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민족주의 진화과정, 평등하고 자유로운 꿈들의 좌절

[주례토론회] 힌두 꼬뮤날리즘과 세속주의, 모디의 발전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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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를 정면으로 보기

인도는 우리에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신들의 나라, 도를 닦는 구루들의 나라,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도 또한 우리와 같이 근대화의 진흙탕을 거쳐 온 나라이다. 예를 들자면 타고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종교 시인으로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는 벵골 민요에 바탕을 두고 서양식 작곡법을 결합시킨 대중적인 사랑노래도 만들고 불렀다. 우리에게 친숙한 타고르조차 기타잘리의 종교 시인으로만 알려져 있지 록으로 새로 편곡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랑 노래를 만든 대중음악가의 측면은 알려져 있지 않다. 타고르가 쓴 소설을 영화한 사티아지트 레이 감독의 ‘영화 외로운 아내(Charulatta)’에 수록된 ‘나는 알아요(Ami Chini go chini)’는 서양에서 온 소녀를 그리워하면서 만든 노래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7Os_8BN2qmw&list=RD3g8nQuX8dUg&index=11
서벵골의 청춘영화 ‘베드룸(Bed room)’에는 타고르의 노래가 록으로 편곡되어 삽입되었다. 타고르의 다른 면모를 느낌으로써 인도에 대해서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cjRLkITYhqk&list=PLHyvnqxNvwaxdEBU3ttvYW44HuaUicbJ3

영국 침략 이전 500여 개의 소왕국으로 흩어져 있던 ‘인도’라는 지역은 지금의 인도와 다르다. (페르시아 문화 영향권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지금의 인도를 아우르는 무슬림과 힌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영국 침략 이전의 인도, 영국 침략 후 독립 이전의 인도, 현재의 인도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인도를 볼 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 건설하고자 했던, 카스트도 계급도 종교간 갈등도 제국의 압제도 없는 독립인도에 대한 꿈이다. 독립 후 인도의 역사는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조국에 대한 꿈들의 좌절의 역사였다.

지금의 인도를 정면으로 보기 위해서는 ‘상상의 인도였던 독립 인도에 대한 아름다운 꿈들이 어떻게 좌절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 아름다운 꿈들은 이미지들을 통해서도 전개되었다. 독립 투쟁 과정에서 인도를 대변하는 이미지는 여신인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의 독립투사의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지금 인도의 이미지는 고귀한 어머니 여신의 이미지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혁명가의 이미지도 아니다. 지금 인도의 이미지는 오바마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수십만 달러짜리 옷을 입고 신자유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꿈으로 활짝 웃고 있는 모디 수상이다.

2. 독립인도의 꿈

2-1. 독립 인도의 꿈. 어머니 인도


  어머니 인도(Bharat Mata). 작가 아바니드라스 타고르(Abanindranath Tagore, 1905)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 타고르의 조카다.

1873년 Kiran Chandra Bannerjee에 의해, 어머니 인도(Bhārat Mātā)가 처음 시연되었다. 1882년 인도 근대소설의 선구자인 반킴 찬드라 차터지의 소설인 축복의 건물(Ananda math)에서 첫 부분인 ‘오 어머니 당신을 찬양합니다(Vande Mātaram)’는 인도 독립 운동의 송가가 되었다. 18세기 산야시 반란(Sannyasi Rebellion) -산야시(힌두 수도자)과 파키르(이슬람 수도자)의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을 다룬 이 소설은 영국에 의해 금지되었고 독립 이후에야 해금되었다. 반킴은 무슬림 또한 적으로 규정하여 반란의 한 주체였던 무슬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극우 힌두 민족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인도 독립운동의 송가인 ‘오 어머니 당신을 찬양합니다’는 영국제국주의와 싸우러 나가는 전사들의 조국 인도에 대한 찬가였다. 반킴 찬드라 차터지의 소설을 영화화한 헤멘 굽타(Hemem Gupta) 감독의 ‘축복의 건물’에 삽입된 ‘오 어머니 당신을 찬양합니다’를 같이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iGWqGtPFbDQ

