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 실증분석에서 어떻게 곡해되었나?

[기고] 자본 물신성에 사로잡힌 이윤율 실증분석


0. ‘이윤율 실증분석’에 대한 비판

지난 번 내 글(“2008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 및 붕괴논쟁 평가”, <참세상>, 2014. 10. 19.)은 지난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과 위기논쟁을 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현 상태에 근거해 평가한 것이어서 사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또 그 글로써 좌파 위기논쟁은 시시비비가 가려져 합리적 사고만 있더라도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외의 좌파의 위기론들이 더 이상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이론적 발언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그 글은 나로서는 좌파 위기논쟁을 종결짓는다는 의의가 있는 글이었다.

그런 만큼 내 글에 대한 김덕민의 반론(“이윤율 저하를 둘러싼 위기논쟁의 잘못된 교리들”, <참세상>, 2014. 11. 30.)은 뜻밖이었는데, 이 반론은 역시나 명백한 오류에 근거한 것이어서 전혀 수긍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좌파 논객들, 지난 글에서 거론했던 뒤메닐/레비, 山田銳夫, 브레너, 정성진, 윤소영 등이 실증분석에서 사용하는 이윤율 개념(s/K)인데, 이게 마르크스의 개념이 아닌데도 이를 마르크스 분석이라고 강변한다는 것이다. 이 잘못된 개념에 입각해서 자본주의 동학의 실증분석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의 오류만 명백히 하면, 사실 자본주의 동학에 대한 이들의 분석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 오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뒤메닐/레비를 따라가는 김덕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덕민은 반론에서 이 개념에 대한 D. 폴리 등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번 계기에 이들이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을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히 함으로써 이윤율 실증분석에 관한 논쟁을 보충하고자 한다.

1.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과 폴리의 이윤율 개념의 차이

주지하다시피 상품의 가치(w)는 생산에 소모된 불변자본(c), 가변자본(v), 잉여가치(s)로 구성된다(w=c+v+s). 소모된 불변자본은 마멸된 고정불변자본과 유동불변자본의 합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윤율(p)은 (소모된 불변자본+가변자본)이 아니라 총투하자본C(투하된 불변자본+가변자본=투하된 고정불변자본+유동불변자본+가변자본)와 생산된 잉여가치 사이의 비율이므로 p=s/C다. [단, 투하된 유동불변자본은 1회전의 생산에서 모두 소모된다고 가정하면 투하된 유동불변자본과 소모된 유동불변자본은 같다.] 그리고 자본의 연간 회전율을 n이라 하면 연간 이윤율은 p=n*s/C로 수정된다.

이와 달리 폴리(D. K. 폴리, <아담의 오류>, 후마니타스, 2011, 295-297쪽)는 이윤율(r)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r=s/K. 그런데 폴리에 따르면 (c+v)는 비용 플로우, K는 자본스톡이라며 양자 간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T=K/(c+v), 다시 쓰면 (c+v)*T=K. T는 회전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윤율은 r=s/{(c+v)*T}가 된다. 그런데 회전시간이란 3개월, 6개월, 1년, 2년 등 자본이 1회전하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을 말한다. (c+v)에 T를 곱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식이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아마도 회전수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승민의 지적처럼 D. K. Foley, Understanding capital, 제6장에서는 이윤율이 r=s/K=[s/v]*[v/(v+c)]*[(v+c)/K] 또는 r=e*k*n=q*n [단, q=s/(c+v)]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오류>에서 이윤율은 s/K={s/(c+v)}*{(c+v)/K}=q/T이니까 n=(1/T)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면 자본의 연간 회전수 n=1/T. 예컨대 회전시간 T가 3개월이면 연간 회전수 n=4 번, T가 2년이면 n=0.5 번,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그러면 폴리의 위의 관계식은 1/n=K/(c+v) 또는 n=(c+v)/K가 된다. 이처럼 회전시간과 회전수를 혼동하는 게 나는 납득이 안 된다. 회전시간, 회전수 같은 개념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기초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잡아 놓아도 후에 보는 바처럼 (c+v)/K는 연간 회전수가 아니고, 또 자본스톡 K는 총투하자본도 아니다. 폴리는 이 식 하나에서 세 가지(!) 오류나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런 마르크스 기본개념의 오독은 다른 논자들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아리기는 마르크스의 자본의 일반정식 M-C-M'의 M-C 는 실물적 팽창, C-M'는 금융적 팽창이라는 식으로 원용해서 이른바 체계적 축적순환을 제시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M-C 도, C-M' 도 자본의 유통과정 아닌가? 정말 어이없는 해석인데, 내가 이들의 문헌을 불신하는 게 이렇게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교정된 관계식에 따라 폴리의 연간 이윤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r=s/{(c+v)*T}=n*s/(c+v). 이 식이 마르크스의 연간 이윤율 p=n*s/C와 다르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마르크스의 이윤율은 총 투하자본(=투하된 불변자본+가변자본) 대비 연간 잉여가치의 비율인 반면, 폴리의 이윤율은 (소모된 불변자본+가변자본) 대비 연간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폴리의 이 이윤율은 김덕민이 이윤율은 자본스톡에 대해 계산해야지 이렇게 계산하면 안 된다고 하던 바로 그 이윤율이다. 그의 반론은 그냥 무색해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이윤율과 폴리의 이윤율이 어떻게 다른가 보기 위해 예를 들어보는 게 더 좋겠다. <자본론> 제3권 제4장은 전체가 편집자로서 엥겔스가 추가한 부분인데, 그 중 하나의 예를 가져와 보자.(<자본론>III(상), 제1개역판, 비봉출판사, 2004, 83-84쪽.)

