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간의 관계, 정치

[기획특집]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

개인(자유)주의와 공동체(사회)주의

고대 중국의 음과 양처럼 대립되는 두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고 어떤 개념 쌍은 많은 현상들에 맞춘 옷처럼 들어맞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극단적 두 입장 사이의 양자택일 구도를 벗어나서 다르게 접근하는 방식, 문제 틀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여러 주제를 다루려 한다. 양자택일을 벗어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극단적인 것은 나쁘고 중간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균형 잡히고 양식 있는 사람의 방식이어서가 아니다. 흔히 상반되는 두 항은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들의 특정한 경향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설정된 두 항은 현실과 오히려 멀어지기도 한다. 양 극단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을 딛고 세상을 보기 위해 개념의 틀을 넘어서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이어서가 아니라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문제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이항대립이 널리 사용되었다. 개인과 공동체라는 한 쌍의 개념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고 자기로서 활동하려는 경향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철학적 문제였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만큼 이 관계의 갈등적 측면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없었다. 철학적으로는 개별과 보편, 전체와 부분, 현실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사회와 국가, 이기심과 이타심 그리고 문제 많은 개념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등이 모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와 연결된 개념들이다. 개인과 집단을 각각 사회를 이루는 기본단위이자 목표로 보는 사회사상이 근대에 등장했다. 개인을 강조하는 사회사상이 자유주의 혹은 개인주의, 그 반대편이 공동체주의 혹은 사회주의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갈등상태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인간관을 전제한다. 인간이 개별적으로 완결되어 존재한다고 보면, 즉 개인을 고립된 실체로 보면 다른 개인과 공동체는 개인에 대한 외적 제약이 된다. 개인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어떤 것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개인이 희생할 것과 공동체로부터 받아올 것 사이의 가치 비교를 통해 거래와 절충이 이루어진다. 절충지점은 이 거래 과정에 참여한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또 상황에 따라 변하기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잠정적이고 불안정하다.

또 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하려면 공동체의 다른 개인들이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기도 한다. 이익 추구의 자유(특히 경제적 이익의 보존과 추구는 초기부터 자유의 의미였다)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 사이의 평등을 위태롭게 한다. 평등은 반대로 다른 개인의 자유에 의해 위협받는 자신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평등은 어떤 개인에게는 자유의 보장이지만 어떤 개인에게는 이전에 누리던 자유의 축소를 의미한다. 개인(자유)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공동체(사회)주의는 당연히 평등을 우선적 가치로 꼽는다. 자유는 이익 추구의 자유에서 출발했기에 나중에 등장한 어떤 자유도 소유권의 자유를 초과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제일 원리다. 공동체주의는 복고적이건 진보적이건 간에 사회 자체의 지속, 다수의 사회 구성원의 이익 또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추구의 자유에 한계를 설정하려 했다. 이게 자유와 평등의 역설이 발생한 배경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경향 즉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분은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개인을 통제, 억압하는 공동체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 사이의 지루한 공방과 절충이 근대 이후 정치철학의 주된 과제였다. 오랜 이론적 논쟁과 정치적 갈등 끝에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사회주의(공동체주의)의 대결은 자유주의의 최종 승리로 종결되었다는 선언이 20여 년 전에 나왔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가 그 근거였다. 이 역사적 사건이 자유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승리감을 만끽하던 (신)자유주의 체제가 심각한 위기와 저항에 부딪치면서부터 낡은 이념으로 여겨졌던 공동체주의의 여러 유령들이 (신)자유주의로부터 배제된 민중들의 몸을 빌려 속속 돌아오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나쁘게는 전체주의의 대표자로 여겨져 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파괴되고 약화되어서 그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해버린 사회를 다시 복원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양자택일에서 공동체를 우선시한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체주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이라는 문제 틀 자체를 전복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개인과 공동체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도 다시 정립하고자 한다. 그런 뒤에 등장하는 사회는 근대 정치의 양 축 중의 하나였던 공동체와는 다른 것이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희망했다.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공산당 선언”의 잘 알려진 구절이 마르크스주의적 공동체의 이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개인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고 활동하는지를 보자고 제안한다. 개인은 개체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 집단적 주체로도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순수한 개인도 없으며 어떤 개별성도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집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정교하고 세련된 또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획일화의 시도도 저항에 부딪치고 균열을 겪어왔으며 어떤 개인도 누군가 다른 이들과 함께 속하지 않는 절대 고독을 견디지는 못한다. 즉 개인과 공동체는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며 동시에 집단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개인과 공동체라는 두 개념은 하나의 현실이 가지는 다른 측면을 관념적으로 추상화시킨 결과물이다.

이 하나의 현실을 마르크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명제로 표현했다.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은 다른 자연적, 사회적 존재와의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다.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인간은 외부 자연과의 신진 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생명의 유지가 개인의 동일성의 첫 번째 전제다. 생명체는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즉 더 이상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생명체는 동일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섭취하고 소화하는 과정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사회적인 인간의 동일성은 더더욱 외부 환경과의 관계의 결과다. 개인의 기질, 취향이 가지는 선천적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은 후천적으로 채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것 이상을 말하기도 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현실화되는 것은 사회 속에서만 가능하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해도 붉음 자체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붉은 색을 세련되게 사용한 화가의 그림을 보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고, 붉은 옷을 입어서 타고난 취향을 실현한다. 그림, 물감, 옷은 사회의 산물이다. 어디까지가 선천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인지 어디가 외부 사회의 영역인지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고 경계가 그어진다 해도 그 선은 항상 변화한다.