2-2. 독립인도의 꿈 - 바가바드기타

  의심하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어 믿음을 주는 크리슈나

'마하바라타'의 주제가 되고 있는 바라타족의 전쟁은 쿠루국(國)의 100인의 왕자와 판두왕의 다섯 왕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종형제였지만 마침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아르주나는 골육상쟁의 전율할 운명을 괴로워하며 전차 몰이꾼인 크리슈나(실은 최고신 비슈누의 화신)를 향하여 고뇌를 호소한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이 전쟁은 정의(正義)의 싸움이다. 정의의 싸움에 투신하는 것은 무사가 본래 바라는 바이다. 전투를 피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의 본무(本務)를 실행한다는 것이 주요문제이지, 일의 성패는 문제 삼지 않는다. 당신이 전심(專心)해야 할 점은 오직 행동이지 결코 결과가 아니다. 행동의 결과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 바가바드기타, 위키피디아.
그러므로 바라타의 후예여 싸워라. (BG 2:18)
그러므로 무지를 떨치고 마음속의 의심을, 자아를 아는 지혜의 칼로 자르고 요가에 의지하여 싸워라. (BG 4:42)
당신으로부터 은총을 입어 의심은 사라지고 기억을 가지게 된 후이므로 오! 불변하는 이여! 나는 확고히 서 있으며 의심은 없어졌으니, 이제 당신의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BG 18:73)


힌두민족주의를 걸고 인도 독립투쟁에서 무장투쟁의 길을 걷고자 했던 틸락(Tilak)은 바가바드기타에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의 근거를 찾았다. 간디는 바가바드기타에서 이 전쟁을 마음속에서 전쟁으로 해석하여 1)틸락이 활용했던 바가바드기타의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2)틸락과 선을 긋는 비폭력 노선으로 해석하는데 성공했다.

2-3. 독립인도의 꿈 - 비베카난다의 힌두 종교개혁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2 January 1863 – 4 July 1902). 그의 뒤로 우주의 모든 활동을 상징하는 ‘옴’자가 보인다.

2-3-1 힌두 종교개혁

(1) 기존 썩어빠진 종교들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
“가장 완벽한 종교는 베다 종교다. 베다 경전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필수적인 것과 조건부가 있다. 필수적인 것들은 영원히 우리를 묶을 것이며 힌두교를 구성한다. 그러나 조건에 따른 것은 그렇지 않다. 이 것들은 현자들에 의해 시간에 따라 변하고 있으며 변해왔다.
브라만들도 과거에 소고기를 먹었고 수드라와 결혼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송아지를 죽였다. ... 비록 우리 카스트 제도가 마누 법전의 시대로부터 변했지만. ... 카스트는 사회적 조직이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진화의 결과였다. 한 때는 필요하고 유용했지만 그 목적을 다했다. ... 힌두는 더 이상 카스트 제도 지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브라만은 누구하고나 식사할 수 있다. 가장 비천한 카스트(pariah)와 식사를 해도 그의 영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가장 비천한 카스트를 접촉하는 것으로 파괴될 영성이라면 아주 하찮은 것이다. - Vivekananda, Madura Mail, January 28, 1893 Collected works vol. 9.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기근으로 죽어가는 우리의 육체를 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인도에서는 끔찍한 기근이 있는 동안 수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갔습니다. 아직도 기독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인도 전역에 교회를 세우지만 동방에서 울부짖는 악마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고통 받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타는 목마름(parched throats)으로 울부짖고 있는 것은 빵입니다. 그들은 빵을 우리에게 원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돌을 주었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종교를 주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인도에서는 성직자가 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그는 자신의 카스트를 잃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우리 가난한 인민들을 위한 도움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땅에서 기독교인들로부터 이교도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도의 절박한 요구가 아닙니다.” - Vivekananda, Collected works vol 1. p.20, RELIGION NOT THE CRYING NEED OF INDIA, 20th September, 1893. [참조] 정호영,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2)요가를 정의하여 힌두교를 실천의 종교로 개혁함
“저는 요가에 대해선 전혀 모릅니다. 인도에서 근대 국가의 형성과 민족주의의 발생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비베카난다에 대해서 알고서 여기에 왔습니다.”
“아니다. 너는 이미 요가를 하고 있고 그 때문에 여기에 왔다. 요가에는 4가지가 있다. [1] 카르마 요가(Karma Yoga) : 사회에 참여 [2] 박티 요가(Bhakti Yoga) :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요가 [3] 즈나나 요가(Jnana Yoga) : 분별심을 일으켜 자신을 다스리는 지식의 요가 [4] 라자 요가(Raja Yoga) : 삼매에 관한 정신의 요가이자 영성에 관한 요가다. 너는 사회학도로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 민족주의와 비베카난다에 대해 알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너는 카르마 요가를 하고 있다.” - 라마크리시나 미션에서의 필자과 힌두교 스와미(힌두 스님)과 나눈 대화