이제 어떤 자본이 10,000의 고정자본[연간 마멸분 1,000]과 500의 유동불변자본 및 500의 가변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잉여가치율은 100%고 가변자본은 연간 5 번 회전한다고 하자.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하여 유동불변자본은 가변자본과 똑같은 회전을 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1회전시간의 생산물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200c(마멸분)+500c+500v+500s=1,700


그리고 5번 회전한 연간 총생산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000c(마멸분)+2,500c+2,500V+2,500s=8,500


C=11,000[=고정자본 10,000+유동불변자본 500+가변자본 500]

s=2,500; p=2,500/11,000=22.7%


위의 예로부터 보다시피 이 경우 마르크스의 연간 이윤율 p는 22.7%고, 폴리의 이윤율은 r=5*500/(200c+500c+500v)=2,500/1,200=208.3%다. 이렇게 둘은 개념도 값도 서로 다르다. 폴리를 따라 아래처럼 n=0.12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r=0.12*500/{(200c+500c+500v)}=60/1,200=5%. 즉 마르크스의 이윤율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폴리가 말하는 회전수 n=(c+v)/K는 사실 자본의 연간 회전수가 아니다. 위의 예에서 보면 (c+v)/K=(200c+500c+500v)/10,000=1,200/10,000=0.12 번이다. 마르크스를 따라 계산하면(<자본론> 제2권 제9장 참조) 우선 가변자본(과 유동불변자본)의 연간 회전수는 각각 5번이라 했다. 고정불변자본의 경우는 1년에 1,000c가 마멸되고 새로운 상품에 이전되므로 고정자본의 회전시간은 10년, 연 회전수는 0.1 번이 된다. 총자본의 연간 평균 회전수는 연간 회전한 자본가치를 투하된 자본가치로 나눈 값이다. 즉 마르크스의 회전수= {1,000c(마멸분)+2,500c+2,500V}/(고정자본 10,000+유동불변자본 500+가변자본 500)=6,000/11,000=0.545 번이다. 폴리의 (c+v)/K=1,200/10,000=0.12는 자본의 연간 회전수가 아니라 경제학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비율일 뿐이다. 그리고 자본스톡 K는 총투하자본 C와도 다른 것이다. 위의 예에서 K=10,000, C=11,000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p=s/C(또는 p=n*s/C)와 r=s/K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폴리의 이윤율 r=s/K와 마르크스의 이윤율 p=s/C 또는 p=n*s/C는 서로 같을 수가 없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서로 다른 개념, 다른 비율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위기에 대한 이들의 분석과 전망이 잘못된 것도 당연한 결과다. 이런 잘못된 이윤율에 입각한 분석이었고, 게다가 그것을 마르크스주의 분석인 것처럼 채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윤율 공식이 제기하는 질적인 문제와 자본물신성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에서는 이윤율 공식에서 나타나는 양적 관계뿐 아니라, 그 공식을 통해 착취의 본질적 관계가 왜곡된다는 질적인 문제지적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윤(율)이라는 게 총유통과정에서의 잉여가치(율)의 전화된 형태인데도, 이윤(율)이라는 개념에서 이윤(율)은 가변자본 즉 착취로부터 생산된 것이 아니라 총자본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자본물신성이 지배한다. 마르크스는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으로부터 총유통과정으로 자본의 상향의 전개에서 가변자본이든 불변자본이든 투하된 총자본으로부터 이윤이 나온다는 표층의 이 관념이 자본주의 착취관계를 은폐하는 문제를 특별하게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폴리, 뒤메닐 등은 이윤율의 실증분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윤(율)은 가변자본과는 전혀 관계없고 오로지 불변자본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식으로 ‘독창적으로’ 정의함으로써 마르크스를 왜곡하고 자본물신성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 논객들조차 이들의 이윤율 정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증분석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도 자본물신성의 완전한 포로라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정성진(<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책갈피, 2005, 76-77쪽)은 이들의 이윤율 계산을 다음처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나는 이윤율은 ... 자본가계급이 ‘일상의식’에서 실제로 의식하고 투자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윤율은 s/K(정성진에서는 P/K, P: 이윤)가 맞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 이윤율은 마르크스의 이윤율이 아니며, 정성진이 자본가의 의식을 따라 그 물신성에 사로잡혀 마르크스 개념을 왜곡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이윤율의 추세적 변동을 통해 자본주의의 동학을 분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으로 자본주의 동학을 설명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들에 대한 내 비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그나마 이런 실증분석도 없는 게 문제라 할 게 아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혼동을 주는 분석은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것이다. 그래서 폴리와 뒤메닐, 브레너 등의 문헌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연구자들이 이제 이들을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와 동학을 왜곡하는 작업은 청산하는 게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