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가 말하고 싶은 것들 VS 말하지 못한 것들 (3)-피케티를 살리는 길

[주례토론회] 3부: 공황과 전쟁, 분배영역의 계급투쟁, 세금

(앞의 글-피케티가 말하고 싶은 것들 VS 말하지 못한 것들(2)에 이어서)

세제인가, 전쟁과 공황인가?

시간단위를 작게(<그림 9>의 경우 10년) 잡으면 자본수익률의 변화가 훨씬 역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혹시 이것이 아직도 어려우신 분들은 아래 <그림 10>을 보라. 이는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증가율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먼저 (a)는 미국 경제분석국(Bureau of Economic Analysis)에서 제공하는 연간자료를 그대로 썼고, (b)와 (c)는 이를 각각 10년 및 20년 단위로 묶어서 연평균을 내 그린 것이다.

  <그림 9> 1810~2010년 프랑스의 자본수익률 대 경제성장률 : 모든 수치는 해당 10년의 연 평균치. [출처: http://piketty.pse.ens.fr/en/capital21c2 및 http://piketty.pse.ens.fr/fr/inheritance. 김공회 외 지음,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바다출판사, 2014, 211쪽]

  <그림 10> 상이한 시간단위에 따른 미국의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추이 -(a) 1년 단위 연평균 [출처: 김공회 외 지음,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바다출판사, 2014, 213쪽]
  <그림 10> 상이한 시간단위에 따른 미국의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추이 - (b) 10년 단위 연평균 [출처: 김공회 외 지음,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바다출판사, 2014, 213쪽]
  <그림 10> 상이한 시간단위에 따른 미국의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추이 - (c) 20년 단위 연평균 [출처: 김공회 외 지음,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바다출판사, 2014, 213쪽]

특히 우리는 프랑스의 경우(<그림 9>),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 미만으로까지 급격히 떨어지는 데는 세제보다는 경기변동, 즉 공황(1920년대)이나 전쟁(1940년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프랑스에서뿐만이 아니다. 피케티 자신이 <21세기 자본>에서 내놓는 <그림 8>을 보더라도, 1913~50년 기간에 있었던 자본수익률의 감소분(4.0%포인트) 중 세제에 따른 감소(1.5%포인트)보다 전쟁에 따른 자본파괴(2.5%포인트)가 더 결정적이었다. 물론 여기서 피케티는 '전쟁'이라고 했지만, 거기엔 대공황에 따른 자본파괴도 상당 부분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공황(crisis)은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자본이 수익성을 회복하는 전형적인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파괴이자 재건이다. 마르크스는 이 공황이 국지적인 게 아니라 일반화된 형태로, 그리고 우연적인 게 아니라 필연적이고 주기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을 현대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았고, 이런 성격은 이후 그의 사상을 잇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다. 여기서 이를 모두 열거할 순 없고, 분명히 지적할 점은 피케티가 이 공황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을 평가할 때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적인 움직임을 '자료를 통해' 보여줄 때조차도 공황의 역할을 무시한다. 이를 폭로하는 게 바로 <그림 8>이고, <그림 10>을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단위기간을 길게 잡으면 공황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경기변동이라는 것을 결코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은 또 어떤가? 피케티는 20세기 초반 유럽에서의 '대전'이 우연인 것처럼 말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전쟁이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의 폭발임을 역설해 왔다. 대표적으로 레닌의 <제국주의론>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당시 국가권력과 유착된 독점화된 자본들 간의 세계적 경합(rivalry)의 산물임을 아주 간결하게 보이고 있다. 기실 전쟁은 과잉축적된 자본을 해소함으로써 일정하게 자본의 수익률을 유지하고 경제를 통제하는(fine-tuning)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최근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에 자본의 탐욕이 어떻게 개입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탐욕을 채워주는 게 다름 아닌 국가권력이며, 그 자원은 무엇보다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대지 않아도 (적어도 좌파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상식'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피케티가 관찰하고 강조한 자본수익률의 저하는 세제를 통한 국가개입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 동학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피케티는 이러한 사정들을 보여주는 자료를 확보하고 있을 텐데도, 정작 <21세기 자본>에서 그가 선택한 자료제시방식은 이를 보여주기가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자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지에 따라 상이한 결론들이 나올 수 있음을 새삼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토론도, 이런 측면들에 집중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피케티가 엄청난 자료를 모았다!'라는 칭송만 되풀이할 것인가?


세제인가, 노동운동인가?