[1]카르마 요가 [2]박티 요가 [3]즈나나 요가가 바탕을 이룬 이후에 궁극의 라자 요가를 하게 된다. 영성은 [1][2][3]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라자 요가는 오래 살기 위해서 하는 요가가 아니다. 인도독립운동을 하던 모든 투사들은 비베카난다를 따랐다. 영성이란 무엇인가를 설법한 근대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요기인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39세에 (아마도 과로가 원인으로 짐작되는) 병으로 죽었다.

2-3-2. 꼬뮤날리즘을 극복할 이념의 제공 - 모든 진리는 하나이다
위대한 요기인 비베카난다가 그의 스승인 라마크리시나의 ‘신은 오직 하나이며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라는 사상을 체계화함으로써 ‘상상의 공동체, 가상의 인도’를 조국으로 하는 인도 민족주의의 씨앗은 뿌려졌다.

2-4. 독립 인도의 꿈 - 칼리파트 운동(범이슬람운동) + 비협력운동 = 상상의 인도

  칼리파트 운동의 무슬림 지도자 알리 형제. 무슬림들 또한 근대화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복장이다.

간디의 위대함은 그의 비폭력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전 인민들이 500개의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서 ‘상상의 인도’를 상상하도록 만든데 있다. 터키에서 칼리프가 폐위될 위기가 있을 때 이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무슬림의 칼리파트 운동과 힌두 민족주의를 하나로 묶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전술적으로 시민불복종 운동과 결합시켰다. 그러나 그는 차우리 차우라에서 경찰의 공격이 원인이 된 차우리 차우라 폭동이 일어나고, 불가촉천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이 운동을 중단시켰다. 알리 형제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간디는 무슬림들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나 해명도 하지 않아 무슬림들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간디의 이러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가상 인도’는 이미 전 인도 인민의 가슴에 자리를 잡은 후였다. 칼리파트 운동의 실패는 후에 파키스탄 분리 독립의 전조가 되었다. 독립 이후 파키스탄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도 민족주의 내에서 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무슬림들이 꿈꾸던 가상의 인도’는 사라졌고 ‘인도’의 이슬람 문화는 역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지워져갔다. 한 예로 인도의 대표적인 악기인 시타와 따블라는 무슬림들이 만든 악기였지만 이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2-5. 독립 인도의 꿈 -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의 아버지 암베드카르와 그가 불교에서 가져온 인도 국가의 상징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불가촉천민 운동을 조직하면서 간디와 날 선 대립을 평생 해왔다.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카스트 제도 교리에 없는 불교로 집단개종을 했다. 그는 인도 헌법의 초안자로서 헌법에 카스트 제도 철폐를 새겨 넣었다.

“죽은 이후를 다루는 종교가 무슨 소용인가? 삶 그 자체의 질은 어쩌란 말인가? 이 세상에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고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만이 죽음 이후의 삶을 성찰하면서 살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음식과 물과 보금자리 같은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생존의 존엄성마저 박탈해버린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암베드카르

21세기에도 여전히 불가촉천민은 남아 있는데 당시에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어떠했겠는가?
[참조 영상] I’m dalit, How are you? - https://www.youtube.com/watch?v=WBxy1R0jitM

2-6. 독립 인도의 꿈 - 마하트마 간디

  간디의 변신. 영국에서 교육 받은 식민지 지식인에서 인도 평민의 이미지로. 그는 20세기 열리게 될 이미지 정치의 선구자였다.

2-6-1. 인도토착자본의 수호자

간디의 스와데시가 있기 100여 년 전 인도 면 방직공들은 이미 사라졌다. 100년 전에도 인도인들의 절대다수는 매뉴팩처 장인들의 상품을 구매했지 집에서 물레를 돌리지 않았다. 영국의 면 제품이 매뉴팩처 장인들의 상품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인도면방직공들은 아사했다. 인도 총독은 1834~1835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 재난이야말로 무역사(貿易史)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면 방직공들의 해골이 인도의 벌판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 재인용. 칼 맑스, 김수행 번역(2006), 자본론 1권 하, 비봉, p.579

인도 토착자본에 의한 면 방직업이 등장하면서 간디는 물레를 둘리기 시작했다. 간디의 물레는 외제 제품을 불태우고 토착자본가들의 면 방직공장에서 나온 제품을 구매하라는 의미였다. 집에서 물레로 옷을 짜 입을 것을 간디가 권고하기 위해 물레를 돌리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고 순진하게 생각 말자.

