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들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새책] 삼평리에 평화를(박중엽·이보나·천용길, 한티재, 2014)

한때 모두의 희망이었던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실체 없는 소문과 풍문으로 전부가 산이고 물이었던 들판을 유령처럼 배회했지만 단 한 번도 마주칠 일은 없었다.
할매는 막연히 그 집단을 국가라고 들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자식을 낳고 낳은 자식이 굶주리고 집이 물에 잠겨도 국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언제나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당산나무 아래에서 깨끗한 몸으로 빌었다.

각자 알아서 먹고 사느라 흩어졌던 자식들이 어느날 커다란 상자에 도시를 담아왔다.
그날부터 밤낮으로 시퍼런 국가가 테레비 안에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현명한 자식들은 무책임하고 사나운 국가를 테레비 안에 가둬놓았고 할매는 잠들기 전에 꼭 국가를 꺼 놓고 잤다.

단 한 순간도 자기만의 생애를 살지 않았던 할매는 대를 이어 흐르는 삶의 연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당산나무도 알고 논도 알고 밭도 알고 소도 알아 오히려 흔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시퍼렇던 국가가 알록달록한 국가로 바뀌는 동안에 보고 또 봐도 연속극보다 연속성 없는 국가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할매는 테레비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 안에 든 국가가 측은하긴 했지만, 밤마다 잘 있는 걸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초대받지 않은 국가가 안전한 마을에 안전모를 쓰고 회색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할매는 순간 테레비를 껐는지 기억을 더듬느라 잠시 스스로를 돌아봐야 했다.
하지만 곧 할매는 '너거 여서 머하노?' 라고 물었고 대답 대신 안전모를 쓴 사나운 국가가 논두렁을 짓밟는 걸 보고 누군가 일부러 테레비를 켜 놓았다는 걸 알게 됐다.

안전하지 않은 머리를 가리느라 안전한 모자를 쓰는 줄 알았는데 모자는 별 소용도 없이 국가는 잔인하고 교활했다.
모자의 쓸모가 생각 없는 머리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는 듯 한전도 경찰도 용역도 모자로 머리를 가렸으나 생각 없는 생각은 가리지 못했다.
부끄러운 손을 가리느라 낀 장갑이 할매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어 잔악하게 내동댕이쳐도 장갑을 말릴 생각이 없던 경찰은 스스로의 손을 공권력이라 부르며 헐값에 국가에 팔아넘기고 보이지 않는 손처럼 행세하지만, 누구의 손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꺼지지 않는 원자로를 닮은 꺼지지 않는 밤이 도시를 차지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동차의 불빛이 길 잃은 눈빛처럼 땅을 기어 다니고 필요를 묻지 않고 쓸모를 강요하던 공장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것들을 만들며 모두를 위한다고 현실을 조작하고 있다.
테레비를 끈 현명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들판을 밝히며 탑이 된 철가면을 쓰고 탈출한 국가의 행패를 몸으로 막는 동안 철없는 전기를 꾸역꾸역 삼키며 죄를 묻지 않는 명령을 실어 나르는 테레비는 진실을 외면하고 조작된 거짓을 꾸미느라 요란하다.

할매는 산과 물과 새와 나무를 대신해 말하고 먼저 가신 조상을 대신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다.
소가 이유 없이 쓰러지고 개가 신음하고 생전 보지 못하던 우박이 쏟아져도 감금된 도시에서 제복에 갇힌 영혼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국가는 기업을 대신한 지 오래고 기업은 서둘러 '공'자를 버리고 '사'자를 찾아 오래된 마을을 습격하는 전염병처럼 행동한다.
어쩌면 국가에 필요한 건 전기가 아니라 당산나무인지도 모른다. 잠깐이라도 안전하지도 않은 안전모를 벗고 강압에 눌려 일그러진 머리에 바람이 닿게 하고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는 수많은 머릿결이 숨 쉬는 걸 느낄 수 있는 당산나무가.

저항과 거부를 용인하지 않고 겁에 질려 사나워지는 집단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너그럽고 용기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
이 땅에서 가장 적게 쓰고 가장 적게 버리고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촌에 사는 할매들이고 삼평리의 할매들이다.
맨날 씻어도 깨끗한 마음은 가질 수 없는 권력집단은 물만 더럽히지 말고 이제라도 할매들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윤영배 씨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윤영배(가수, 작곡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