추진.
-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전후 좌우연합 정부가 수립. 주요 기업의 국영화 추진됨. 그러나 1947년 이후 좌파가 정부에서 배제됨. 자유주의 시장 자본주의가 신속하게 복원
-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사민주의 세력이 의회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사민주의적 정책은 보다 늦게 구체화 됨. 그러나 사회복지제도를 보편적 비기여(universal non= contributory) 방식(국가 재정으로 전액 조달하는 방식)으로 전면 개편.
- 2차 대전 직후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사회경제적 혜택을 과거보다 더 광범위하게 부여하는 방향으로 진행. 국가와 시장 관계, 국가의 위상 등이 재정의 됨. 그러나 시장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된 개혁. 동시에 사민주의 정부가 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지양하고 관리경제를 실험했다는 의미.

2) 1960년대=1970년대 초
- 사민주의 정부가 실질적인 성장을 이끄는 데 성공함.
- 시장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을 개발. 경제성장은 사민주의 지속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음. 성장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재분배 문제 발생했으나, 경제 인프라와 사회질서의 현대화를 통해 빈부격차 해소 시도함. 보수정당 집권 후 재집권 한 이탈리아(1963), 영국(1964), 서독(1966) 사민주의 정당. 이미 집권하고 있던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사민당은 새로운 개입주의 노선을 뒷받침할 만한 제도를 제시.
- 스웨덴 모델의 등장. 스웨덴 경제학자 렌(Rehn)의 모델: 연대 임금제도의 도입. 전국 차원에서 전체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 완전고용 및 고임금, 저인플레이션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 함. => 이데올로기적인 해결책이 아닌, 경제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 법적인 통제를 지양하면서 경제에 대한 국가 영향력 증대.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정부와 민영부문의 거래. 노동부가 경제 정책의 핵심 역할 담당.
- 오스트리아 노동당(SPO)도 스웨덴 모델과 유사.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총리가 개혁을 이끔. 사민주의 이념과 현실주의의 결합. 전례없는 성장과 고용증대 현실화. 그러나 고전적인 복지국가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스웨덴식 혁신까지는 가지 못함. 그럼에도 1983년까지 장기집권에 성공.
- 서독의 경우 사민당은 1966년 대연정에 참여하면서 정부에 입성. 사민당 당수였던 브란트(Willy Brandt)가 1969=74년까지 사민당=자민당 연립내각의 수상직에 있었으나 외교정책 이외의 분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함. 이어 사민당의 슈미트(Helmut Schmidt)가 연립내각의 수상에 올랐으나, 제한된 영역에서만 사민주의 정책 시도.
- 영국 노동당은 윌슨(Harold Wilson) 수상(1964=1970, 1974=76)이 1964년 집권, 당면한 경제침체를 해결하려 함. 경제성(Department of Economic Affairs; DEA) 창설하여 경제계획 수립. 그러나 개입정책의 영향은 제한적이었음. 민간 부문에까지 정책을 적용하지 못한 한계. 노동당은 경제 정책에서 인플레이션과 경제침체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짐.