“당신 마을에서 외제 제품을 불태우게 되면 첫 번째 화형식이 될 겁니다. 그 재는 거룩합니다. 어머니 조국이여! 어머니 조국이여! ... 그들은 가난해요. 외제가 더 싸고 품질도 좋아 인도 상품들보다 낫죠.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외제를 사는 이유이죠. 내게 가난한 이들이 외제를 못 사도록 강제할 것을 기대하나요? 스와데시는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 타고르, <집과 세상>

인도 민중들의 희생을 딛고 인도 토착자본은 영국제품들과의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스와데시 운동이다. 인도의 토착자본가들이 지원하는 국민회의는 이 스와데시 운동을 통해 같이 성장해나갔다. 스와데시 운동에 대한 평가는 간디-타고르의 근대화, 국가 건설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에 있는 문제 중 하나이다.

  집과 세상(The home and world). Tagore의 1916년 소설을 영화한 사티아지트 레이의 1984년 동명의 영화에서 스와데시 운동을 이끌고 있는 비열한 민족주의자.

2-6-2. 위대한 마하트마 간디의 한계

“마하트마 간디는 위대하다. 우리가 인도의 해방을 위해 그가 주장하는 방법들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표현했더라도 그를 경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에 비협력 운동으로 가져온 거대한 각성에 대해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배은망덕한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마하트마는 불가능한 전망이다. - 바가트 싱, PMS 그레왈, 정호영 번역, <인도 독립의 불꽃, 바가트 싱>

2-7. 독립인도의 꿈 – 바가트 싱

2-7-1. 아나키스트에서 맑시스트로 - 혁명 만세


  Bhagat Singh(1929) – 처형 직전의 모습

바가트 싱은 암리차르 학살에서 영국의 무자비함을 목격한 후 인도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간디의 스와데시 운동으로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나키스트/테러리즘을 경과한 후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로 생을 마쳤다. 1928년 21살의 싱은 경찰에 살해된 노(老)독립운동가 랄라 라지파트 라이의 복수를 위해 총으로 경찰서장을 죽이려다 부서장을 살해했다. 싱은 곧 테러의 한계를 깨달았다. 싱은 1929년 4월 8일 영국의 잇따른 악법 제정에 항의하려고 의회에 가짜 폭탄을 터뜨리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고의로 체포됐다. 싱은 재판을 대중 선동의 장으로 만들어 인도 민중의 가슴에 간디류의 구걸하는 독립운동 대신 혁명적 독립투쟁의 불을 당겼다. 결국 싱은 감옥에서 죽었다. 당시 영국 정부 공식보고서는 “싱은 인도 정치인 중 가장 선두에 있는 간디의 명성을 누를 것 같다”고 기록했다.

싱의 죽음 이후 인도독립운동은 영국에 타협적이던 간디와 노인 정치가들이 지도하는 국민회의 노선을 벗어난 급진 젊은 세대가 전면에 등장했다. 싱이 목숨 바쳐 원했던 독립국가는 종교분쟁도, 카스트도 없는 평등한 사회였다. 힌두 우익인 간디가 전 생애에 걸쳐 꿈꾸던 카스트가 견고히 뿌리내린,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2-7-2. 꼬뮤날리즘을 넘어 완전한 세속주의로

  1927년 감옥에서 터번을 벗은 혁명가 바가트 싱이 터번을 쓴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만났다.

바가트 싱은 시크교도로 태어났지만 인도 내 종교로 인한 내부 분쟁에 반대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법정에서 시크교도라면 절대로 벗지 않는 것이 교리인 시크교의 상징인 터번을 벗고 산발한 머리로 법정에 섰다. 당시 산발한 머리로 법정에 선 그의 외모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록스타의 면모처럼 보이지만 당시 인도에 있어서는 시크교도가 터번을 벗고 법정에 선 모습은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 [참조] PMS 그레왈, 정호영 번역, <인도독립의 불꽃>

카스트 제도가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던 간디와는 다르게 진정한 세속주의 국가를 만들기 원했던 인도의 혁명가 바가트 싱이 활동했던 혁명가 조직이었던 사바는 종교커뮤니티/종족 간의 갈등을 없애는 방법을 과감하게 보여주었다. 인도의 저명한 역사학자 S. 이르판 하밥(S. Irfan. Habib)은 바가트 싱의 전기에서 이에 대해서 언급했다.