이제까지 암시되었듯이 <21세기 자본>은 분배에 대한 연구서이기만 한 게 아니라 20세기 경제사에 대한 상당히 독특한 시각을 담고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강력한 세제 덕분에 자본수익률이 낮아져 불평등이 완화되었다는 피케티의 견해는, 어떻게 보더라도 우리에게 그리 친숙한 것은 아니다. 이는 과연 이제껏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해 온 20세기 역사와는 매우 다르다.

그간 우리가 '상식'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20세기 자본수익률의 동향과 관련해서 이제껏 마르크스주의 안팎의 많은 진보적 학자가 노동운동이나 공황의 역할을 강조해 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20년대와 70년대의 끔찍한 공황은 이후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의할 정도로 그 여파가 컸고, 그 과정에 노동운동의 융성과 퇴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20년대 공황 이후엔, 체제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노동운동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자본과 노동이 일종의 ‘타협’을 도모함으로써 성장의 과실을 양자가 평화롭게 배분하는 방향으로 하나의 ‘조절 양식(mode of regulation)’이 성립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통했다. 여기서는 최소한 생산성 상승에 비례한 임금 인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고, 대기업 임원 보수는 제한되었으며, 국가기구에 의한 경제의 조직과 운영이 매우 광범위한 수준에서 이뤄졌다. (……)
다른 한편, 1970년대의 공황 이후엔 선진국들에서 노동운동의 퇴조가 두드러졌다. 이는 곧 새롭게 수립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비정규직의 증가, 자본의 세계화 심화 등을 의미했고, 자본의 수익성을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또는 수익성 저하를 상쇄하는—역할도 했다." (김공회 외, <왜 우리는 불평등해 질 수밖에 없는가?> 53-5쪽)

요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고 또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수익률을 낮추는 데 있어, 노동자 등 피착취계급의 저항과 정부가 부과하는 세제 중 어느 것이 더 유의미했는가? 또는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었는가? 적어도 이제까지 우리는 전자의 역할을 강조해왔고, 따라서 피케티는 이러한 기존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은 셈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이러한 기존의 이해방식보다 왜, 어떻게 나은지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질문을 피케티는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문제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고 들어가면, 세제와 노동운동이 결코 양자택일의 사안이 아님이 드러난다. 과연 20세기의 강력한 세제는 노동계급의 세력, 그리고 노자관계의 양태와 무관한 것인가? 피케티도 인정하듯, 20세기 초반 높은 누진세제의 도입이 단순히 전쟁의 결과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로소득에 대한 당대 사회의 깊은 반감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그들에게 사회개혁을 하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사회혁명을 선사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특히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은 혁명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곧 동구의 사회주의 혁명과 서구의 강력한 노동운동은 선진국들 정부로 하여금 가히 혁명적이라고까지 할 사회개혁 조치들의 채택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단락의 내용에 대해선 김공회 외, <왜 우리는 불평등해 질 수밖에 없는가?>, 7장 참조).

자본주의 경제의 분배와 세제—그리고 계급관계

분배와 관련해 계급관계를 강조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제의 좀 더 심층적이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피케티의 관심의 초점이 오로지 분배 영역에만 맞춰져 있음은 이미 확인한 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생산과정의 결과로서의 1차적 분배가 아닌, 정부개입에 의한 2차적 분배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1차 분배에의 관심은 오직 2차분배가 거꾸로 1차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일 뿐이다. 이를테면 피케티는 고임금에 대한 몰수적(confiscatory) 과세가 지나친 고임금을 방지해, 기업으로 하여금 저임금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줄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분배에서는 1차분배가 훨씬 더 결정적이다. 2차 분배는 부차적이며, 그 효과도 불분명하다.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국가에 의한 재분배영역이 아닌 경제적 분배의 영역에서 상이한 계급들은 서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급적 시각을 견지한다'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1차적인 경제적 분배를 중심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각 계급들이 경제적 분배의 영역에서 어떻게 서로 맞닥뜨리고 상호작용하는지를 간단히 보이기 위해, <그림 11>을 그려 보았다. 여기서 나는 피케티의 자본개념을 따랐고, 전체 인구를 자본소유자와 비자본소유자로 나눴다. 편의상 전자는 자본소득만을, 그리고 후자는 노동소득만을 거둔다고 가정하자. 즉 후자는 모두 노동자(L)다. 한편 피케티의 자본소유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피케티가 이렇게 나눈 것은 아니다). 첫째, 생산행위를 수행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자본가(C1), 둘째, 생산에 직접 참여는 않지만 을 지원하는 대가로 일정한 '수수료'를 챙기는 자본가(C2), 끝으로, 생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은 없고 노동자에게 주거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임대료를 받는 자본가(C3) 등이다.