3) 1970년대 이후 사민주의 정당의 후퇴
- 1970년대 케인즈주의의 붕괴와 함께 사민주의 정부도 난관에 봉착함. 국가 개입을 통해 더 이상 자본 수익성, 임금 인상, 완전고용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게 됨. 스테그네이션, 인플레이션, 실업률 증가, 국가 부채 증가, 무역 불균형 등의 문제가 발생.
- 영국의 윌슨(Wilson) 및 캘러헌(James Callaghan) 정부(1976=9), 서독의 슈미트(Schmitt) 정부(1974=82) 모두 자유주의 정책으로 유턴. 임금인상 제한, 공공지출 축소 등 인플레이션 예방에 집중. 경제위기 관리가 당면 문제가 됨.
“우리는 세금을 줄이고 지출을 장려함으로써 고용을 늘리고 불황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솔직히 이 선택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었다면, 시스템에 더욱 큰 인플레이션을 주입함으로써만 작동했던 것이다.” (1976년 영국 노동당 대회에서 영국 캘러헌(Callagahn) 전 수상의 담화)
- 그럼에도 영국과 서독의 사민주의 정부는 경제위기를 관리하는 데에 한계를 보임. 복지예산 감축, 노동조합 통제, 고용 축소. 재분배 정책 폐기 등을 동시에 시도할 수 없었음.
- 오스트리아의 크라이스키(Kreisky) 정부는 1980년대 초까지 케인즈주의 경제기조를 유지하면서 위기에 대응함. 1973년에서 82년까지 2%대의 실업률을 유지. 그러나 공공부채의 증가와 관료제의 비효율성 문제가 발생함. 1983년 이후 케인즈주의 정책 폐기.
- 스웨덴의 경우 1982년부터 집권한 사민당은 1985년까지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전통적인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한계가 드러남. 1991년 우파연정에게 권력을 넘김.
- 프랑스의 사회당은 여타 사민주의 정부가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던 것과 달리 주요 산업의 국유화 및 케인즈주의 도입.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 실험은 1983=4년부터 중단. 1986년 선거패배로 우파 정부가 집권함. 1988년 사회당이 다시 집권하였으나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
- 1980년대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에서도 사회당 정부가 집권함. 현실적인 지향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모델이었으나, 역시 위기관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음.


Ⅲ.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 과거와 현재

1. 1990년대까지의 위기

○ 1945=73년까지 약 30년 동안의 경제 호황기는 사민주의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이나, 1970년대 이후 사민주의 정당은 대대적인 위기에 직면.
○ 일차적인 위기는 선거에서의 패배로 드러남. 1976년 스웨덴, 1979년 영국, 1977년 네덜란드, 1981년 노르웨이, 1982년 서독, 1983년 덴마크, 1987년 핀란드.
=> 여러 전문가들은 사민주의가 소멸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음.
○ 과거 사민주의의 위기는 크게 다음의 세 측면에서 재조명할 수 있음(Escalona 2011)

1) 케인즈주의의 종언
- 케인즈주의의 기본 정책: 국가가 생산 부문에 개입. 재정 금융 정책을 통해 수요에 대응.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 통제. 브레튼우즈 체제와 금환본위제에 기반.
- 그러나 스테그플레이션(경제침체+물가상승)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공세 강화.
- 사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악화.

2) 전후 30년 ‘풍요 시대’의 부작용
- 사민주의 기획이 가져왔던 경제적 성공은 소비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행태를 낳음.
- 세금에 포함되는 공적 분담금에 대한 불만 증가
- 이미 확보된 가계 재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40=50대의 국민들이 스스로 인플레이션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게 됨.

3) 1970년대 이후 사회문화적 변화
- 높은 교육 수준, 생활수준 향상으로 ‘가진 자’ 대 ‘못 가진 자’의 균열 구조가 붕괴.
-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단순히 경제적인 파이를 나누는 문제가 아닌 탈물질주의적인 요구가 등장
- 사민주의 세력은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 노동자 중심의 전통적인 조직 기반에도 변화.

4) ‘제 3의 길’과 사민주의의 변절?
- 그럼에도 사민주의 정당이 소멸하지는 않았음. 1990년대 ‘제 3의 길’을 표방한 사민주의가 다시 승리. 1997년 영국에서 블레어(Tony Blair)가 이끄는 신 노동당(New Labour)이 18년 만에 집권, 1998년 독일에서 사민당(SPD)은 16년 만에 집권.
- 1990년대 이후 사민주의 정당은 정치적 지향의 측면에서 환경, 성, 동성애 문제 등 탈물질주의적인 요구사항을 수용함. 새로운 사회운동과 중간 소득층을 대변하려는 시도.
-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 이념을 수용함.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를 포기함. 시장과 경쟁 우위 이념을 사회 구성 원리로 받아들임. 완전고용, 재분배 정책 등은 시장의 결함을 개선하는 문제보다 부차적인 사안이 됨. 이에 대해 사민주의 정당의 ‘변절’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이 아닌 관리를 시도한다는 점, 주어진 제도적 한계를 인정하고, 사회적인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과거 사민주의에서 이어지는 일관성도 찾아볼 수 있음.