“바가트 싱이 속해 있던 사바는 당시의 모든 종교적인 정치를 넘어서서 세속주의로 서 있었다. 가입 전에 모든 회원들은 모든 꼬뮤니티를 넘어서서 조국의 이해에만 바치겠다는 서약에 서명을 해야 했다. 저명한 인도 과격파 민족주의의 기둥이었던 랄라 라지파트 라이가 그가 힌두 마하사바(Hindu Mahasabha 당시의 힌두극우민족정당. BJP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와 손을 잡았을 때 사바의 혹평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사바는 건강한 세속 민족주의 감정을 청년들 사이에 고취시키기 위하여 자주 저녁식사 모임을 가졌다. 모든 카스트와 신앙이 다른 이들이 초대되었고 각자 서로를 대접하였다. 한 예로 열정적인 젊은이들은 하랄(halal. 예배를 위해 만든 이슬람 음식)과 자트카 고기(jhatka 시크식 도살로 잡은 고기. 유대나 힌두의 고기는 목을 따는 도살을 하지만 시크는 머리를 잘라 버린다)를 한 솥에서 요리해서(이들은 꼬뮤니티마다 꺼려하거나 금기로 여기는 것이었다) 참석한 모든 힌두와 무슬림과 시크가 같이 먹었다. 이렇게 교조적인 종파주의 감정을 제거하는 목표로 나우자완 바라트 사바의 성원들은 역시 대중 강연을 하고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토론하였다. 국민회의와는 다르게 다양한 종교적 믿음이나 ‘알라는 위대하다’(Alla-o Akbar, 이슬람), ‘모두 깨달아서 브라마의 일부가 되자’(Jo Bole So Nihaal, sat Sri Akali, 시크), ‘어머니에게 경의를 보냅니다’(Bande Mataram, 힌두) 같은 구호들을 끌어 모아서 세속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시위의 도구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2가지 구호인 ‘혁명 만세’(Inquilab Zindabad)와 ‘인도 만세’(Hindustan Zindabad)를 내걸고 전국에서 혁명을 불렀다.” - S. Irfan Habib(2007), To make the deaf hear, Three essays collective

3. 인도의 독립

인도가 비폭력 운동으로 독립했다는 주장은 인도 독립에 목숨을 바친 절대 다수의 꿈들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시도다.

  942: A Love Story directed by Vidhu Vinod Chopra(1984) - 인도 독립 직전의 폭동을 담았다. 영국 주둔 관청을 불태우고 영국 총독을 공격하는 인도의 독립투사.

  인도의 ‘광복군’ 지도자인 Netaji Bose가 INA(Indian national Army)의 여군 사열을 지나가고 있다. 그는 일본과 협력하여 인도인들로 군대를 만들서 영국령 인도로 진군해갔었다.

인도의 독립이 간디의 비폭력 투쟁 때문이 아니라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인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영국의 공식기록에도 남아 있다.

“6백만 명의 말레이에 대해서는 영국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군대를 파병했고 민중의 자유 운동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가장 잔혹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4억 명의 인도에 대해서는 대중 반란이 무장으로 발전하자 철수하고 국민운동의 상층부와 타협하여 최선의 성과를 얻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와 같이 마운트바턴(Mountbattern, 인도의 마지막 총독)의 책임자였던 이스메이 경(Lord Ismay)은 철수의 필요성에 대해 그의 판단을 (다음과 같이-필자) 내렸다. 1947년 3월의 인도는 바다 가운데에서 폭약과 함께 있는 배와 같았다. 폭약에 닿기 전에 불을 끄느냐의 문제였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우리가 한 일(인도의 독립-필자)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R. P. Dutt 재인용, 정호영, 간디 중심의 국민회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EMS 남부디리파드 <간디 불편한 진실>

인도의 독립이 간디의 비폭력 투쟁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은 인도 내에서 10만 권 이상이 팔린 인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비판 찬드라(Bipan Chandra)의 가장 대중적인 저술인 ‘독립을 위한 인도의 투쟁(India's Struggle for Independence)’에서도 공식적으로 서술된 부분이다. 비판 찬드라는 국민회의의 입장에서 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가트 싱이 주장한대로 간디의 비폭력투쟁의 의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지만, 인도 독립투쟁이 비폭력투쟁으로 영국이 자진해서 물러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독립인도의 꿈을 위해 죽어간 절대다수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4. 좌절된 꿈