  <그림 11-1> 상이한 유형의 자본가들과 노동자 간의 분배 (1)

경제의 생산과 분배는 이들 각각의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첫째, C1이 L을 직접 고용하여 생산이 이뤄지고, 한 경제 내에서 이러한 생산을 모두 모으면 총생산(GDP)이 된다(a). 총생산은 먼저 노동자(L)와 자본가(C1) 간에 임금-이윤으로 분배될 것이다(b).

  <그림 11-2> 상이한 유형의 자본가들과 노동자 간의 분배 (2)

둘째, 이제 C1은 생산 또는 상품의 가치실현에 도움을 준 다양한 자본분파들(C2)에 대해 이자나 지대 등의 형태로 보상해주고, 노동자도 자신에게 주거서비스를 제공해준 자본가(C3)에게 임대료를 나눠준다(c). 이로써 한 해의 총생산량의 분배가 완성된다(d).

그렇다면 세금은? 기본적으로 세금의 양은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국가의 역할이란 어떤 추상적 원칙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사회세력들 간의 합의를 반영해 (잠정적으로) 규정된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 대체로 GDP의 25~30%가 세금으로 걷히고 있는데, 이러한 수치는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역할에 대한 선진국 사회세력들 간의 일정한 합의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세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거둬들인다(소득세, 소비세, 재산세 등). 물론 어떤 세목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줄 것이고 결과적으로 각 계급에게 어느 정도의 부담을 지울 것인지 또한 계급 간 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림 11-3>의 (e)는 주어진 1차분배 위에 세부담이 각 계급들에게 배분되는 한 예다. 음영으로 표시된 부분이 총조세를 나타낸다. 여기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똑같은 양의 조세도 각 계급에게 상이한 비율로 그 부담이 귀착될 수 있다.

  <그림 11-3> 상이한 유형의 자본가들과 노동자 간의 분배와 세금

조세부담의 귀착이 계급관계의 양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증세의 필요가 있을 때 정부가 추가적인 세수를 어떻게 거둬들이는가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림 11-3>의 (f)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파란색 음영이 새로운 수요를 반영한 총 조세다. 최근 한국 정부의 담뱃값 인상안을 보라. 정부는, 특별소비세를 신설/강화하더라도 왜 하필 고급 요트나 해외명품이 아니라 담배를 선택한 것인가?

이상의 논의는, 피케티가 세제에 지나칠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세제의 경제적 의의를 결코 온전히 밝히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물론 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피케티가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최근 한국의 담뱃값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세제의 계급 간 불평등에 대한 함의는 결코 소득세 분야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소득세는 누진적이었던 반면 소비세는 역진적이었음을 고려하면, 나아가 저소득층에게 소비세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소득세만 가지고 불평등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분배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모습들

이제 1차분배의 영역에서 계급 간 대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자(여기까지 읽으며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를 중심으로 보면, 가장 먼저 이들은 생산의 영역에서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C1)와 임금의 결정을 두고 대치한다. 따라서 임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유산자와 무산자 간의 불평등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이다. 실제로 최근 불평등의 심화도 비정규직 일반화 등에 따른 임금인하에 기인한 바가 크지 않은가. 둘째, 노동자들은 주택임대료의 결정을 두고 와 대치하기도 한다. 사실 주거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그것은 도시로 몰려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였고, 주거권의 보호와 주거안정을 위한 세입자들의 투쟁은 언제나 사회적 불평등 퇴치를 위한 최전방의 투쟁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주거문제는 노동자들의 삶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남아있다.

