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알 수 있나

[기획특집]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2)

내가 약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이 독이라면? 내딛는 다음 걸음이 단단한 땅 위가 아니라 절벽 아래로 나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면?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여주는 연인의 목소리가 사무친 외로움이 불러온 환청이라면? 이 정도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극단적 가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야 할 버스 번호를 잘못 봐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하고 답지의 번호를 잘못 봐서 시험을 망쳤다는 자식들의 말도 기꺼이 믿어주는데 이런 일이라고 없겠는가? 우리는 오감으로 인식한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상의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근대의 철학이나 현대의 인지심리학은 우리 인식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믿기 힘든 것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회에는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소박한 가지론(可知論)

서양 근대 철학은 세상을 온전히 다 알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 밖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반성하며 인식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를 따져 보았다. 일상을 지배하는 소박한 가지론은 인식의 확실성을 점검하려는 철학적 반성 앞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오감을 사용한 모든 지각은 물론 수학적 계산 같은 순수 추론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의심 받았다. 게다가 소박한 가지론은 인식론적 한계 외에도 윤리적, 정치적 결함으로 이어진다고 비판받아 왔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 소박한 가지론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그 배후의 원인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을 오감과 이성적 추론으로 속속들이 알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도 보편적 법칙에 의지해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모든 주장은 논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2. 소박한 가지론은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의 보편성을 과장한다. 그래서 한 영역에서 적용되는 법칙을 성격이 다른 영역에까지 적용하려 한다. 근대에 급성장한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자연물 그것도 생명이 없는 사물에 적용되는 물리법칙으로 생명 있는 것들과 인간 사회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정치, 문화, 종교, 도덕 같은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경제로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3. 소박한 가지론은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어떤 예외와 변경도 허용되지 않는 필연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철의 법칙”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심지어 인간의 사고나 행동도 이 법칙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환경결정론, 생물학적 결정론, 경제결정론 등등의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실천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로 자유롭게 법칙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자유로운 지옥이 차라리 낫다?

이 유치하고 단순한 사고의 전형이라고 비난 받아온 사상이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주의는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영혼과 정신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해서 경제적 동물, 기계의 부속처럼 인간을 취급하며 독단적 주장에 대중들이 순종하도록 통제하는 독재체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은 전체주의라는 개념에 의해 더 강화되었다. 문제의 원인을 온전히 혹은 대체로라도 알 수 없고 특히 문제에 대한 해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제안과 실험은 세상을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해법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보는 독단적 태도는 인간에게 자신의 삶과 세상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히틀러에서 크메르 루즈까지 20세기를 다룬 역사책은 그런 사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이런 두려움은 자본주의의 무질서함이 낳은 불평등, 인간소외, 경쟁의 격화 그리고 무엇보다 대공황과 세계대전까지 겪었으면서도 방종한 자본주의의 고삐를 제어하려는 즉 시장에 개입하려는 인위적 시도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소박한 가지론은 인류를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그래서 자유로운 지옥인 자본주의가 차라리 낫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오랜 논리였다.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하이에크 철학의 핵심도 불가지론이다. 그의 불가지론은 계획경제를 겨냥했다. 경제에서의 계획은 수요와 공급, 생산과 분배의 메커니즘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시장주의자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알 수 없기에 시장이 최선이고 오히려 국가나 사회가 개입하기 때문에 시장실패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것도 허용되어서는 인된다.

세상을 점점 더 잘 알 수 있지만 최종 진리에 도달하진 않아

이런 비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는 세 가지 질문을 되물음으로써 대응한다. 1. 마르크스주의는 진짜 소박한 가지론, 환원론, 결정론인가? 2. 불가지론은 도덕과 정신과 인간 삶의 다양성을 보장해 주고 무엇보다 인간을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 수 있게 해주는가? 3. 가지론과 불가지론 둘 중 하나 혹은 그 사이의 적당한 절충지점을 선택하는 것만이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접근 방법이고 다른 대안은 없는가?

먼저 1번 질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단순하고 소박한 인식론을 주장한 적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당연히 전제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바로 혹은 단시일 내에 세상의 모든 다양한 일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고 미래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는 세상에 대해 점점 더 잘 알 수 있지만 최종적 진리에 도달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세계는 본질상 운동이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운동만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대상은 대상에 대한 인식과 다른 존재가 된다. 인식은 대상의 실제 모습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 인식은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 물론 동일성도 잠정적으로 유지되므로 대상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지만 수 십 년 만에 나를 만나는 옛 연인이 나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 인간의 인식이 발전하는 과정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식을 확장시켜나가는 진보적 과정은 개인 차원보다는 집단이나 심지어 인류사적 과정일 수 있다. 단기간에 상당한 수준으로 세상의 비밀을 알아 낼 수 있는 지점에 쉽게 도달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완전한 진리를 향해 가까이는 가지만 최종적으로 도달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함으로써 인식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독단론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불가지론이 자유를 보장하진 않는다

