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부동산 소유가 복지를 대신하게 됐을까?

[주례토론회] 한국의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와 조세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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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발표문은 생활보장체제 개념을 이용하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체계가 어떻게 형성, 변화되어왔는지 살펴보고, 이러한 생활보장체제가 산업화 초기 국가의 저축동원과 조세정치의 산물임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 복지국가에 관한 논의들은 연구대상을 사회정책이나 이와 직접적인 대체관계에 있는 기업복지 혹은 사적이전 등으로 국한시켜온 한계가 있다. 반면 이 글은 기존의 복지국가 논의들에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던 가계저축이나 가계자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 및 정책적 조건으로서 국가의 재산형성 촉진정책과 근로소득 면세 제도 등이 매우 핵심적인 생활보장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보장체계의 특징은 기존의 국가 중심적 접근이나 사회 중심적 접근, 혹은 생산체계 접근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며, 재정사회학적 관점에서 국가의 자본동원전략 속에서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한국의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발달과정

1> 한국은 산업화 초기 심각한 자본부족 문제에 직면하여 가계저축을 통한 자본동원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국가가 시중은행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억제와 저축장려를 통해 유휴자본을 최대한 은행으로 흡수하고 이를 국가가 신용할당을 통해 선별적으로 배분하는 자본동원전략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가계저축 증대를 위해 저축캠페인과 저축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저축장려운동을 통해 국가는 합리적 소비생활과 근검, 절약, 저축 등 자본주의적 생활규범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국가복지는 최대한 억제하고 복지를 낭비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국민들에게 저축에 기반한 자조적인 생활보장체계를 강제했다. 그러므로 산업화 초기 한국의 높은 가계저축률과 자조적인 생활태도는 유교적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 지배엘리트의 자본동원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외자에서 내자로 이동 (자료: 통계청)

2> 1970년대 자본축적의 위기와 정당성 위기에 지배엘리트는 중화학공업화 전략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저축동원이 강조되고 이것이 1970년대 재분배의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가용자원을 중화학공업화에 총동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적 지출이 억제되는 상황에서 국민의 조세부담률을 일방적으로 인상시킬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국가는 근로소득 면세 제도를 통해 조세정책을 소득보장 수단으로 활용한다. 조세동원이 제약됨에 따라 가계저축의 동원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낮은 실질금리 속에서 가계저축을 증대시키기 위해 ‘근로자재산형성저축’제도와 같은 사회보장적 성격이 강한 저축 우대조치가 취해졌다. 이것은 저축동원전략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질금리와 가계저축율 [출처: 한국은행, 한국도시가계조사]

이렇게 중화학공업화의 추진과정에서 저축동원전략을 활용한 결과 저축을 기반으로 한 생활보장체계가 형성된다. 근로소득 면세 제도의 도입으로 국가의 과세규모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입의 대부분이 경제적 지출과 국방비 등으로 할당되는 상황에서 국가가 사회적 지출을 늘릴 여지는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국민복지연금제도나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사회정책은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반면 가계의 입장에서는 낮은 소득세 부담과 가계저축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가 가족주의적 생존전략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물질적 기초를 제공해줬다. 그러므로 1970년대에는 공적 복지 대신 가계저축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보장체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소득수준도 낮고 사회적 양극화도 심했기 때문에 소득세 감면과 저축장려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계층이 매우 한정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저축에 기반한 생활보장체계가 안정적으로 제도화되는데 실패한다.

3> 1980년대 민주화 이행으로 정당성 위기에 직면한 지배엘리트는 중산층 육성 전략을 통해 분배갈등에 대응했다. 1970년대에 도입된 근로소득 면세 제도와 재형저축, 그리고 사회적 지출의 억제와 사회정책의 형식화는 1980년대 재분배의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불공평한 조세체계로 인해 조세저항이 심하고, 기금위주의 재정운용으로 인해 복지재정의 마련도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재형저축과 같은 저축장려조치들은 사회적 차원에서도 개별적 자조적 생활보장수단에 대한 선호구조를 낳게 되었다. 중산층 육성 전략은 이러한 제도적 조건과 사회적 선호구조를 반영한 것으로서 국가재정의 부담은 최소화하고 대신 재산형성 촉진과 같은 금융적 방식을 강조했다.

중산층 육성 전략은 1970년대에 도입된 제도와 뚜렷한 연속성을 지니지만 70년대에 비해 분배적 측면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1970년대의 근로소득 면세 제도나 재형저축제도가 모두 내자동원 차원에서 임기응변적으로 도입된 것들이라면, 중산층 육성 전략에서도는 이러한 제도들이 분배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주택문제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재산형성 촉진정책이 적극 활용되었다. 이것은 동일한 제도가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제도전용의 사례에 해당한다. 이와 함께 소득세 감면이나 재산형성지원의 혜택을 받는 정책수혜대상의 범위도 보다 광범위해졌다. 노동계급 또한 노동자 대투쟁 이후 조직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생활보장수단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주화 이행을 거치면서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가 제도화된다.

  자가소유주 증가 (자료: 통계청)

4>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촉발된 자본축적의 위기에 대응해 지배엘리트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함께 복지확대를 추진했다. 외환위기 이후 실업과 조기퇴직, 고용조건의 불안정화 등 노동시장 조건이 급격히 변화되면서 국가복지의 필요성이 크게 증가했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외환위기 이후 국민연금의 전 국민 확대적용, 의료보험통합,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전 사업장 확대적용,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등 매우 가시적인 복지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세의 정치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위기로 과세기반이 붕괴한 상황에서 오히려 기존의 조세개혁마저 후퇴하고, 중산층 서민 대책의 일환으로 다시금 소득세 감면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국민연금개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복지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이해갈등이 발생한다. 그 결과 복지확대에도 불구하고 사각지대 문제가 발생하는 등 제도적 결함이 상당수 남게 된다.