끝으로, 노동자와 , 예컨대 금융권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전통적으로는 양자 간에 직접적인 관계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줄잡아 1997년 위기 이후 일반가계의 금융권에의 접근성이 (이른바 '금융포용 financial inclusion'이라는 미명 아래) 크게 신장되었다. 대규모의 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따른 가계소득의 급감과 금융권의 수익성 확보 욕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였고, 내구재에 대한 할부금융, 신용카드, 주택담보대출 등이 주된 도구였다. 바로 그 결과가 오늘날 한국경제의 가장 위험한 '뇌관'으로 꼽히는 1천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단순히 가계의 소비수요가 현재소득을 넘어서기 때문에만 증가한 게 아니다. 고율의 연체이자나 제2, 제3금융권의 살인적인 이자율 때문에 부채 자체가 스스로 커지는 측면이 매우 크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수요자인 노동자(L)는 C2와 이자율의 결정을 둘러싸고 대치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제로금리'에 가까운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서 대부업 최고이자율은 35%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요컨대 대부분 임노동자인 비자본소유자들은 자본소유자들을 상대로, 임금의 결정과 일반적으로 산업민주주의의 확립을 둘러싸고, 주택 임대료와 주거권 내용의 결정을 둘러싸고, 이자율의 수준과 채무자 보호를 위한 각종 조처의 시행을 둘러싸고 매순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최종적으로 <그림 11>에서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파이의 크기'를 결정할 것이다. 세금은 바로 그 위에서 걷는 것이다.

피케티의 불평등론: 최종적 판결

지금까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일별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자본주의 발달의 장기경향 위에서 불평등을 조망하고 그 해결책을 논했다는 점에서, 이 저작을 통해 피케티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오고 있는 불평등 논의를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그는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보수적이거나 부패한 정권의 '나쁜 정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 동학에서 구하는 것이다.

적어도 '의도'에 있어서 그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일정한 법칙 도출을 통해 불평등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이고자 했듯, 실제 그의 핵심 변수인 자본수익률(r)은 완전히 무개념적이며, 이를 경제성장률(g)과 대치시킴으로써 불평등의 심화-완화 양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세제를 통해 r을 g보다 낮추면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그의 핵심 아이디어도 근거가 없다. 이와 관련, 이 글에서는 첫째, 불평등 양상은 r과 g 중 어느 쪽이 큰 것인가 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즉 예컨대 r이 g보다 작아도 최상위 1%의 소득비중은 커질 수 있다는 것), 둘째, 20세기 역사에서 r이 g보다 낮은 수준으로까지 저하한 것은 세제보다는 전쟁이나 공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이고자 했다.

나아가 나는 본문에서 오늘날 불평등은 정부의 세제상의 변화(=약화)가 아니라 노동대중과 자본가집단 간의 계급관계의 양상, 양자간의 직접적인 계급투쟁에 의해 더 크게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실제 오늘날 현실에서 양자는 크게 임금 결정, 주거임대료 결정, 이자율 결정 등을 둘러싸고 대립중이며,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간에 급격히 벌어진 계급 간 격차, 곧 불평등 심화는 바로 이러한 싸움들에서 선진 각국이 국제적 자본가계급들과 결탁해 위기극복, 경제성장, 발전 등의 명목으로 노동대중이 그간 일궈온 삶의 기반을 파괴한 데서 일차적으로 기인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불평등의 심화 원인이 대체 무엇인가? 피케티가 강조하는 세제상의 변화, 곧 1970년대 중반 이후 부자들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의 세제변화도, 결국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요컨대 그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 나아가 불평등 심화의 원인 분석은 완전히 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자들에 대한 세제 강화라는 그의 해법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의 해법이 자본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순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전통적 의미의 '개량주의자'이지만, 그가 내놓는 불평등 완화책은 자본을 사실상 '몰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급진적인 성격도 있다. 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오늘날 세계의 불평등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케티가 내세우는 처방들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불평등의 진정한 완화책은 못 된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다시,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급진성을 담보할 분석적, 정치적 시야가 피케티에겐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급진적 해법을 그저 의회에서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공식적인 의회정치란 좀 더 날것의 정치, 즉 거리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회계급들 간의 직접적인 투쟁들의 반영일 뿐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피억압 대중들이 경제적 삶의 기반과 정치적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에서, 무슨 수로 피케티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정책들을 실행시킬 수 있겠는가? 과연 어떻게 자본가 집단의 '양보'를 강제해낼 것인가?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나는, 피케티의 중요한 정책제안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피케티를 급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피케티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날 선진국 정부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재정위기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제안하는 세제개혁이 절충적인 형태로나마 실현될 가능성은 있다. 외형상 이는 소득 최상위 1%에 대한 공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저절로 나머지 99%를 위한 조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닥에 있는 대다수의 노동대중이 중심에 서지 못하는 한, 여기서 이득을 보는 것은 그 1%를 잇는 9% 또는 19%일 가능성이 크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99%를 위한 경제학이 될 것인가, 아니면 9% 또는 19%를 위한 경제학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