2. 21세기 사민주의의 위기

1) 2000년대 이후 사민주의의 위기
- 1990년대 사민주의 열풍은 덧없이 사라짐. 당시 불평등과 사회불안 문제는 사민주의가 다시 세력화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의존하면서 대중적인 신뢰 상실. 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역설적인 결과. 영국에서 블레어 집권 기간 동안 노동자, 중산층, 저소득층 지지자 약 400만 표가 이탈함.
- 영국의 ‘제 3의 길’은 동시대에 집권했던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역시도 공유했던 노선임. 1997년 총선 승리로 5년 간 집권했던 프랑스 사회당(PS)의 경우 공개적으로 블레어 노선을 비판했으나, 현실적인 차별화에는 실패함.
- 사민주의 정당이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타 정당과 차별화된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명한 대안 제시에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 것임.
- 1950=2009년까지 총선 득표율 비교(Moschonas 2009, 표 1 참고).
= 1950=60년대: 특히 서유럽에서 사민주의 정당은 안정적 지지 확보.
= 1970=80년대: 전반적인 지지율 감소. 그러나 국가별 상이한 패턴이 관찰됨.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스웨덴, 스위스에서는 하향세. 벨기에, 덴마크, 스위스는 이후 지지율 부분적인 회복. 영국은 극적인 반등. 독일, 네덜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에서는 오히려 성공적인 입지를 다짐. 선거결과의 불확실성이 증대함.
= 1990년=2000년대 : 전체적인 지지율 감소. 1950=60년대와 비교할 때, 약 4.5%의 지지자가 이탈함.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 후반의 사민당 승리는 상대적으로 더 부각됨.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지율 하락 경향은 심화. 물론 2000년대 남유럽에서 사민당의 승리는 특기할만한 것이지만, 점진적인 지지 감소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임. 남유럽 3개국을 제외하면, 사민당이 지지율을 반등을 보이는 국가는 없음.

2)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위기의 심화
- 2008년 미국 발 경제위기, 2009=10년 유럽 재정위기는 사민주의를 더욱 곤경에 빠뜨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사민주의 정부에 위기의 책임이 돌아감.
- 그리스 사회당(PASOK)의 파판드레우(Georges Papandreou) 전 총리(2009=11)는 ‘녹색 성장’을 기조로 개혁을 단행했으나, 재정 위기에 직면하여 구제금융을 수용함. 광범위한 민영화, 노동시장 악화, 재정 감축 등 신자유주의적인 긴축정책 추진.
- 포르투갈 사회당(PS)의 소크라테스(Jose Socrates) 전 총리(2005=11) 역시 간접세 인상, 공공부문 임금 인하 등의 정책으로 위기에 대응하려 함. 이는 노조와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고, 2010년말 22년 만의 총파업 발생.
-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의 사파테로(Jose Zapatero) 전 총리(2004=11) 역시 2009년 이후 국가부채 위기에 직면하여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전철을 밟음. 2010년 실업률이 20%까지 증가했으며,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 추진. 공공 지출 축소, 공공부문 임금 인하, 사회부조금 폐지, 퇴직자 연금 동결 등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개혁 추진. 역시 2010년 말 총파업에 직면함.
- 1930년대 사민주의가 당대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등장하였던 것과 비교할 때, 2000년대 사민주의는 어떠한 차별성도 보여주지 못했음.

- 2000=2006년과 2007=2013년의 선거결과 비교(Lamant 2013) <그림 1>참고.
= 경제위기를 전후로 유럽 주요 사민주의 정당의 득표율을 비교하면, 다시 분명한 지지 감소를 확인할 수 있음. 사민당이 내각에 참여한 경우가 있으나, 연립정부에서 소수파로 참여한 것임. 경제위기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영국과 남유럽 사민당은 큰 타격을 입음. 1930년대의 경제위기가 사민주의 정당에게 특별히 유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은 아님.
= 하지만 경제위기 이후 현재까지 사민주의 정당만의 고유한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임. 유로본드와 금융거래세 등의 대안을 제시했으나 새로운 모델이 아님.
= 2000년대 이후 당원 감소도 두드러짐. 4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사례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사민주의 정당뿐임. 독일, 프랑스, 영국의 경우 사민주의 정당 당원은 전체 유권자의 1%에 불과함. 2000년대 이후 스웨덴 사민당 당원은 34% 감소, 포르투갈 32% 감소, 독일 28% 감소, 오스트리아 26% 감소 등, 약 3분의 1 정도의 당원 이탈을 겪음.
= 당원의 고령화도 심각한 문제. 대체로 대다수의 당원이 50대 이상으로 구성되는 추세.