2번 질문.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라고 불렀던 사고 실험을 거의 예외 없이 수행했다. 즉 우리의 인식을 근본에 이르기까지 의심해 보았다. 지금 내가 회의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의심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이런 의심을 반박할 수 없다. 그런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철저한 회의는 모두 사고상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급성장한 과학과 기술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이용하기 위해 인식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점검하려 했던 것이었지 실제 우리 인식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 자연과학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일어난 소위 과학혁명은 뉴튼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자연과학의 법칙이 그렇게 보편적이지도 절대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반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과학혁명은 결국 과학의 세상에 대한 설명력을 높이는 긴 과정의 일부였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사례들을 과학과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삶의 불확실성을 지적하기위해 사용해왔다. 또 어떤 이들은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자연에만 한정시키고 인간의 삶, 사회, 역사는 과학적 인식 너머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적 영역에 대한 일체의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 인간은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인식의 방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바꾸는 데 성공해왔다. 사회과학의 실패는 그것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해서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비이성적 정념이나 이해관계가 과학적 인식의 결과를 무시하거나 왜곡시켰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을 독단론, 환원론, 결정론으로 바로 연결시키는 것과 불가지론이 자유를 보장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둘 다 논리적 비약이다. 세상에 관철되는 법칙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법칙이 한계가 있지만 어느 정도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의 결과로 향상된 영양상태, 신생아들이 백일이나 돌을 맞이하는 것도 경사로 여기게 만들었던 높은 유아사망률을 떨어뜨린 보건의료체계, 계획적으로 고안된 교육제도, 인쇄술 따위는 낡은 기술로 만들어 버린 다양한 매체 기술의 발달 등은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의도적 개입의 효과를 부정하고 의지와 정신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은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 덕분에 교육받은 성인으로 성장해 교육제도를 통해 습득한 자신들의 철학을 대중매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들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법칙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행위의 자유는 어떤 법칙에도 지배되지 않아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의 작용 방식에 대한, 법칙들이 관철되는 조건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서만 가능하고 확대될 수 있다. 날고 싶은 욕구와 내가 새라는 정신병적 환각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작용원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중력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중력을 이용해 인류를 지구 중심으로부터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회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향적 법칙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즉 근대 물리학의 법칙처럼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인 경향과 추세를 의미한다. 사회 즉 인간과 인간, 인간과 외부환경의 관계는 상호작용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인 한에서 즉 몸을 가지고 다른 인간과 더불어 자연 속에 사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주체적이다. 인간 주체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은 모두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존재에게도 변화를 일으킨다. 이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이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고 서로 주고 받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상호작용이라는 말의 의미다. 이런 주체와 주체,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법칙은 확정적이고 고정된 철의 법칙일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자유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법칙의 적용도 받는다. 능동성, 자율성, 주체성을 진공상태처럼 어떤 객관적 조건과의 관계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 환상이다. 대체적인 방향은 존재하지만 수많은 변수를 동시에 가진다는 의미에서 사회과학이 다루는 법칙은 경향적으로만 관철된다.

세상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인식이 일어나는 조건 변화시켜야

3번 문제에 대한 대답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독특하게 만들어준다. 마르크스주의는 가지론과 불가지론의 양자택일이라는 문제틀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인식이 확장되고 그 인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인식을 가로막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상호 관련을 맺는 구체적 과정, 조건 안에서만 일어나지 무조건적인 순수한 인식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순수한 인식이라는 이상이 바로 모든 것을 아는 신의 인식이다. 신은 시간적 공간적 조건 심지어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조건에도 제약받지 않고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제한된 인식만을 한다. 그 제한 조건이 없다면 인간의 인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인 인식은 하나의 인식 이외의 다른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 위에서만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아래에서 아래를 보거나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빛에 의해 사물은 다른 모습, 다른 색으로 보일 수 있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 흰 옷을 보면 흰색이 아니라 노란색의 옷으로 보인다. 어느 회사의 사장이 여성노동자를 성추행했다고 가정해 보자. 분하고 억울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노동자는 계급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이 이윤 착취에 수반되는 계급적 불평등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즉 사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틀 안에만 있으면 그 사건이 가지는 가부장적 위계와 남성 중심적 성문화라는 성격은 보이지 않는다. 인식의 조건은 동시에 다른 인식을 가로막는 제약의 조건이다. 계급과 가부장제라는 인식의 틀이 가지는 인식가능과 불가능의 조건을 안다면 두 측면 모두를 볼 수 있게 인식이 확장될 수 있다. 문제틀, 패러다임, 프레임 등 무엇이라고 부르든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과 방식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우리가 세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면서 동시에 우리 눈을 가리는지 묻는 것에서 더 넓고 깊은 인식은 시작된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우리 자신의 자연스러운 일부라고 생각했던 틀을 떼어내 낯선 것처럼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인식의 문제를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을 별개로 보고 주관이 대상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만을 다루던 방식에서 벗어나 인식 주관과 대상이 상호작용하는 방식과 조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 조건은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많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인식이 일어나는 조건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지식과 이념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장치들, 현대 사회에서는 학교, 대중매체 등을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가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식의 문제는 예술론으로 연장된다. 인식론에서 불가지론과 가지론, 인식주관의 우위와 대상의 우위가 쌍을 이루는 개념이라면 예술을 주체의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보는 관점과 객관세계의 반영이자 모사라고 보는 입장이 인식론의 이 두 입장에 대응한다. 다음 회에는 이 문제로 생각을 이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