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사, 너는 부하직원 “너도 즐겼으면서 성희롱이라고?”

[서평]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누구보다 성 평등 문화에 앞장서 왔다는 진보진영에서 갖가지 성폭력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진보진영 인사들의 데이트폭력 논란을 비롯해, 노동조합 간부들의 성폭력 문제도 끊이질 않는다. 최근 일어난 충남의 한 비정규직노조 간부의 인권단체 간사 성추행 사건과 민주노총 울산본부 간부의 성폭력 문제는 불평등한 위계관계 속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었다. 진보진영에서조차 활동 공간(직장) 안에서의 위계관계가 남녀관계 혹은 연애관계에로까지 확대돼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가해지는 성희롱은 우리 사회만의 특수한 단면이 아니다. 일본 오사카대학교대학원 인간과학연구과 교수이자 사회학자인 무타 카즈에는 불평등한 역학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일본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연구해 왔다. 그녀의 저서 <부장님, 그건 성희롱 입니다>는 직장 혹은 활동 공간 내 불평등한 위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문제를 꽤 구체적으로 분류, 정의하고 있다. ‘내가 성희롱 가해자가 될 리 없다’는 확신에 찬 남성에게, 그들에게도 언제든 성희롱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둔감함이 성희롱의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아니, 내가 성희롱 가해자라니 인정할 수 없다!”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일 가능성이 높다. 언론에 나오는 악질적 성범죄와 강제추행만을 ‘성희롱’이라고 비좁게 인식한 까닭에 자신의 실책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희롱의 범주는 무척이나 넓고, 그만큼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인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도 성희롱 발언이 튀어나오기 십상. 저자인 무타 카즈에는 굉장히 시원하게 성희롱의 범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이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성희롱, 난처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실은 성희롱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남성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같이 즐겼으면서 성희롱이라고?’ 하지만 이는 그저 남성의 자기중심적인 착각일 뿐. 분명 상대가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난처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레짐작에 불과하다. 저자는 “둔감함이 성희롱의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 책에서는 도저히 남성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희롱을 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일례로 대개 사건을 둘러싸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은 천차만별이다. 책에 제시된 사례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가해 남성 A씨의 기억. ‘평소 호감이 있던 부하직원 B씨는 그에게 자주 찾아와 조언을 듣는다.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기도 한다. 술을 마신 후, B에게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니 흔쾌히 응했다. 심지어 인적이 으슥한 공원을 가로지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어 공원에서 그녀에게 스킨쉽을 했다’ 그렇다면 피해 여성 B씨의 기억은 어떨까. ‘1년짜리 계약직이라 항상 계약 연장이 큰 고민이다. 직장 상사와도 잘 지내야 하기 때문에 노력은 하고 있지만, A씨의 친한 척이 부담스럽다. 어느 날은 술을 마신 뒤 집요하게 집에 데려다주겠노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지름길인 공원을 가로질러 빨리 집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실수였다. 공원에서 A씨는 갑자기 원치 않는 스킨쉽을 했다’ 만약 B씨가 자발적이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거절했을 경우 예상되는 업무상 불이익이 그녀에게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강제추행 같은 악질적 ‘검은’ 성희롱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가해지는 ‘회색’ 성희롱도 빈번하다. 회색지대의 성희롱일 경우,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사과하거나 주의하고 멈춘다면 사건이 일단락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처 방법에 따라 ‘회색 성희롱’은 ‘검은 성희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대개 ‘감히 내게 성희롱범이라는 죄목을 씌워?’라며 모든 것을 부인할 때 상황은 심각해진다. 특히 자신의 우월한 직책을 이용해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할 때 사건은 악질이 된다.