- 2008년 이후 유럽의 사회협약 전통은 크게 약화되거나 해체되는 추세. 재정위기 해결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반 대중들의 삶을 열악하게 만들고 있음. 복지제도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기업 자율성 확대 등의 정책이 일반적으로 확산되는 경향
= 노조 가입율 하락. 협상의 탈집중화 현상. 기업별 협상 증대. 노동법에 견줄만한 권한들이 고용주들에게 허가됨.
= 2010년 재정위기 이후 특히 유럽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권 강화. 공공부문 개혁, 임금 및 연금 제한 등의 개혁이 강압적으로 진행. 고용보장 제도도 와해.


Ⅳ.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유럽차원의 대응?

1) 유럽사회당 그룹(PES; Party of European Socialists)
- 1974년 결성된 ‘유럽공동체 사회주의 정당 연합’의 후신. 유럽사회당(PES)은 1992년에 등장. 유럽연합 27개국의 33개 사회주의, 사민주의 정당이 참여.
- 금융위기 극복 및 경제 회복, ‘사회적 유럽’의 정의 구현, 기후 변화에 대한 적극 대응, 성 평등 실현, 진보적인 이민 정책 도입, 평화 안보 발전을 위한 유럽 실현 등의 가치 지향을 표방.
- 1995년 유럽사회당 서기장을 역임했던 발렝(Jean-Francois Vallin)은 1999년의 저술에서 유럽적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메시아적 혁명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함. 극단적인 유토피아는 악몽으로 변질될 뿐이며, 유럽적 사회주의는 평화, 번영, 정의를 부정하지 않으며, 개혁의 길을 선택해야 함. “유럽사회당은 혁명적인 정당이지만, 혁명을 행하는 정당은 아니다.”라며 카우츠키(Kautsky)를 원용. 유럽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음을 강조(Vallin 1999, 116=7).
- 하지만 유럽 연합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주의 세력은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수화. 유럽연합 내에서 유럽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대표체로서 책임을 져야하나, 신자유주의의 맥락 하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는 비판. 사회민주주의 국제주의는 여전히 공허하며, 본질적으로 국내 차원의 정당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Escalona 2010).

