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들에게 예멘은 중동의 베트남이 될 것인가

“우리는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3월 25일 단호한 폭퐁(decisive storm)이란 작전명으로 예멘 공습을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만이 아니라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수단, 쿠웨이트, 아랍에미레이트, 카타르, 바레인도 이 전쟁에 참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은 전쟁을 시작한 대의명분을 시아파인 이란이 뒤에서 조종하는 시아파 후티반군을 몰아내고 중동의 평화를 되찾는 것으로 내걸었다. 전쟁이 난 하루 뒤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예멘 전 대통령 하디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국내외 주류 언론들은 중동을 분석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으로 예멘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 분석 틀은 언제나 그렇듯이 중동과 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밝히기보다는 복잡한 현실을 덮어버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을 침략한 가장 큰 이유는 인도양의 아덴만과 홍해를 연결하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의 석유의 안정적 수송 때문이다. 후티반군이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통제권을 갖게 되자마자 석유 가격은 솟구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전쟁 참가국들이 후티반군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시아파 이란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직접적인 경제적인 이익 때문이다.

현재 이란의 중요 관심사는 예멘이 아니다. 이란으로서는 1순위는 핵협상 타협을 순조롭게 마무리해서 20년간 지속돼온 경제 봉쇄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란의 핵협상 타결의 핵심은 이란이 중동에서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즉 중동에서의 전쟁의지가 없음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란으로서는 10여개 국가가 참가하는 이 전쟁의 한 축이 되는 것은 핵협상 타결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이다. 지난 해 이란은 후티반군에게 예멘의 수도 사나를 점령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불필요한 지역 내 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란의 작년 후티반군에 대한 권고는 현재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있다. 예멘 침략 전쟁의 배후에는 이란이 있을 거라는 미국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장만이 국내에서도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이란이 후티반군을 지원해 왔다는 주장도 후티반군과 알카에다의 지난 전투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2002년부터 미국은 예멘에서 알카에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예멘에서 알카에다 세력을 실제로 약화시킨 것은 후티반군이었다. 이 과정에서 후티반군은 잘 훈련된 군사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줬다. 굳이 이란의 지원이 없더라도 수도 사나를 점령할만한 자체적인 능력이 있음을 후티반군은 이미 보여주었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의 무력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기에는 후티반군의 군사력은 약하다. 그러나 이란으로서는 핵협상을 타결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가 있기에 예멘에서의 전쟁의 한 축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 정말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전쟁 참가국들이 국내외에서 겪는 곤란이다. 유엔은 공식적인 국제법상 절차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과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 비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4월 29일 국왕인 살만이 황태자인 무크린의 지위를 박탈하고 무하마드 빈 나예프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무크린이 예멘에 대한 개입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재 지배적인 분석이다. 바레인에서는 전쟁 참가에 대한 항위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쿠웨이트에서는 시아파 계열 정치인들과 법률가들이 전쟁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있으며 외무장관조차도 예멘 위기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이집트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정치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집트가 예멘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과 유사하다.

1962년 신정국가였던 예멘에서는 나중에 공화정파로 불리게 될 세속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1970년까지 왕당파와 공화당파의 내전이 지속됐다. 공화정파는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나세르 또한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 이집트는 1967년까지 5년간 지상군 7만 명을 파병했다. 내전은 공화파의 승리로 끝나 예멘은 공화국이 되었지만 이집트는 예멘 내전에 참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전의 공간이었던 북예멘은 여타 중동 지역과 다르게 산간지역으로 끈질긴 게릴라 전이 벌어진다면 정규군으로서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67년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6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예멘 파병군을 철수했다. 이집트는 중동의 맹주로서의 지위를 6일 전쟁 이후 잃어버렸는데 6일 전쟁 패배의 원인이 무리한 예멘 파병이라는 비판은 지금까지도 힘을 얻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국들의 예멘 침략은 분열되어 있던 예멘의 정치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게 만들고 있다. 예멘이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던 이유도 내부의 시아파, 수니파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종교 문제 외에 북, 남 지역 문제가 있다. 1962년 공화정파가 예멘 아랍 공화국(북예멘)을 건국해 남과 분리됐다. 남은 당시까지도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1967년 반영, 공산주의 세력이 무장투쟁을 통해서 예멘 인민공화국(남예멘)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이념이 다른 체제로 분단국가였던 예멘이 통일된 것은 1980년대 중반 남북 국경 지역에 유전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국경지역에서 공동으로 유전을 개발해야 했던 남, 북은 1990년 아예 통일을 해버렸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도 남쪽과 북쪽의 경제적 성장의 불균형은 내부 분열을 이념으로 분단된 시대와는 다르게 내부 균열의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균열은 현재 외세의 침략으로 봉합되고, 예멘 내부는 단결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군들의 폭격은 예멘의 이슬람 사원들을 파괴하고 있다.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었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도적인 의료 지원은 봉쇄됐다. 이슬람 이전에 건설돼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던 아름다운 고대 성곽도 파괴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이슬람 이전에 세워진 바미얀 불상을 파괴할 때 그토록 규탄하던 주류 언론들은 이 고대유물들의 파괴에 대해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며 수니파, 시아파가 대립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공습으로 파괴된 이슬람 이전의 고대 유적들. [출처: http://taizcity.net]

예멘은 북쪽 지역이나 남쪽 지역이나 외세에 대항해서 결코 물러나지 않았던 무장투쟁의 기억이 있다. 후티반군이 “우리는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다”고 한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근거를 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들에게 예멘은 중동의 베트남이 되고 있다.

  바엘만데브 해협과 예멘의 수도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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