최근 발생한 충남의 한 비정규직노조 간부의 성희롱 사건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는 성희롱 사건이 폭로된 이후, 피해자인 상근간사를 업무에서 배제시키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했고, 피해자와 동조한 여성 직원들에게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결국 피해자는 일을 그만둬야 했다. 저자는 “아무래도 남성들이 ‘그거 성희롱 아닌가요’, ‘성희롱 하지 마세요’라는 목소리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강제 추행이나 강간 같은 악질적 행위를 제외하면 성희롱을 인정한다고 해서 바로 유죄가 되지 않지만, 과잉반응과 적반하장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간혹 도대체 이 상황이 성희롱인지, 성희롱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꽤 인정받는 직장상사 혹은 활동가에게 이따금 대시를 받고 있는 상황. 둘만 있을 때는 그가 뒤에서 껴안기도 한다. 그녀는 그가 몸을 만져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그저 남의 일처럼 내버려 두고 있다면? 책에서는 저명한 일본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 씨의 저서를 인용해 이 역시 성희롱이라고 진단한다. “이 여성은 의지할 상사를 잃을까 두려워 싫은 일을 싫다고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차단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뿌리 깊은 문제다”

“우리 연인이(었)잖아. 근데 성희롱이라고?”

“우리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성희롱이라 주장한다. 화풀이용이 분명하다. 억울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합의로 시작된 연애라는 사실만으로는 성희롱이 면책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우선 첫 번째. ‘연애관계’, ‘호감관계’라는 것이 가해자 일방의 ‘망상’이 아니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직장 선후배 사이인 A씨와 B씨. B는 상사인 A와 같이 업무를 추진하며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술자리도 종종하며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B는 항상 A의 업무 능력에 대해 칭찬하며, 잘 웃어주기도 한다. A는 B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같이 술을 마신 뒤 B에게 ‘내 방으로 와 업무스케줄 맞춰볼래?’라며 꼬셔보기로 한다. B가 자신의 방으로 순순히 따라왔다. A는 B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성관계를 갖는다. 며칠 뒤, B는 A를 성희롱으로 회사에 신고했다. A는 화가 났다. 성관계를 거부하지 않았으면서, 자기도 즐겼으면서 성희롱으로 신고하다니!’

남성 입장에서는 싫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면 될 일 아니냐며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가 이런 대처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피해자도 침대에 쓰러질 때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테다. 만약 거부한다면 직장생활에서 불이익이 따르는 것이 아닐까. 혹은 그가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 B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 신고를 결심한다. 그때 A씨는 ‘합의하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못한 주장이다. 분명 A씨는 상사의 위치를 악용해 ‘업무스케줄’ 핑계를 대며 B를 유인했다. 피해자는 단지 업무상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이지만, 가해자는 이를 ‘남녀관계’라고 멋대로 착각했다.

두 번째. 정말 합의에 의한 연애 관계, 주위에서도 ‘저 둘은 당연히 연애관계’라고 생각하는 경우. 하지만 정말 연애관계였던 경우도 성희롱 혹은 성폭력의 위험지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애의 여부는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격정적인 사랑이 너무 과한 나머지 폭력적인 섹스를 하거나 격렬한 다툼 끝에 폭력을 행사한 경우, 교제 과정에서의 원치 않는 임신 중절 등. 연애 중에는 몰랐지만 연애가 엔딩을 맞은 후, 매일 고통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저자는 “연애 중에는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나중에 그렇게 얘기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 여성에게는 그것 역시 명백한 ‘피해’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불평등한 관계의 연애가 종결된 후, 여성이 직장을 잃거나 사람 관계가 끊기거나 혹은 우울증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면 가해자의 책임이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법이다.

연애관계 당시의 성희롱 사건을 문제 삼을 경우, 피해자는 종종 2차 가해에 내몰리기도 한다. 연애 상대이자 직장상사였던 그는 바른 소리도 잘하고 추진력, 부지런함을 모두 갖춰 직장에서도 신뢰받는 사람. 그러다보니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사람이 그랬을 리 없어’, ‘파벌다툼에 휘말려 모함을 받는 거야’ 심지어 ‘여자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반응들은 가해자가 걸러낸 이야기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결국 ‘스토리’를 만들어내 2차 가해를 야기한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저자는 직장 혹은 활동 공간 내의 권력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실관계를 모르는 이상, 힘과 지위가 있는 가해자를 아군으로 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다. 자신도 이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가해자를 두둔하는 쪽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는 “세간에서 훌륭한 인격자로 보이던 사람이 성희롱을 하는 것은 드물지 않다”며 “일반 남성이라도 부하 여직원 등에게 휘두르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남성 간에 보이는 얼굴과 상당히 다른 표정을 여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여성들은 NO라고 말하지 않는 거야?”