  외환위기 이후 소비자 (주택) 금융의 변화 [출처: 유경원, 조은아 <소득계층별 가계저축률 격차 확대의 원인 분석>, 2006]

복지확대전략이 기존에 형성된 이해관계 및 선호구조와 충돌하면서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규정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공적 복지의 확대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더구나 노동시장 유연화나 고령화와 같은 사회구조적 변동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산층 가계는 여전히 자산증식과 재테크를 중요한 생존전략으로 활용한다. 특히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민간연금과 같음 금융자산보다는 생활보장수단으로서의 부동산에 대한 편향이 더욱 커지게 된다. 하지만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은 가계부채의 증가를 초래하고 이것이 다시 자산가격을 상승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금융화로 귀결되었다.

  주택가격 상승과 가계부채 [출처: 국민은행 주택가격지수, 한국은행]

국가와 사회의 이분법을 넘어서

근대국가의 사회정책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산업사회가 제기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둘째, 사회정책 실행에 필요한 관료적 역량을 어떻게 조직하고 동원할 것인가? 셋째, 사회정책 실행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첫 번째 질문이 복지국가의 기능적 측면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복지국가의 수단적 측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중심적 접근과 국가중심적 접근은 모두 복지국가의 재정적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일면적이고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국가중심적 접근이 비판해 온 것처럼 사회정책을 단순히 사회적 투쟁의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단순히 사회세력의 요구를 반영하는 수동적이고 중립적인 제도라도만 할 수도 없다. 사회정책을 실제로 입안하는 국가관료의 입장에서는 사회적 지출을 늘리거나 축소시키는 것은 매우 핵심적인 정책적 관건일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지출 증대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국가관료들의 역할에 대한 국가중심적 접근의 강조는 복지국가와 시민권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국가관료가 아무리 자율성과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계급이 사회적 지출 증대를 위해 싸웠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국가관료가 사회적 권리를 위해 싸웠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정책이 현대 국가예산에서 차지하는 재정적 비중을 고려할 때, 그리고 최근 복지국가 개혁과정에서 복지국가의 재정적 측면이 특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회관료들은 재정조달을 위해 사회세력과 갈등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관료들은 사회관료들일지라도 국가가 어떤 국내적 국제적 조건에 처해 있으며, 국가가 어느 정도의 재정적 재량을 지니고 있는지를 고려해서 문제를 판단할 것이며, 사회적 문제를 국가운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그동안 복지국가 연구들은 대부분 계급역량이나 관료의 역량, 정당, 국가구조 같은 변수에만 주목해 왔을 뿐, 국가의 재정적 측면은 간과해왔다. 하지만 사실 사회정책은 현대국가가의 가장 큰 예산지출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재정적 문제’이기도 하며, 따라서 복지정치는 ‘누가 사회정책의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싸고도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지정치의 핵심 변수라고 할 수 있는 계급이나 관료, 정당의 역할 등은 사회적 차원뿐만 아니라 재정적 차원에서도 설명될 필요가 있다.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한계와 한국의 복지국가 전략

가계자산과 낮은 조세부담을 근간으로 하는 생활보장체계는 분배적 측면에서는 매우 역진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권리를 탈정치화하는 등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우선 근로소득 면세 제도와 같은 감세제도는 근로소득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혜택이 주어지고, 상위소득계층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배타적이고 역진적인 고용연계 복지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소득공제로 인한 국가 조세수입의 감소는 일반조세를 통한 복지지출을 어렵게 함으로써 시민권에 토대를 둔 복지제도의 성장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복지를 권리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가계저축에 대한 강조는 재산증식을 통한 자립이나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 가치를 심화시킴으로서 사회적 연대의 토대를 침식한다.

최근 한국이 처한 상황은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노인 빈곤율, 부동산격차의 심화, 불평등의 세대간 재생산과 세대갈등의 심화, 그리고 결혼기피와 저출산 현상 등은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이미 매우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주택구입이나 교육 등 가계지출에서 사회스비스 구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가계저축이 하락하고 있는 현상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기존에 삶의 안전성을 제공해주었던 가계저축이라는 수단마저 생활보장수단으로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높은 가계저축을 기반으로 유지되었던 가족주의 연대전략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반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공복지의 성장은 지체되어 온 결과, 가족이 기능적 과부하 상태에 빠지면서 전방위적 가족해체 및 탈가족화 현상이 초래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민주화 세력의 집권은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복지정치의 활성화 및 복지국가의 이륙을 예견케 했다. 하지만 복지정치의 활성화, 사회보장제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존 생활보장체계의 강한 경로의존성을 목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정과 조세 문제는 사회보장제도의 확장과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한국의 경우는 과거 경제성장 과정에서 무원칙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방식으로 조세정책을 실행해 온 결과 공평과세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배해 왔으며, 그 결과 시민사회로부터의 조세저항은 매우 심하고 국가의 과세역량은 상당히 취약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경로의존성이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복지개혁을 어렵게 했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향후 복지개혁이 기존의 생활보장체계와의 경로단절에 성공할 수 있으려면, 총체적인 계획 하에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복지개혁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도구적이며 정치적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무원칙적이고 비체계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사회정책이란 여타의 공공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조세와 저축, 사회정책이 매우 긴밀히 엮여 작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복지개혁은 새로운 발전모델의 구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에만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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