무슬림–힌두 간의 대량 상호 학살을 거쳐서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 이후, 네루는 세속주의를 표방하면서 인도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려고 했었다. 인도의 헌법은 바이마르 헌법을 토대로 한 의회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연방국가였다. 인디라 간디 정권 들어서면서 이 세속주의는 힌두 꼬뮤날리즘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인도 독립 후 인도의 정치는 힌두 꼬뮤날리즘을 민족주의의 내용으로 채우는 과정에서 숱한 종교 갈등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고 전개되어왔다. 민족주의의 내용을 힌두 꼬뮤날리즘으로 채워서 성장해온 현재의 인도 집권정당인 BJP는 이제 민족주의의 내용을 힌두 꼬뮤날리즘이 아니라 ‘부강한 인도’를 약속하는 발전 담론으로 바꾸어서 채우고 있다.

4-1. 좌절된 꿈 - 어머니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여신으로의 변신

  힌두 꼬뮤날리즘의 대두 이후 변화된 어머니 인도의 이미지. 사자는 인도를 상징한다.

간디는 인도 내 종교간 화합을 위해 생의 마지막을 불태웠고 힌두 극우 민족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 종교간 화합을 유지하고자 했던 간디의 말년의 정치 활동은 ‘상상의 인도’를 인도 민중의 가슴에 심은 간디의 초년의 정치 활동과 함께 간디의 위대한 점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누구도 라마의 통치가 힌두의 통치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나의 라마는 이슬람의 신(khuda, 페르시아어로 유일신), 또는 기독교의 신(god)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슬람 신의 통치를 원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지상에 있는 신의 왕국과 같은 것이다.” ‐ 마하트마 간디, 1947년 2월 26일

BJP의 아드바니는 인도-파키스탄 분단이 일어나던 시기, 간디의 암살 직후에 RSS의 당시 수장이었던 M.S . 골워커(M.S. Golwalkar)에게 세속주의가 무엇인가를 질문했었다. 그가 구루에게 들은 세속주의에 대한 답변은 인도는 힌두가 지배적인 국가이기에 힌두 국가라는 것이었다. 간디의 암살 직후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국민회의이다.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인 극우정치집단들을 법적으로 금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도 독립투쟁의 어머니 인도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등장했지만 반무슬림 운동의 상징으로 어머니 여신의 이미지는 바뀌었다.

4-2. 좌절된 꿈 - 힌두 꼬뮤날리즘

4-2-1 국민회의의 세속주의에서 힌두 꼬뮤날리즘으로의 변화


  1984년 시크교 대학살

파키스탄 독립시 무슬림-힌두 간 대량 상호학살을 경과한 후 독립인도의 권력을 잡은 국민회의로서는 종교와 정치의 선을 긋는 세속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으로 무슬림들이 이주해갔더라도 인도 땅 인구의 1/4은 무슬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라마야나 [출처: imagine]

이 세속주의 정치가 무너지게 된 것은 인디라 간디 정권 때부터였다. 인드라 간디 수상은 1980년 시크교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황금 사원 앞에서 독립 운동을 하자 탱크까지 동원해 독립 운동을 진압하였고 이로 인해 600명이 사망했다. 1984년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고 경찰이 갱들을 지원하여 시크교도 수천 명이 학살되고 강간당하는 대학살이 일어난다.

세속주의를 강조하던 국민회의는 국영TV에서 드라마 라마야나 시리즈 방영을 시작하면서 힌두 꼬뮤날리즘을 고조시키고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드라마 라마야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연속극이다.

4-2-2. BJP의 힌두 꼬뮤날리즘

  크리슈나가 마차를 몰고 아르주나와 함께 진군하고 있다.

  아드바니가 크리슈나의 마차의 이미지로 꾸민 차량을 몰고 아요디야로 행진하고 있다.