‘비정규직 여사원 A씨의 부서회식 자리. 노래방에서 정직원인 상사 B씨가 만취해 그녀에게 듀엣을 제안한다. 음악이 흐르자 그가 A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불쾌한 느낌이다. 그녀는 진심 NO!라고 외치고 싶다. ‘이것도 성희롱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해버리면 회식 분위기는 얼어붙을게 분명하다. 비난이 쏟아지거나 건방지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분위기를 봐서 살짝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야지’ 일각에서는 여성들이 왜 NO라고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하느냐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도 분명 NO라는 사인을 보낸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선에서, 혹은 관계가 뒤틀리지 않는 선에서 부드럽게. 다만 이를 남성들이 알아채지 못할 뿐.

직장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내 첫사랑과 닮은 것 같아. 우리 데이트 할까’고 제안했을 때 여성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저 “에이 설마요”라고 얼버무리며 화제를 전환하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밝힌다. 혹은 직장 상사가 물건을 건네주는 척하며 후배 여직원의 손을 잡아왔다. 여기서 거칠게 뿌리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게 뻔한 상황. 결국 그녀는 그의 행동을 무시하며 자신의 무관심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그녀들의 사인을 알아챘을까. 아마 첫 번째 남성은 ‘자신의 데이트를 거절하지 않고 부끄러워했다’, 두 번째 남성은 ‘그녀도 조심스레 내 손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할지 모른다.

불평등한 위계관계 속에서 여성들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쉽게 NO를 외치지 못한다. 저자는 여성이 NO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배려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잘 수습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증거라고 언급한다. 특히 대립을 피하고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선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못한 채, 상대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 ‘상식’이 돼 버렸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NO라고 외쳐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 당장 ‘성평등’ 사회가 올리는 만무. 그래서 저자는 남성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확실한 Yes가 아닌 애매한 침묵은 ‘OK’ 사인이 아니라 ‘NO’ 사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고력을 키울 것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고용과 임금, 노동조건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 실제 남성 비정규직 비율이 10년간 48.0%에서 46.3%로 감소한 반면, 여성 비정규직은 52.0%에서 53.7%로 늘어났다.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로 직장을 잃기도 하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능력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여성의 노동은 더욱 치열하고 절박한 것이 돼 가고 있다.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상사의 눈치를 보며 매일을 고군분투한다. 운동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평등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남성 중심의 문화는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런 여성들에게 불평등한 관계를 사적으로 남용해 ‘작업’을 한 번 걸어보려는 것이라면 이미 성희롱 적신호가 켜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인 무타 카즈에는 업무상 자신의 권력 아래에 놓인 여직원과의 교제를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꽤 냉정한 조언을 한다. ‘한 번 꼬셔보고 싶다’ 정도면 지금 멈추기를 추천, 혹시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면 자신의 감독 권한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 만약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은 ‘사내 연애의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할 것. 첫째,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을 빙자한 데이트 신청’은 금물. 둘째, 여성이 이유를 들어 데이트 신청을 거부할 경우, 집요하게 요구하지 말고 깔끔하게 체념할 것(여성이 데이트할 마음이 있다면 ‘다음 주는 어떠세요?’라고 다른 일정을 제안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 셋째,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분풀이로 복수하지 말 것.

저자: 무타 카즈에
번역: 박선영, 강희대, 고주영, 박수경, 이은숙
출판사: 나름북스
분량: 275쪽
가격: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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