2) 2009년 유럽의회선거 결과
- 유럽의회선거는 대체로 국내정치에 대한 불만표출 기능을 함. 2008년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야당이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유럽의회 내 의석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 그러나 심각한 위기상황임에도 우파 집권여당에 대한 반대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이례적인 결과가 나옴. 우파 정당들이 집권 여부와 상관없이 지지를 확보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경제위기 책임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 매우 역설적인 결과(그림 2 참고).
- 2009년 선거 결과 유럽의회 내 우파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4년 36.7%에서 2009년 48%로 증가. 2004년 결성된 중도우파 성향의 유럽인민당 그룹(Group of the European People's Party; EPP)은 2004년에 이어 2009년 선거에서도 최대의석을 차지함. 2004년 유럽인민당 그룹이 전체 785석에서 288석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할 때, 2009년에는 736석 중 268석을 확보하여 과거와 동일한 수준의 의석수를 유지했다. 이와 함께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방해왔던 민족주의 성향 우파정당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영국 보수당 주축의 유럽보수개혁 그룹(European Conservatives and Reformists Group; ECR)이 55석을 획득했고, 유럽연합에 더욱 적대적인 자유민주그룹(Europe of Freedom and Democracy Group; EFD)이 32석을 차지함.
- 반면, 좌파의 경우 독일에서 좌파당(Die Linke)이 8석을 얻는 데에 성공한 사례를 제외하면 분명한 성과를 내지 못함. 중도좌파 정당이 자국 내에서 최대의석을 얻은 국가는 총 7개국이나, 이들 국가의 의석수 규모를 감안하면 매우 초라한 승리였음(덴마크, 스웨덴,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그리스, 말타 등 총 6개국에서 중도우파 집권 여당이 최대의석을 획득하는 데에 실패하고 중도좌파에게 다수당 자리를 넘겼으며, 슬로바키아에서만 유일하게 집권한 중도좌파가 유럽의회선거에서도 승리를 이어감. 그러나 덴마크는 13석 중 4석, 스웨덴 18석 중 5석, 루마니아는 33석 중 11석, 슬로바키아는 13석 중 5석, 그리스는 22석 중 8석(중도우파 정당과 동률) 규모로 승리한 것이며, 에스토니아는 6석 중 2석, 말타는 5석 중 3석으로 다수를 이룬 것이므로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움).
물론, 사회민주진보동맹(S&D)의 의석수 점유율이 약 27%대에서 25% 수준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중도좌파가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음. 그러나 다수의석을 점유한 국가의 수가 현격히 줄어들었으며, 유럽의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된 것이 분명. 영국에서 노동당은 독립당(UKIP)과 동수의 의석을 얻어 제2당의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은 녹색당과 동수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침.


Ⅴ. 평가 및 논의

- 세계화가 사회민주주의를 죽였는가?
= 영국 정치사회학자 허스트(Paul Hirst)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는 4가지 지향을 보임(Hirst 1999). 1) 국제 금융시장과 통화시스템에 맞서야 함. 2) 성장과 고용을 증진해야 함. 3) 기업의 민주적 책임성을 촉구해야 함. 4) 복지 공공 서비스를 유지해야 함. 그런데, 마지막의 복지 측면에서 볼 때, 세계화가 사회민주주의를 필연적으로 쇠퇴시킨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음. 1945년 이후 추세를 볼 때, 세계화에 노출된 네덜란드 혹은 스웨덴과 같은 소국들이 복지정책을 확대한 반면, 세계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미국과 일본 등의 경제대국은 복지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음. 당시 약소국들은 경제 행위자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합주의적으로 조정하는 산업정책을 국가 외적인 흐름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음. 경제적 약소국 입장에서 노동=자본 간의 협력은 오히려 자본에게 더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는 분석도 존재함(Scharpf 1991). 복지국가는 세계화 심화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으며, 극한의 경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님
= 반면, 단일시장을 완성하고 단일 화폐를 사용하는 유럽연합의 경우, 사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음. 회원국 정부 차원에서 독립적인 재정정책을 수립하기 힘들며, 노사관계에 적극 개입하지 못하게 됨. 유럽통합의 심화가 사회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된다는 설명.
- 2012년 프랑스에서 사회당(PS)의 올랑드(Francois Hollande)가 신자유주의의 화신 사르코지를 꺽고 대선에 승리하였음. 사회민주주의가 위기 국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의미한 사례가 됨. 올랑드는 집권 초기부터 긴축 재정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일정 기간 뚝심을 보여 줌. 그러나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긴축 정책으로 유턴한 상황임. 계속되는 정부 지출에도 불구하고 실업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마이너스 성장 조짐까지 보임. 추가적인 정부 지출을 위해서 유럽연합과 재협상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 대통령에 대한 여론도 급속도로 나빠졌으며, 집권 직후 지지율 급락 신기록을 새웠던 사르코지보다도 지지율 더 악화. 경제침체는 사민주의정당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님.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던 중도우파 정당이 큰 반사 이익을 챙기지 못하며, 중도우파 역시 내분 조짐을 보임. 극우정당이 가장 큰 수혜자로 부상함.
- 추가적인 질문: 사회민주주의가 현 상황에 대한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초국적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초국적 연대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외면은 지속될 것인가?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좌파에게 더 큰 가능성을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부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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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 유럽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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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명관

    이번 토론문 정리에 류용선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류용선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과학부 박사과정에 계십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