인도인민당(BJP)은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바탕으로 한 힌두 꼬뮤날리즘으로 성장하였다. 라마가 통치했다는 아요디야를 허물고 무슬림들이 바브리 모스크를 지었다는 선동을 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러나 BJP의 이전총리 후보였던 아드바니는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마차를 연상시키도록 차량을 개조하여 아요디야 사원을 파괴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힌두들은 순식간에 이슬람 사원을 완전 파괴하고 라마 신상을 모신 천막 주변에 담 축조 공사를 하였다. 파괴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고 그 후로도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 동안 집을 잃은 사람이 수십만 명이고 재산 손실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4-3. 좌절된 꿈 - 토지개혁을 막은 가짜 선지자 비노바 바베

  비노바 바베와 부단 운동 지지자들의 행진. 필자에게는 인도 장구를 치면서 바베가 행진을 이끌면서 외치는 구호가 ‘얼쑤, 부단 운동 실시하여 지주 집안 천년만년 지켜주세’, ‘합법적인 토지개혁, 부단 운동으로 가로막아 불법적인 낙살라이트 봉기 이끄세’로 들린다.

토지 개혁에 대한 반대는 ‘간디의 도덕성’이 아니라 ‘간디주의’가 주도하고 있다. 간디 이후의 최고의 간디주의자로 칭송을 받는 비노바 바베가 주도했던 부단 운동(부단의 의미는 ‘선물로 받은 땅’)은 토지 개혁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지주가 간디의 도덕성에 감화받아 소작인에게 토지를 선물로 주는 이 운동의 한계는 지주가 선물로 자신의 소유에서 6분의 1만 주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으로 칭송받고 있는 비노바 바베의 부단 운동을 인도의 모든 지주들이 다 따른다고 해도 토지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인도의 현실은? 부단 운동으로 분배된 토지의 대다수는 황무지거나 개간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땅들이었고 이 황무지와 개간이 불가능한 땅을 분배(?)한 지주들은 간디주의자로 이름을 드높였다. 그리고 부단 운동으로 분배된 이런 땅들조차도 실제적으로는 분배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참조] 정호영, 현재 인도에서의 부단운동, EMS 남부디리파드, 정호영 번역,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비노바 바베를 찬양했던 수많은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자칭 진보들은 여기에 대해서 자기비판, 반성하는 글을 내야 한다.

4-4. 좌절된 꿈 - 낙살라이트 봉기

  낙살라이트 봉기 지도자, 차루 마줌다르(1918~1972)

1967년은 인도 공산주의 역사의 분기점이다. 그해에 인도 공산당-마르크시스트(CPI-M) 소속인 남부디리파드는 케랄라에서 선거를 통해 평화적 재집권에 성공함으로써 인도 공산당이 제도 안에 정착하는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서벵갈의 낙살바리 지역에서는 2만 명의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농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농민위원회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땅 없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현재 인도 전체의 40%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낙살라이트는 이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봉기의 지도자가 차루 마줌다르. 인도는 이제 신흥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지만 3세 미만의 어린이 절반이 영양실조일 정도로 하층 민중들의 삶은 아프리카보다 더 참혹한 상태에 있다. 이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한 낙살라이트 운동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것은 미국 정부의 보고서에서도 나왔다.

5. 인도 민족주의의 현재 - 힌두 꼬뮤날리즘에서 모디의 발전 담론으로 진화

  2015년 인도 독립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모디 총리. 출처. Narendramodi.in

  제조업 중심의 인도 경제 도약을 상징하는 구호인 make in India를 상징화한 사자. 출처. Narendramodi.in

지난 총선에서의 BJP의 압승은 힌두 종파주의가 아닌 발전담론을 내용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BJP가 자신들의 표밭인 힌두 벨트를 벗어난 지역에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힌두 종파주의의 색채를 씻어내고 민족주의자로의 변신에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2009년 선거에서 BJP는 116석을 획득했고 2004년 138석보다 후퇴하였다. 선거 패배에 대한 분석에서 총리 후보로 나왔던 아드바니의 힌두 근본주의 강성 이미지가 가장 문제였다는 결론이 나왔다. BJP는 자신들의 힌두 민족주의를 민족주의로 진화시키기로 전략을 바꾸고 프론트맨도 아드바니에서 모디로 교체했다 이런 변화된 정세 속에서 종파주의 정치를 민족주의 정치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기존 종파주의 정치에서 무슬림의 이미지는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의 이미지이다. 악바르 때 폐지시켰던 힌두에게 부과했던 인두세를 부활시키고 강제 개종을 시켰으며 힌두 사원을 허물고 그 위에 모스크를 짓던 침략자의 이미지였다. 아요디야의 참사 또한 라마 신의 사원을 부수고 무굴의 1대 황제 바부르가 모스크를 세웠기에 라마 신의 사원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BJP는 무슬림의 이미지를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의 이미지로 설정했고 BJP의 이미지는 침략자에 대해서 싸우는 마라타족의 영웅 쉬바지의 이미지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지금 민족주의 정당을 자처하는 BJP는 기존 아우랑제브와 싸우는 쉬바지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새로 확보한 영토에서 무슬림에게도 포용적이었던 쉬바지의 새로운 이미지를 더하고 있다. BJP의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이미지도 변화를 시켰다.