주체와 객체는 상호작용한다

주체와 객체는 상호작용한다. 즉 주체적 개체와 공동체를 비롯한 객관 세계는 각자의 자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둘 사이의 경계는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나는 나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더 나 아닌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나 아닌 것에 개방하는 극단적인 과정이 나의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과는 반대로 나의 삶이 확장되고 충만해지며 기쁜 개방의 과정도 있다. 흔히 사랑을 그 예로 든다. 또 내가 모르던 것을 새롭게 아는 것,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경험, 적대적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관용과 공존 그리고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더 고상한 가치의 발견도 그런 경우다. 이 모든 것의 실현은 나와 남이 그리고 그 둘이 관계 맺는 방식이 폐쇄적으로 고정되지 않았기에 가능하다. 이제 문제는 개인과 공동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둘을 적당한 비율로 절충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방식을 그 관계망에 연결된 항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주체가 자신이 아닌 것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주체는 증오, 혐오,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나는 자본가이거나 노동자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남성, 여성 혹은 제3의 성으로 존재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도 존재한다. 물론 그 모든 것으로도 존재할 수 있고 그 중 어떤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정체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고 사회적 조건에 견고하게 결박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모든 동일성은 변화한다. 주체와 객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것과 단기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형성된 동일성을 선천적이고 고정된 것으로만 보면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게 된다. 그 두려움과 혐오는 신의 이름을 끌어와도 진정되지 않아 광장에서 부채춤이라도 추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동일성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모순적 존재가 실제의 인간이다. 우리는 살고 싶어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집단이 개인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에 빠지는 경우는 집단의 정체성이 고정적이고 폐쇄적일 때다. 집단의 구성원이 가지고 있거나 지향하는 정체성이 그 집단의 정체성과 다른 경우에 갈등이 일어난다. 집단적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대표적 사례는 민족국가의 성립이다. 폐쇄적 민족주의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일하지 않은 존재, 예를 들어 유색인종 이주노동자들을 배제하는 폭력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 개인 개인의 수와 힘이 증가되면 공동체의 배타적 정체성은 내부로부터 허물어진다.

사회적 관계와 새로운 인간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한다. 개인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면서 이성을 가지고 있고 자기이해관계를 중요한 정념으로 삼는 존재다. 근대인들이 생각한 이성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을 양으로 환산해서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근대적 인간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이 이기심과 계산능력과는 다른 본질을 가졌거나 적어도 이기심을 억누를 가능성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래야 공동체가 개인을 넘어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인간관을 전제로 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런 인간관은 환상이다.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처럼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결코 주어질 수 없다. 인간은 완결되고 선천적으로 초월적이고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모순은 개인과 공동체가 구성되고 상호작용하는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역사라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역사적이라는 말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미래에는 또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미래에 올 세상이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라면 그 시대에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할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모순은 역사 속에서 해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가해지는 가장 흔한 비판 하나를 생각해 보자. 비판자들은 공산주의 사회가 경제적으로 실패했다고 혹은 실패할 것이라고 전제하고(이 전제 자체에 대한 평가는 이 글의 대상이 아니다.) 그 이유를 인간 본성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경제적 이윤을 최대화하려 한다. 이 동기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모두가 평등해지면 다른 구성원과 사회 전체를 위해 노력할 동기가 없어진다. 그런 사회가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사회보다 잘 살 수는 없다. 오랫동안 설득력 있다고 받아들여진 논리다. 심지어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논리를 수용했다. 현실사회주의의 낮은 생산력의 원인을 경제적 동기 없는 생산방식이 인간의 이기심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분석한 논리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데 이타적으로 살기를 요구하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기심이 인간의 변치 않는 본질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가진 자기보존의 본능이나 다른 고차적 욕구들이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에서 실현되는 모습이 이기적 행태일 뿐이다.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사회적 경제론자들의 실험은 인간이 가진 이타적 본성을 오히려 입증한다. 이 연구들은 인간 본질을 전제한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이기적, 합리적 인간이라는 자유주의의 전제가 현실과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바뀌면 동시에 인간 자체도 새로워 질것이다. 인간 주체의 변화와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개인과 공동체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나도 변한다. 둘 사이의 상호적 변화는 나눌 수 없는 긴 과정일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그 과정의 결과로 구성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시 그 상호작용의 구체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설

근대 이후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국가 안에서 국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근대인들은 개인이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확대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보장받는 정치적 절차를 고민했고 그 절차를 고대 그리스에서 빌려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사회구성원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들을 결정하거나(직접민주주의) 그게 불가능하다면 개인의 의사, 이익을 다른 개인들과 이루는 공동체 특히 국가 안에서 원래의 것에 가깝게 다시 실현하는 것 즉 재현/대의의 방식(대의제 민주주의)이라고 생각했다. 근대인들은 민주적 국가를 통해 어떤 제약도 없이 자행되던 폭력을 규제하고 감소시키기도 기대했다. 하지만 국가가 등장한 이후 인류는 역사상 경험해 본적이 없는 대규모의 잔인한 폭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역설을 경험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이 전제 위에서 정치적 활동을 한다. 다음 회에서는 국가, 민주주의, 폭력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