아우랑제브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무슬림들은 반국민적 무슬림이라고 칭하고 여전히 단호하게 싸우겠지만 인도에 충성하는 무슬림은 섬멸 대상이 아니라 인도 땅에서 같이 살아가는 인도인일 뿐이라면서 무슬림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인도 땅에서 살아가는 애국적인 무슬림이란 어떤 이미지일까? 방대한 나라 인도는 BJP의 민족주의 진화를 위한 이야기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힌두 신화인 라마야나는 300가지 이상의 버전이 있다. 께랄라에서 오래전부터 배를 만들던 카스트인 모필라들 사이에 떠도는 이슬람식 라마 이야기도 있다. ‘술탄 람’이 열대 기후인 인도 남부의 이슬람 지역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타밀에는 라마야나를 모델로 한 “예언자의 일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라마야나는 모든 종교가 함께 인용할 수 있는 공통의 뿌리가 된 것이다. ... 이를 인도 대법원의 저명한 판사이자 이슬람교도인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라 전체가 람잔마부미, 즉 라마의 고국이다. 하지만 람잔마스탄, 즉 출생지는 수백 년 동안 슈리 라마를 마리아다 푸르쇼트람, 즉 곧음, 성실성, 품위, 순수한 인간상의 이상으로 삼아 사랑하고 존경하고 숭배해 온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인도에서 살아가는 무슬림이 애국적인 무슬림이다.”- 마이클 우드 지음, 김승욱 옮김(2009) <인도 이야기 : 한 권으로 읽는 인도의 모든 것> 웅진지식하우스. PP. 290-291

힌두 꼬뮤날리즘에서 민족주의로 진화한 BJP의 공격 대상은 이제 무슬림이 아니라 “발전 반대 세력”이다. 델리 선거 기간 내내 모디와 BJP는 AAP의 케지리왈을 ‘낙살라이트’, ‘아나키스트’로 불렀고 그가 밀림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지금 토지 법안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발전 반대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힌두 꼬뮤날리즘은 힌두 벨트 지역에서는 모디의 집권 이후 더 기세 등등해졌다. 그러나 이를 BJP가 여전히 힌두 꼬뮤날리즘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BJP는 지난 델리 선거 패배 이후, BJP의 한 지도자는 “어차피 무슬림들은 우리들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문제는 중도 힌두들이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도 좌파정당들의 자신들의 대안적인 정책이 없이 BJP를 힌두 꼬뮤날리즘 정당으로 비판만 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지금 인도의 이미지는 오바마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수십만 달러짜리 옷을 입고 신자유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꿈으로 활짝 웃고 있는 모디 수상이다. 오늘 토론을 바탕으로 2주 후 인도 모디 정권을 분석해볼 것이다.

* 참고자료
E. M. S. 남부디리파드 (지은이) , 정호영 (옮긴이),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 비폭력 성자와 체제 옹호자의 두 얼굴, 한스컨텐츠(Hantz), 2011년 8월,원제 The Mahatam and the Ism.
정호영,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 우리가 상상하는 인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스컨텐츠(Hantz), 2011년 1월.
P. M. S. 그레왈 (지은이), 정호영 (옮긴이) | 바가트 싱 - 인도 독립의 불꽃, 한스컨텐츠(Hantz), 2012년 6월, 원제 Blazing Star.
정호영, 진짜 불편한 진실...이명박과 간디는 닮았다, 프레시안 2011.10.7.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903
정호영, ‘케랄라 모델 창안자’ E.M.S. 남부디리파드, 경향신문 2012.9.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022134345&code=960201&s_code=ac150
정호영, 인도 최하층민 사로잡은 차루 마줌다르, 경향신문 2012.9.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092128395&code=960201&s_code=ac150
김기협,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헌터 위원회는 어떻게 학살의 진실을 밝혔나, 프레시안 2014.9.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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